당신께
조아라 장로님은 뜨겁게 안고 볼이라도 비벼 보고 싶었는데,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만났으니,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군요. 김(재준) 목사님, 함(석헌) 선생님 가신 뒤로 앞이 허전하다가 부산에 장기려 박사가 계시고 광주에 홍(남순) 변호사님과 조 장로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발견하고 응석이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이 되는군요. 조 장로님 댁에 가서 며칠씩 묵으며 쉬리도 하고 글이라도 쓰는 시간을 얻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군요.
WCC의 JPIC 대회가 얼마나 중요한 대회인데, 한국 언론에 그렇게도 주목을 못 받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당신의 사랑
박원순 변호사께
제가 김영삼 씨를 만난 것이 어느 일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저같이 기억력이 없는 사람인데도 그걸 기억하는 것은 다음날 그의 기자회견에서 받은 충격이 하도 커서 그게 월요일이었다는 게 똑똑히 기억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김대중 씨에게 사퇴를 종용해 보았다가 실패하게 된 경위부터 이야기했지요. 그러면서 그에게 사퇴를 종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으로 하는 것이라는 걸 말하고, 영호남의 지역감정 해소라는 면에서는 김 총재가 김대중 씨를 밀어 드리는 게 최선책이 아니겠느냐고 했지요.
그는 자기가 대통령이 되어야 할 이유를 세 가지를 들더군요. 첫째는 영남이 도저히 김대중 씨를 대통령으로 떠받들 마음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중산층이 김대중 씨의 사상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고, 셋째는 군부 내에 김대중 씨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가진 그룹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상도동 쪽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김영삼 씨에게서 그 말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영호남의 지역감정 해소라는 정치적인 대의명분 - 김영삼 씨와 민추협을 총파탄 일보 직전에서 건져 2.12 총선의 승리를 쟁취하게 하고, 마침내 87년 6월 민주 항쟁의 승리까지 끌어냈던 그 기막힌 대의명분이 이렇게도 역사에 역작용하는 대의명분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김대중 씨가 김 총재를 모시고 호남을 돌며 지지 유세를 한다면, 그거야 김대중 씨가 영호남 지역감정 해소에 크게 기여하는 아름다운 일이 되죠. 그러나 80년 5월 광주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길을 김 총재가 김대중 씨를 모시고 영남 일대를 도는 길밖에 없습니다. 저도 영남 일대를 돌아보고 절벽 같은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사퇴를 종용했던 겁니다. 그 절벽을 깰 수 있는 사람은 김 총재밖에 없습니다. 저하고 같이 84년 여름 광주로 가던 그 심정으로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그는 거의 침통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저는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김 총재는 김대중 씨가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렇다면 김 총재님이 그 말을 국민들에게 함으로써 그에 대한 중산층의 의혹을 풀어주십시오. 그리고 그를 밀어주십시오” 또다시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군부 내에 김대중 씨에 대한 비토 그룹이 있다고는 하지만, 두 분이 손잡고 같이 나서면, 전 국민이 철통같이 두 분의 뒤를 받쳐줍니다. 그리되면 정치적인 야심을 가진 군인들이 그 야심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번이야말로 군부를 국방에만 전념하는 힘으로 만들 수 있고,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두 분이 손을 잡는 일입니다.” 또다시 그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면, 광주 시민 학살에 대해 보복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김 총재가 대통령이 되면 그걸 해야 합니다. 그걸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물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 목사로서 김영삼 장로의 어깨에서 그 십자가를 벗겨 드리려는 겁니다.”
그의 입이 무겁게 열렸습니다. “알겠습니다. 내가 김 고문과 의논해서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저의 마음은 가볍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 김영삼 씨의 기자회견은 제가 그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걸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이리되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선택하는 일밖에 없지 않습니까? 정치적인 주권 행사는 정치적인 선택을 하는 일이니까요.
문익환 올림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해 김영삼 씨를 만났던 이야기를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