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식에 혁명이 일어났다

당신께

 

오늘 법정에서 당신의 모습이 안 보이더군요. 들어서면서 눈에 확 띈 게 성심이, 다음으로 유(원규) 목사, 성근이, 영금이 왔었나 본데 내 눈에 띄지는 않았어요. 25일 박(원순) 변호사님이 오신다고 해서 기다리다가 안 오시기에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봐서 휴정을 요청하고 거기서라도 변호사님들과 의논할 셈이었죠.

그런데 오늘 아침에야 재판이 오후라는 걸 알고는 오전 내 기다렸지요. 변호사님들이 이제나저제나 나타나시나, 가족이 나타나나 하고. 그러다가 시간이 되어 나가서 유(원호) 선생을 만났더니 변호사님들 변호 거부로 결정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최후진술도 하지 않기로 했지요. 최후 진술에서 하려던 이야기를 상고 이유서에 쓰기로 하고.

이번 우리의 고법 재판은 역사에 없는 재판이 되지 않나 싶군요. 모두 진술, 사실 심리, 증인 신문, 변호사 변론, 최후진술 하나 없이 판결을 내려야 하는 그런 재판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해라 이거지요. 투쟁치고는 소극적인 투쟁임에는 틀림이 없겠지만 그 나름으로 의미 있는 투쟁인 거죠. 내 느낌으로는 이런 소극적인 투쟁이 박 변호사님 마음에 안 들었던 게 아닌가 싶군요. 

어차피 정부는 안 들을 건데, 사법부도 마찬가지지만, 국민을 향해서 하는 소린데, 신문에도 제대로 보도도 되지 않는 걸 해봐야 힘만 빠진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국민을 향해서 하고 싶은 말은 1심에서 대강 했고, 더 심도 있는 이야기는 변호사님들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다 한 거고, 국민에게 나의 통일론을 전개한다는 게 어찌 보면 건방진 생각이죠.

나는 얼마 전 한완상 박사의 여론조사 결과를 신문에서 보고 우리 민족의식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1986년에는 통일이 가능하다고 대답한 사람이 16%밖에 안 되었거든요. 이것은 역대 정권이 국민을 반통일적으로 세뇌해 왔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던 것이 89년에 오니까 통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52%로 뛰어올랐다는 것 아니오? 그리고 미국 축구팀과 이북 축구팀이 경기를 한다면 이북 팀을 응원하겠다는 사람이 86년에는 21%였는데 89년에는 72%로 껑충 뛰어올랐거든요. 아직도 미국 팀을 응원한다가 28%. 얼굴이 뜨거워지는 일 아니겠소?

우리 국민의 정치의식의 수준을 보여주는 설문은 ‘자유민주주의로 통일이 되어야 하느냐’는 것이지요. 놀랍게도 이 설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한 사람이 26%밖에 되지 않았다는 거, 이건 정말 깜짝 놀랄 일이죠. 그러면 나머지 74%는 공산 통일을 원한다는 말인가요? 그건 아니죠. 잘 모르겠다는 사람도 상당수 있겠지만, 어느 한쪽의 제도를 상대편에 강요하는 식으로는 통일이 안 된다는 거겠지요. 한완상 박사에게 바로 이 설문에 대한 세목을 알아봐 주었으면 싶군요.

오늘 저녁 신문을 보면서 역시 민(民)이 이기고 있구나 하는 걸 발견하고 마음 흐뭇하군요. 김영삼 씨를 수렁에서 건지려고 권력층은 악법 개폐에 적극 나선다니. 민에게 밀리고 있는 거죠. 기왕 밀릴 바에는 기꺼이 밀려 주었으면 얼마나 좋겠소? 민에 밀리는 게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건데, 민주 정부가 되는 건데.

통일 문제도 그래요. 딱 하기 싫은 걸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게 바로 민에게 밀리고 있다는 거거든요. ‘통일이 가능하다’가 16%에서 52%로 3년 동안에 껑충 뛰었다면 이건 못 막는 건 줄 알고 성큼성큼 앞서가 주었으면 얼마나 좋아요? 피차 이런 기회주의는 별로 나무랄 것 없지요. 민주적인 기회주의라고나 할까요? 오늘 재판부는 2시에 시작해서 결심하려고 했으니, 치밀하게 계획된 재판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때 시작해서 변호사의 변론과 두 피고의 최후 진술까지 들으려고 했으니, 요식 행위로 간단 간단히 넘기려고 했던 건데 우리가 다 안 해 버렸으니 김이 팍 샜을 것 같군요. 검사도 김이 다 빠진 소리로 웅얼거렸고.

집이 엉망일 텐데. 수도, 보일러 다 터지고. 내일 만나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죠. 그럼 이만.

 

1990. 1. 29. 당신의 사랑

 

 

오늘 있었던 2심 재판에 대한 이야기, 한완상 박사의 통일에 대한 여론 조사에 대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