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아는 것이 치료의 첫걸음

당신께

 

오늘은 음력 설이라고 아침에 떡국이 나와서 먹었는데, 점심에 또 고마운 솜씨로 끓인 떡국을 먹었군요. 오붓한 설날을 보낸 셈이지요. (조)성우의 세배를 멀리서 받았구요.

저번에 신문에서 ‘설’이라는 말의 본뜻이 ‘조심한다’는 뜻이라는 걸 읽고 설이란 본래 안식일처럼 귀신이 발동하는 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귀신이 설치는 날 함부로 나가 다니다가는 무슨 일 당할지 모르니까 집에 틀어박혀 있으라는 것이 바벨론의 안식일의 뜻이었는데, 한국의 설날도 어쩌면 그런 날이 아니었나 싶군요. 중국에서는 보름날이면 귀신을 쫓느라고 무엇이나 소리 나는 걸 두들기면서 돌아다니지 않아요? 보름 동안은 집에 틀어박혀서 도박이나 하고. 중국에서는 보름 동안 귀신이 설치는 걸로 생각했던 것 같군요. 어쩌면 ‘설친다’는 말과 ‘설’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람이 조심할 때라는 건 귀신이 설치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니었을지?

설이 언제부터 비신화화되어서 즐거운 때가 되었는지 역사적으로 궁금하군요.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로 양력설이 정착되었는데, 우리는 음력설이 되돌아온 걸 보면서, 우리는 일본 사람들 보다 보수적인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는 양력을 왜놈의 설이라고 생각했으니 반일 감정이 양력설을 거부하게 한 것이나 아닌지?

그동안 집의 보일러, 수도가 다 얼어 터지고 어머님이 키우시던 화초가 다 얼어 죽도록 집을 내버려 두고 농성한 보람이 아흐레 동안 서울대학병원에서 진찰받고 교도소로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하면 허탈감마저 느끼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나 나로서는 얼마나 개운한지 모르겠어요. 척추와 갑상선에 문제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도 다행이지요. 병을 안다는 건 치료의 첫걸음이니까. 재소자들 진료 문제의 심각성을 사회의 관심사로 제기할 기회가 되었다는 것, 교회로서는 중요한 선교의 장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라고 해야겠지요.

이번 나의 건강의 한계를 알 수 있었던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당신의 건강에는 그런 한계가 없는 것 같군요. 일흔이 넘는 할머니로서 그 긴 농성을 치러 냈는데 저번 날 접견장에 나타난 당신의 모습은 생기발랄, 그것이었거든요. 내게는 고혈압까지 포함해서 세 가지 결함이 있는데 당신에게는 결함이 하나도 없으니, 내가 복 많은 사람이지요.

김병곤 씨와 함께 투병할 기회를 얻지 않나 싶었는데, 그 기대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 정말 아쉽고 정말 안타깝군요. 그러나 서로 손을 잡고 기도할 수 있었고 격려할 수 있어서, 몸은 떨어져 있지만 믿음으로 같이 투병한다는 연대는 이루어진 거죠. 지금까지 그를 붙들어 주신 하느님의 힘이 기어코 그를 살려 내리라고 믿고 기도합시다. 나를 위한 기도를 몽땅 그에게로 돌려주시오.

 

(1월28일) 오늘 아침 묵시록을 읽다가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11:15)는 구절에 이르러 눈이 번쩍 뜨이는 걸 느꼈다오. 묵시록의 메시지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리스도의 나라는 민중의 나라라는 말도 되는 거고.

호근이가 준비하는 WCC의 JPIC 대회의 Integrity of Creation은 『창조의 총화』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거 같군요. 우리말로 하면 『옹근 하나』라는 뜻도 되구요. 창조의 총화는 인간세계를 포함한 전 세계를 말하는 거고. 자연계와 인간 세계가 옹근 하나로 총화를 이룰 때, 거기 정의가 있고 평화가 오죠. 그것이 묵시록 11:15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나라이구요. 『새누리』의 뜻이 그런 거라도 해도 되겠죠. 우리의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도 이런 차원으로 올라서야 하죠. 마음은 당신 옆에.

 

사랑

 

 

외부 의사에 의한 진료를 요구하면서 가족이 농성한 결과, 9일간 서울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서 외부 치료의 수확을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