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의 시대와 도덕의 시대

당신께

 

감옥이니까 설날에까지 편지를 쓰는군요. 설날 설날 하지만, 이건 예사 설날이 아니에요. 90년대는 기어코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볼 때, 89년으로 분단의 시대를 마감해 버리고, 오늘로 통일을 향한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살다가 아버님 기일까지 잊어버리기까지 했는데. 

오늘 아침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더니 흰 눈이 고요히 내리고 있는 것 아니겠소? 이건 정말 좋은 징조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뭐예요. 눈 덮인 소나무들 속에서 들려오는 참새 소리 또한 은근하고 그윽한 정겨운 속삭임 같아 내 마음 또한 그윽해졌소. 참새 어디에 저런 그윽함이 있었을까? 참새에 대한 나의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죠. 

오늘 마음으로 어머님께 세배를 드렸소. 아버님 산소로 찾아가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고. 3일에나 손주들의 세배를 받겠군요. 세뱃돈은 당신이 준비해 두었으리라 믿어요. 나흘째 두통이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이제 안심해도 될 모양이군요. 감사. 감사. 감사. 

 

이영희 교수님께

 

올해 설은 예사 해 바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교수님께 편지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저의 방북 소식을 듣고 그야말로 눈물이 펑 쏟아질 글을 한겨레에 실었대서 그런 마음이 든 건 아닙니다. 80년대 한국 언론사에 거사(巨事)인 한겨레 신문의 창간만큼이나 큰 무게를 가지고 한국 언론계의 횃불이 되신 분이 바로 이 교수님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너무 지나친 과장이라고 하실지 모르나, 저는 그렇게 느끼는 걸 어찌합니까? 이렇게 느끼는 것도 저의 자유이지요.

집행유예로 풀려나신 후에 쓰시는 글들이 그전 글들보다 훨씬 무게가 있어서 더욱 좋아졌습니다.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 전문가의 글이 왜 좋을 수밖에 없느냐는 걸 깨닫게 해 줍니다. 국가보안법이 위헌이요, 반시대적인 억지라는 것을 어쩌면 그렇게 증거를 대가면서 설득력 있게 잘 설파해 주셨습니까? 그 글을 읽으면서 국가보안법은 대한민국의 치부라는 생각이 들어서 항소이유서에 그렇게 썼습니다.

『사회와 사상』 12월 호에 쓰신 국가보안법이 없는 시대를 90년과 함께 맞이하자고 하면서 쓰신 글도 잘 읽었습니다. 거기서 교수님은 이성의 시대가 와야 한다고 하셨더군요. 저는 그 대목을 읽으면서 계산으로 사는 슬기와 선악의 판단으로 사는 도덕의 관계에 대해서 충격적인 깨달음을 받았습니다. 이 문제는 김승훈 신부님께 쓴 편지에서 거론했던 문제입니다.

칸트는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이원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이원적으로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어떻게 하면 같은 것의 두 면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가 문제였습니다. 이성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보는 인간의 능력이라고 일단 정의해 놓고 봅시다. 편견 없는 사물의 판단이 가능하냐는 문제가 있습니다만. 너무나 오랫동안 흑백논리의 위력에 휘둘려서 우리는 사물에 대해 정당한 판단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정당한 판단을 과학적인 판단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교수님이 이성의 시대를 말했을 때 생각하고 있었던 게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성적인 판단, 곧 과학적인 판단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온갖 과오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준다는 것이 교수님의 생각 아닙니까? 이성적인 판단만이 우리 모두에게 이로운 결과를 안겨줄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나의 소리(小利)만을 탐하는 일은 비이성적인 악이 되고, 우리 모두의 대리(大利)를 탐하는 일은 이성적인 일이요, 그게 바로 도덕적인 선이 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이성을 기초로 한 도덕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자연법의 도덕적인 기초도 여기 있구요.

도덕 문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걸 이 교수님을 보면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도덕은 판단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을 관철해낼 수 있는 의지가 있어서 완성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성적인 판단을 기초로 한 도덕적인 선을 관철하는 강한 의지, 그게 바로 도덕적인 의지죠. 저는 그 도덕적인 의지를 교수님의 생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덕적인 의지야말로 이성적인 판단을 도덕적인 선으로 결실 맺게 하는 힘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고 보면 이 교수님이 바라는 이성의 시대는 그대로 도덕의 시대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겨레의 내일을 위해서 몸에 불을 질러 민족의 제단에 바치는 젊은 학도들과 노동자들 앞에선 머리도 들 수 없다”고 하십니까?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지금 각성하는 이성의 시대, 도덕적인 자각이 눈을 뜨고 활활 타오르는 황홀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90년 대를 소신껏 살아 봅시다.

 

통일 염원 46년 설날

 

이성의 시대가 와야 한다는 이영희 교수의 글을 읽고 이성과 도덕에 관한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