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곳

당신께

 

아무려면 노래가 그렇게도 안 되죠. (이)건용이에게 「어디로 가서 사랑을」도 주어서 작곡을 부탁해 보았으면 좋겠군요. 내 가사가 그동안 몇 편 노래가 되었어도,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는데, 이번만은 정말 마음에 들었소. 이렇게 음악이 가사에서 나와야 하는 건데. 언젠가 은숙이 반주에 곁들여 부른 것을 녹음해 가지고 와서 접견실에서 들었으면 좋겠군요. 은숙이 실력으로 그걸 못 부를 리 없지만, 거기 담겨 있는 음악성을 몸에 배어 부르려면 좀 시간이 걸리리라는 걸 알 수 있군요.

어제 나는 (김)지하의 생명 일원론의 역동적인 이원성에 관해서 나 나름으로 쓰다 말았는데, 좀 더 계속해 보겠소. 마음이 몸에서 독립되어 정(正)에 반립(反立)이 되면서 마음이 허위의식에 빠짐으로써 반생명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몸-마음 이원론의 부정적인 면이지요. 그런데 이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 창조적인 역동성이 나오는 거죠. 이걸 철학에서 변증법이라고 하는 거지요. 허위의식에 빠져서 반생명적이 될 위험성(혹은 위기)은 있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인간의 마음이지요. 지하의 마음 같은 날카롭고 창조적인 마음이 그런 마음이지요.

이번 지하의 시집을 읽다가 처음에는 몸을 완전히 잊어버린 마음의 세계에서 읊어진 선(禪)적인 노래들에 대한 빈정거림에 난 사실 좀 불쾌감마저 느꼈었소. 천재들에게 흔히 있는 냉소적인 것을 난 그리 좋아하지 않거든요. 니체에게서 느끼던 속물근성 같은 것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 둘째 부분에 들어가서는, 이 친구 이러다가 니체처럼 허무주의에 빠져 죽어 버리고 말지 않을 건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덜컥해지기까지 했는데, 셋째 부분에 가서 이 친구, 이제 발이 언덕 위에 올라섰구나 하는 걸 발견하고 가슴을 쓰다듬어 내렸소.

마음에 버림받은 몸, 마음의 횡포 아래 시달리던 몸, 그건 그에게서 소주에 시달리는 몸이지요. 그 몸이 얼마나 괴롭고 아프고 외로우냐는 걸 지하는 2부에서 내 가슴이 덜컹덜컹할 정도로 무섭게 노래했는데, 3부에 가서 “이제 나에게 오세요/문 열어놓았습니다” 하고 몸은 마음을 환영하고 마음은 몸을 환영하는 관계로 회복되는군요.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화해이지요. 이렇게 될 때 그의 “오른쪽 손끝에/이월 추운 시절 늘 그때마다 매화가 자라는 것”이라는 거군요. 며칠 전 편지에 예수가 포도나무라는 건 그냥 비유가 아니라고 한 것 기억하세요? 예수의 생명과 포도 넝쿨의 생명은 그게 그거라는 말이지요. 이제 지하가 그 매화 꽃나무가 되어 손끝에 꽃이 피리라는 거군요. 그의 시가 그대로 매화요, 매화꽃이 그대로 그의 시인 거고. 이를테면 지하의 마음이 스스로 마음의 허위의식을 극복하고 몸과 하나가 되어 자연이 되는 거죠. 마음을 자연에 대립되는 반자연으로 보는 시각이 극복된 거죠. 그걸 지하는 「사랑」이라는 시에서 “돌멩이도 좋고/쓰레기도 좋고/잿더미라도 좋지요/사랑하겠다는 것”이라고 읊고 있군요.

이제 지하는 눈에 뜨이는 모든 것, 손에 만져지는 모든 것 속에서 지성소를 보기 시작한 거죠. 물론 그 자연의 일부인 지하의 가슴속에도 지성소가 차려진 거죠. 그의 눈이 닿은 것, 그의 손이 건드리는 모든 것이 거룩한 것이 된다는 말도 되구요. 한마디로 무당이 된 거죠.

천재적인 통찰로 그걸 본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산다는 게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소? 지하의 마음이 몸과 완전히 화해해서, 이 이상 더 몸을 학대하지 않고, 몸을 소중하게 떠받들어 모심으로써 그의 생명이 삼각산 선바위처럼 튼튼하고, 상수리나무처럼 우람하고 싱싱하게 되어야 하는 건데, 그리 되어야 친구들이 염려하듯 그의 생명론은 추상이나 관념이 아닌 억센 삶이 되는 건데, 그건 아무래도 두고 봐야 할 것 같군요. 원주에서 내가 주었던 충고를 다시 주고 싶어요. “지하! 국토가 농약과 화학 비료로 죽어 가는 걸 가슴 아파하게. 그러면 지하의 몸도 국토인데, 그 국토가 화학주로 죽어 가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어.”

어제 편지와 오늘 편지를 지하에게 보내 주구려. 그동안 나의 책, 시집을 한 권도 지하에게 보내 주지 못했는데, 보내 주면서. 난 지하의 서재에 들어가 보고 이 친구는 남의 책을 별로 읽을 필요가 없는 친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하! 건강해야 한다구. 

동환의 생명문화 창조도, 지하의 시가 그대로 매화꽃이듯, 자연이 되어야 참 생명문화가 되는 거라고 믿어요. 문화란 마음이 몸을 부려서 이룩하는 것이라는 통념을 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 될 때 문화 자체가 반생명적이 되는 거니까요. 문화의 원형은 농사짓는 일이라는 것이 창세기 2장의 철학이거든요. 생명을 싹틔우고 키우고 꽃피우게 하는 것일 때 우리의 모든 문화적인 활동은 반생명적이 아닌 생명 문화가 되는 것이거든요.

예수야말로 몸과 마음이 하나인 생명 사랑에 몸을 바치신 분인데, 기독교가 헬라 철학을 통과하고 중세기 가톨릭의 자연과 신앙이라는 이원론을 거치는 동안에 어느새 반생명적이 되어 버리고 말았군요.

내가 평화의 복음이 생명 사랑 운동이라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이라는 걸 감옥에서 깨치는 동안, 얼굴 한 번 못 만나면서도 지하가 감옥에서 같은 걸 깨쳤으니. 동환이도. 감옥이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곳인가 보죠. 어쩌면 이것이 헤겔이 말한 시대정신이라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내일은 한국의 무당 종교도 근원에 있어서 생명 사랑의 종교라는 이야기를 쓰기로 하지요. 오늘은 이만.

 

1986. 10. 16. 당신의 늦봄

 

김지하의 시집을 읽고 생명 사랑에 대한 생각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