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신학, 몸의 신학

 

아우에게

 

그동안 편지 두 장을 보내주어서 고마웠어. 현기영의 소설에 대한 교육적인 관찰에 대해서는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야. 마음을 신학의 소재로 삼는 데 대한 안(병무) 박사의 유보적인 반응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어. 우선 내가 마음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인도적인 (요가) 심성과 접촉하는 데서부터인데, 그것은 보이는 세계나 역사에 대한 인도적인 심성의 부정적, 소극적 태도는 신학에 바람직한 계기를 마련하기 어렵다는 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고, 이 점은 너무 불교적인 데 대한 유보적인 태도에서도 같은 걸 느낄 수 있어. 또 하나 서구의 관념적인 함정에 다시 빠질 것이 아니냐는 기우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내가 마음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은 서구의 관념론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데 주안점이 있었던 거야. 서구의 관념론은 이념-사상과 논리를 매개로 하는 것인데, 나는 이념-사상-논리의 세계, 곧 말의 세계에서 모든 말이 나오는 말의 근원인 마음으로 돌아가 보자는 생각이기도 했지만, 역사와 자연의 의미를 말 이전의 차원에서 찾아야 하겠다는 데 주안점이 있었다고 할 거야. 인도의 심성이라도 유심론이 아니라, 몸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가를 통해서 이에 접촉한 것은 퍽 다행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몸과 마음의 이원론에서 몸-마음의 일원론을 그야말로 몸-마음으로 한꺼번에 경험하게 해준 것이 요가였기 때문이지.

내가 마음의 신학을 말할 때는 그것은 곧 몸의 신학인 거지. 몸과 마음으로 동시에 겪는 아픔, 슬픔을 극복해나가는 일이 안 박사가 말하는 사건인 거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는 기쁨은 축제로 사건화하고. 그것이 또 새 지평을 여는 사건의 시초가 되는 거고. 80년 5월의 경험에서 사람이 마음이 되는 정도는 슬픔의 정도에 정비례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프고 슬픈 마음으로 역사를 밀고 나갈 때만, 역사를 파괴적이 아닌, 파멸이 아닌, 구원으로 밀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이 그때의 깨달음이었거든. 이 민족의 통일은 우리가 모두 민족의 비극에 함몰할 때뿐이라는 것이 나의 확신이 되어있는 거지. 사건을 이해하는 일을 신학이라고 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말의 신학을 극복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사건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이해한 것을 조심스럽게 말로 표현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 이미 표현된 말을 거쳐서 사건에 다다를 때도, 이성이 아니라 마음이 앞을 서야 한다는 것, 그냥 마음이 아니라, 슬픈 마음이 앞서고, 이성은 극히 겸손하게 뒤따라가며 그것을 말로 정리해주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 거야.

불교에는 사회정의가 약하다는 점인데, 아침 접견장에서도 말했듯이, 석가모니가 만인을 부처로 봄으로써 인도의 병폐 중의 병폐인 계급제도를 깨려고 했다는 것은, 그의 종교가 그냥 명상에서 시작해서 명상으로 끝나는 것 같은 후대 불교와는 달리, 그가 강한 정의감의 사람이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아. 그가 본 인도의 악, 불의는 계급제도였을 거야. 그가 불다로서 추앙을 받으면서도 모든 사람들을, 부라만들은 같이 앉으려고도 하지 않던 천민들을, 부처님 공경하듯 두 손을 합장하고 인사를 했다는 것은 커다란 혁명이 이니었겠어? 바리새인은 같이 앉으려고 하지 않는 천민들과 같이 먹고 마시던 예수의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세리와 창녀에게 천국 시민권을 취득하는 최우선권을 주신 예수의 모습 말이야.  

기독교가 유대에서 뿌리가 뽑혔듯이, 불교도 인도에서 뿌리가 뽑히고, 다른 나라들에 가서 왕성을 하는데, 그래서 인도의 계급제도를 깨는 데 별 공헌을 못하고 말았는데, 그 원인이 어디 있는 것일까? 회교도들의 인도 침입 때, 이에 저항할 힘이 인도에는 불교밖에 없었기 때문에, 회교도들에게 철저히 박멸당하고 만 것 때문일까? 주후 70년대, 로마군에게 예루살렘을 위시한 유대인들이 박멸당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성지에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인가? 이 점에서도 기독교 역사와 불교의 역사에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 불교가 회교도들에게 박멸당하지 않고 살아 있어서 인도의 강력한 종교가 되었더라면, 인도의 계급제도는 극복되었을지도 모르지.

석가모니는 예수처럼 정의라는 말을 쓰지 않고, 대자대비라는 말만 쓴 것일까? 물론 예수의 정의라는 말속에 담겨 있는 속살도 “슬픈 사랑”이었지만.

요새 내가 읽고 있는 유마경 (불교의 세속화 신학이라고 보이는데), 거기서 석가는 佛國土는 『곧은 마음』에 있다고도 하고, 『자비』에 있다고도 하는데, 이 『곧은 마음』이 정의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싶어. 유마경을 몇 번 정성 들여 읽고 불교의 세속화 신학에 대한 나의 이해를 언제 써 볼 거야. 갈릴리의 예수를 찾기 어렵듯이 후대의 불도들의 손으로 착색되지 않은 석가를 찾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아. 아니 그보다 더 어려울 것 같아. 네가 말했듯이 미륵불교를 캐보는 것도 좋은 일일 테고. 내일 법정에서 만나자고.                   

 

형 씀

 

동생에게 썼던 편지의 답을 받은 후, 다시 그에 대한 생각을 보냄.

마음의 신학, 불교에 대한 생각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