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마음은 맑은 마음, 맑은 마음은 곧 슬픈 마음

아우에게

 

어제저녁에는 현기영 씨의 『아스팔트』를 읽다가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어. 그는 평생 제주도의 비극 (이 겨레의 분단의 첫 비극)을 파헤쳐 작품화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는 작가야. 그 작품은 산사람들과 관군 사이에 끼어서 앞뒤곱사가 된 농민들의 비극을 그리고 있는데, 노인들, 아녀자들이 그 추운 겨울에 불기 하나 없는 동굴에서 얼어 지내다가, 소위 귀순이라는 절차를 밟고 하산해서 모닥불에 몸을 녹이는 장면에 이르러 작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런 말을 내뱉는다고. “모닥불은 따뜻한 게 아니라 차라리 시원하다”고. 나야 만주 추위를 아는 사람인데도, 언 몸이 녹는 것이 시원하다는 느낌은 못 해 보았거든. 이건 아무래도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겠지.

정말 가슴을 할퀴는 듯한 아픔과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이었어. 나는 이 작가야말로 민족화해의 길을 아프게 아프게 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모두가 오직 희생자들이거든. 그러니 아무도 미워할 수 없는 거야. 『길』이라는 작품에서는 자기 아버지를 죽인 옛 토벌대원을 만나는데, 그가 바로 자기가 제일 사랑하여 온갖 기대를 걸고 도와주며 격려해 주는 제자의 아버지인 거지. 그는 원수 갚을 생각은 없고, 아버지가 죽어서 묻혀 있을 자리라도 찾아서 아버지의 뼈라도 찾아 묻어드리고 싶은 건데, 그걸 알아내지 못했는데, 아버지를 죽인 장본인이 양심의 가책으로 몸을 깎아 먹다가 죽어 버린다는 이야기.

이 슬픔 때문에 작가는 아무도 미워할 수 없는 큰마음을 가지게 되는 거지. 그 큰마음은 곧 담담한, 아니 민족의 비극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순수해지는 거지. 마태복음 5장에서 가난한 마음은 맑은 마음이요, 맑은 마음은 곧 슬픈 마음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거든. 그 마음이 곧 정의를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는 마음이요,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평화를 이룩하는 마음인 거고. 그 일을 위해서 당하는 모든 고난을 짊어지는 마음이지. 남의 고통까지 대신 짊어지는 마음을 우리는 큰마음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어?

이렇게 해서 산천초목과 함께 온 누리에 충만한, 누리를 꿰뚫고 그 속에서 숨 쉬는, 그러면서도 온 누리를 품에 안는 큰마음이 역사 속에서 괴로워 몸부림치는 큰마음으로, 아니 슬픔으로 경험하게 되는 거 아니겠어? 모세가 광야에서 들은 목소리는 이 슬픔에 마음이 닿아서 속삭이는 모세 자신의 목소리였다고 Feuerbach는 말할 테지. 그건 분명히 맞는 말이지. 그러나 그건 모세의 목소리이기 전에 애굽에서 고생하는 히브리인들의 아우성이 아니겠어? 그런데 그런 아우성이 애굽에만 있는 것이 아니지. 그건 세계 각처에서 일고 있는 아우성의 일부인 거지. 모세 개인의 슬픔, 애굽에서 아우성치는 히브리인들의 슬픔을 꿰뚫고, 그것을 넘어가면서 동시에 이를 얼싸안고 하늘과 땅에 사무치는 슬픔, 누리의 큰마음에 울리는 슬픔이 모세의 작은 마음에 들려왔던 거지. 이건 아무도 뿌리칠 수 없는 소리인 거지.

광야로 나가 40일을 금식하면서 고민하신 예수, 십자가의 길 마지막 고비에 다다라 게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괴로워하신 예수의 슬픔도 그 큰 슬픔에 벗어날 수 없이 사로잡힌 한 작은 인간의 슬픔이었던 거지. 석가여래가 대자대비를 설하신 것이 어느 경에 기록되어 있는지 아직은 모르는데, 그도 생로병사의 인간고를 만나는 것이 계기가 되어, 아니 인간고에 사로잡힌 몸으로 궁궐에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 아니겠어? 반야경이나 금강경에서 그가 설하신 건 어디까지나 淸淨心인데, 그 맑은 마음은 곧 슬픔에서 온 것이었고, 슬픔으로 맑아진 마음으로 세상을 보았고, 중생 제도에 뜻을 두게 되었던 것이 아니었겠어? 그에게 있어서는 한없이 슬픈, 한없이 큰마음이 곧 모든 사사로운 욕심과 편견을 벗어버린 맑은 마음이었던 거지. 대자대비 – 큰 슬픔은 곧 큰 사랑인 거고.

진정으로 큰 슬픔은 자살 같은 도피를 하지 않지. 진정 큰 슬픔은 그 슬픔 속에 몸을 내던지는 거지. 그래서 모세는 파라오와 대결하려고 에집트로, 곧 죽음을 향해서 걸어 들어가는 거고,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길을 가신 거고, 석가여래는 궁궐의 영화를 버리고 사바세계에 몸을 내대신 것이었지. 이렇게 해서 슬픔 마음은 사건이 될 수밖에 없는 거지. 슬픔이 만들어내는 사건은 구원을 이룩하는 사건이 되는 거지. 구원이 되는 사건은 슬픔이 동기가 되고, 슬픔이 밀고 가는 데서만 일어나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말의 신학, 이성의 신학을 극복, 곧 관념론을 극복하는 것 아니겠어? 슬픔의 극복은 곧 기쁨인 거고. 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그러나 참 기쁨은 슬픔을 극복한 다음에 얻는다기보다는 그것을 슬픈 사람들이 같이 극복해 나가는 과정 속에 있는 거고.

오늘은 이만.                             형 씀

 

현기영의 소설을 읽고 성서에 나오는 슬픔의 문제를 동생에게 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