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를 통한 깨달음

아우에게

 

내가 몬,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걸 느끼기 시작한 것은 요가의 경험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요가를 통해서 인도 정신에 눈이 뜬 것이라고나 할지. 그걸 깨치면서 밥의 의미를 알게 된 거지. 밥이 하늘이라는 (김)지하의 깨침과 일맥 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건 거고. 떼이야르는 우주의 길고 긴 역사의 오메가 포인트로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를 생각했지만, 난 한 시간 전에 먹은 밥이 이미 나의 몸이 되면서 하늘과 땅의 큰마음의 작은 반짝임으로 이미 내 속에서 눈을 뜨는 것을, 이를테면 오메가 포인트를 경험하는 거야. 

오늘도 나의 작은 마음에서 큰 눈을 뜨는 무한히 큰마음이 곧 하느님이신 거지. Feuerbach 식으로 말한다면, 무한 곧 하느님은 유한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소원의 투사인 거겠지. 그래서 무한은 인간의 자의식이라는 것 아니겠어? 유한한 나의 작은 마음과 고마움이 경험하는 무한히 큰마음이 하나라고 할 때, 그것이 인간 자체의 의식이라는 것은 어제도 말했듯이 진리의 중요한 일면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겠지.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희망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맞지 않는 거야.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40억을 넘는 사람들 속에 다 있는 마음, 그리고 그 사람들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로 거슬러 올라가고, 또 앞으로 아들, 딸, 손주, 증손, 고손으로 끝없이 이어나갈 사람들에게 하나 빠지지 않고 있을 마음, 오늘도 그 40억 인구의 몸속을 거쳐 가는, 몸속에서 잠자고 있다가 눈을 번쩍번쩍 뜨는 마음 – 이걸 어떻게 무한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건 사변의 요청이 아니고 경험이야.

우리의 마음이 마무리 작아도 그것은 무한히 큰마음의 흐름 속에 있는 거지. 그 작은 마음들에 큰마음이 계시고, 그 작은 마음들이 그 큰마음 안에 있는 거고.

그러나 우리의 작은 마음들에서 큰마음이 눈을 뜨는 순간은 우리가 슬픔에 빠질 때라고 생각해. 작은 마음들이 큰마음과 하나가 되는 복된 관계가 깨어지는 때인 거지. 나의 작은 마음이 다른 작은 마음들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키는 비극이 벌어지는 때인 거지. 이것은 곧 큰마음과도 스스로 관계를 끊는 일인 거고.

그런데 이런 소외는 우선 나의 존재 속에서 몸과 마음이 통일을 잃어버리고 자기 분열 상태에 빠지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라는 바울의 비명이 여기서 터지는 거지. 그런데 문제는 몸이 마음을 배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음이 몸의 진실을 거부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것이 진실이지. 이건 그동안 내가 몇 번 자세히 썼으니까, 되풀이하지 않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몬-몸은 정직하다는 것, 거짓은 몬-몸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 따라서 마음은 오직 몬-몸의 진실과 일체가 될 때만, 진실일 수 있다는 것, 그런데, 마음이 몬-몸의 진실을 거부하고, 이에 반역하는 데서 사단이 벌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정직한 경험이라고 나는 생각해.

문제를 너무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인지 모르겠군. 이점은 앞으로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어. 아무튼 몸-몸의 요청 같은 걸 외면하고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의 횡포, 그것이 곧 악인 거고, 악이 바로 인간과 인류의 파탄, 비극의 원인이 된다는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을까? 그 악의 내용은 욕심이고. 이 악의 기원이 개인에서 시작되는 것이냐, 사회적인 모순에서 생기는 것이냐는 것은 아마도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는 논쟁과 같은 거겠지. 사람은, 비단 사람뿐만이 아니지, 모든 것은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니까, 이 둘도 동시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악이라는 게 인간과 사회를 이원화하는 요소인 동시에 악의 기원을 설명하려다가 인류는 이원론의 함정에 빠지게도 된 것이 아닐까?  

 

두 번째 장이 분실되었음

 

몸과 마음의 관계, 큰마음과 작은 마음의 관계, 악의 근원 등에 대한 생각을 동생에게 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