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의 신학

동환에게

 

기장 총회에 가서 강연했다는데,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하군. 총회는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내가 문서위원회 워원장인데 각 분야에서 제출한 문서들이 최종 어떤 모습으로 총회에 상정되었는지. 이런 일들은 지금 나로서는 생각한다는 것이 실없는 일이지만.

오늘 아침에 누가복음의 최후 만찬 기사 다음에 제자들이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까 하는 걸 가지고 입씨름이 벌어지는 기사에 부딪혀서, 다른 복음서들을 조사해 보니까, 이건 누가복음에만 있는 것 아니겠어? 누가복음의 편집 의도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 의심할 나위 없이 드러난 것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 같았어. 그다음 곧 수제자 베드로의 비겁한 모습이 (이건 네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지만) 너무 선명하게 되는 걸 느꼈어. 최후 만찬이라는 엄숙하고 비장한 장면 끝에 제자들의 구태의연한 추잡한 모습이 노출되고, 곧이어 그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의 추태, 그 결과로 베드로는 하늘이 무너지는 회개를 하는 거고, 앞섰던 베드로가 꼴찌가 되고, 꼴찌에 끼어들지도 못하던 세리와 창녀들이 앞장을 서는 일이 극적으로 연출되는 걸 ‘누가’는 이렇게 멋지게 그려주고 있으니.

바울의 회심도 이런 문맥에서 보면, 이해가 더 깊어질 것 같아.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리새인이라는 게 부끄럽기보다는 자랑스러웠던 것이 아닐까? 부모가 얻은 시민권이지만, 그것이 조금이라도 부끄러웠다면,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회심 후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가 로마 시민이라는 걸 주장하지 않어? 그런 사람으로서 세리와 창녀들까지 섞여 있는 갈릴리 예수의 무리를 유대 민족과 종교를 해치는 부끄러운 것들이라고 생각하고 싹 쓸어버리려고 하다가, 180도 생의 전환을 하거든. 지난날 자랑으로 생각하던 것, 로마를 등에 업고 예루살렘의 지배를 확고하게 지키려던 그 자랑스럽던 전통을 똥으로 생각하고, 그 냄새 나는 걸 툭툭 털어버리고 새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최상의 영광과 자랑과 기쁨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완전한 가치 전도인 거지. 베드로보다도 앞장섰던 사람이 이제 정말 꼴찌의 꼴찌로 새 공동체에 뛰어드는 것이거든. 꼴찌로 뛰어들어서는 또 선두 주자가 되었고.

公의 신학의 문제인데, 이건 정말 근본적이면서도 오늘 우리의 문제(통일)를 푸는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띠는 열쇠도 되리라는 점에서, 그 전개에 큰 기대를 건다. 나는 구약에서 이 문제가 어떻게 문제가 되는지를 검토해 보기로 함세. 지금까지 추구해 오던 민중 신학은 누구를 위한 누구의 신학이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것이 무엇이냐는 데로 시선이 돌려졌다는 건 퍽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되는군. 이제는 민중 신학이 신학으로 성립될 수 있느냐는 비판이 성립되기 어렵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신학의 주제로서 公을 퍽 좋은 데 착안한 것이라고 생각해. 이것은 또 하나 내가 그동안 불교와의 만남에서 문제되었던 사랑한다는 의식 없이 사랑을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가 公의 신학에서 문제도 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느낌이군. 어느 하나, 내 몸까지도 내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인데, 나의 소유라는 것도, 나의 학식도, 재간도, 가족도, (물론 이웃은 더 말할 것도 없지) 다 내 것이 아닌데, 이것으로 모든 일이 풀릴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이원론의 극복의 문제, 말씀의 신학의 극복으로서 사건의 신학의 문제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내일로 미루기로 하지. 한 가지. 민주주의와 기독교 신앙의 관계인데, 나는 범신론에 빠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해. 사실 생각해 보면, 범신론은 곧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기독교의 독단인지도 모르지만.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자연-사람-하느님의 연관에 관해서는 그동안 내가 꽤 많이 썼으니까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하기로 하겠어. 『자연 – 세계』를 일단 『몬』 (일본말의 모노-物)과 몸으로서 나는 경험하고 있어. 몬이 몸이 되는 데는 생명이 첨가되어야 해. 어쩌면 잠자던 생명이 활성화된다고 해도 되겠지

몬에서 생명이 살아난다고 해도 되고. 창세기 2장에서는 하느님의 입김이 몬에 들어가자 생명이 주어졌다고 표현하지 않아? 창세기 2장은 분명히 몬-몸-하느님이 같은 입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 아니겠어? 하느님의 입김이 사람의 입김이요, 그 입김이 몸에서 생명을 이끌어 낸다는 거지. 생명이 가동된 몬, 곧 몸은 마음이거든. 마음의 자료가 몬이라는 주장은 인정해도 되는 거고,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몸이 마음이 되면서 몸은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지. 자기를 나무나 바위를 보듯 볼 수 있고, 그것들이 자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도 보게 되고, 그것들과 자기를 연결하는 것은 생명이요, 마음 자체라는 것도 보게 되는 거고. 자기는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유한한데, 사실은 자기는 무한의 일부라는 것, 무한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지. 자기가 무한 속에 있을 뿐 아니라, 자기 속에서 그 무한이 보이기도 하는 거고. 인간의 무한 의식은 인간의 자의식이라는 포이엘버라의 주장은 분명히 진리의 중요한 반면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아. 내일 계속하기로 하지. 형 씀

 

公의 신학이 우리의 통일문제를 푸는데 중요하다는 것, 자연-사람-하느님의 연관에 관한 문제 등에 대한 생각을 동생에게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