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기독교 신앙

아우에게

 

민주주의제도란 헬라에서 온 것이라는 게 정설인데, 시민권이 용인되지 않는 변두리 인생들에게 당당한 시민권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예수야말로 민주주의의 시조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

난 요새 Hans Küng의 책을 읽고 있는데, 내가 철학사나 교회사에 얼마나 무식하냐는 데 그냥 놀라. 철학적인 논리 같은 게 나의 생리에 맞지 않아서 그랬겠지만, 40여 년 전 신학교 예과 시절에 일본 교수에게서 철학사 공부를 한 이후로 지금까지 그쪽은 눈도 돌리지 않다가, Küng의 책을 읽으면서, 그쪽도 좀 눈을 돌렸어야 했구나 후회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뜸을 들여가면서, 천천히 읽고 있어. 얼마 전에 “마음의 신학”의 가능성을 물은 일이 있었는데, 그 책을 보니까, 어거스틴-파스칼-루터로 이어지는 신학의 흐름을 Theologia cardia라고 하는 걸 알고, 나도 과히 엉뚱한 생각을 한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았어. 어거스틴은 아리스토텔이 아니라 플라톤에 이어지는 것 아니겠어? 그러고 보면, 신학교 예과 시절에 내가 플라톤과 어거스틴을 꽤 좋아했었던 것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지. 아리스토텔-아퀴너스-데칼트-칸트로 이어지는 이성 중심의 논리는 나에게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던 거라고 하겠지. 헤겔의 철학을 Mind Monism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었고.

나의 신앙이 상당히 범신론적인 데 빠질 아슬아슬한 데까지 와 있지 않어? 떼이야르 신부의 세계와 매우 통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점에서는 스피노자가 대선배더군. Whitehead의 과정의 철학, 과정 신학과도 통하는 데가 있고. Whitehead가 “God is one and the World many”라고 해도 되고, “The World is one God many”라고 해도 된다든가, “The World is immanent in God”라고 해도 되고, “God is immanent in the World”라고 해도 된다거나,”God transcends the World”라고 해도 되고, “The World transcends God”라고 해도 된다고 한 걸 읽고는 난 정말 유쾌해졌다고.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점에 서는 스피노자나 헤겔은 평생을 이에 전력투구했었군. 그 점에서는 신학자들은 거의 별 노력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지질학을 전공하다가 우주적인 진화론을 전개한 떼이야르 신부가 하나 있고, 수학자로서 철학과 신학에 전향한 Whitehead가 있을 정도. 이 두 사람은 신학사에서는 지류도 못 되는 것이 아니겠어? 본회퍼에서 시작되는 세속화 신학에 이르러서 겨우 시도되는 것이니까. 인디비듐으로서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고집하는 한, 서구 신학은 主客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네 주장은 나도 알 것 같아. 그러니 사건을 신학의 자료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말씀의 신학을 극복할 수 있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감이야.

페르소나를 포기하고 범신론에 빠지지 않는 길은 사건을 강조하는 일이라고 하겠지. 그런 점에 있어서 나는 범신론에 상당히 더 접근한 것 같아. ”마음”을 신학의 자료로 삼아야 한다고 함으로, 마음을 사람과 하느님을 연결하는 길로 생각하는 한은 괜찮은데, 마음을 자연(Whitehead의 The World)과 사람과 하느님을 연결하는 것으로 보는 데는 그 위험이 커지는 거지. 거의 벗어날 길이 없는 것 같아. 스피노자가 그 좋은 예일 거야. 떼이야르나 Whitehead에서도 그건 심각한 문제이지.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 “마음”은 한편으로는 자연-사람-하느님을 연결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역사 사람-하느님을 연결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해. 이 후자 때문에 (한 줄 해독 불가)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 절대 신성불가침이라는 것이 목숨을 내걸고 지켜야 한다는 신앙이 되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이 한낱 교리(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에 생명을 내대는 무신론자 앞에서 할 말이 없어지는 거지.

그런데, 민주주의와 기독교 신앙의 차이는 이런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민주주의는 남의 인격, 존재, 자유, 권한을 존중해주는 것을 나의 그것들을 인정받고 보상받으려는데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아. 기독교인은 여기 머물러 있을 수 없지 않겠어?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데 민주주의 실천의 목적을 두어야 하는 것이어야 하는 거지. 나의 인격, 존재, 자유, 권한을 존중받는 데 목적을 두고, 그걸 위해서 남의 인격, 존재, 자유, 권한을 존중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권이 소중하니까, 그만큼 남의 인권을 소중하게 존중하고 지켜주어야 한다는 거지. 민주주의의 이념은 나에게 초점이 있는데 비해서, 기독교인의 민주 이념은 남에게 초점이 주어진다는 것이 아닐까?

지난달 영미가 와 주어서 정말 기뻤어. ‘새가정’에 Faye의 활동하는 모습이 소개되어 있어서 기뻤구.  오늘은 이만.       형 씀

 

Hans Küng의 책을 읽고 느낀 점, 자신이 범신론에 가까이 와 있다는 점과 민주주의와 기독교 신앙의 관계에 대해 동생과 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