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정의의 실현을 통해서 평화를 이룩하는 길

동환에게

 

불교와 기독교가 어느 점에서 서로 가깝고, 어느 점에서 다르냐는 것을 분명히 알고 대화를 한다는 것이 퍽 중요한 일이라는 점은 나의 첫 편지에서 지적되었을 거야. 서로 다른 것을 찾는 것은 멀어지자는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를 명확히 알고, 상대방의 문제점과 함께 장점도 분명히 파악해서, 서로 시정할 것은 시정하고, 보완할 것을 보완해서, 더 가까워지고, 더 깊숙이 통하며 인류에 같이 봉사하자는데 목적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면 괜한 소리가 되겠지.

불교가 행동적인 기독교보다 명상에 치우친다는 것은 아무도 이의를 말할 사람이 없을 거야. 아마 석가 이전의 부라만교의 오랜 전통에도 그 이유가 있겠지만, 석가가 왕궁 출신인 데 비해서 예수는 갈릴리 민중 출신이라는 데도 중요한 원인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워낙 팔레스타인이라는 곳이 아세아와 유럽과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다리로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가 쉬지 않고 휘몰아치는 곳이었으니까.

지난번에 기장에서 영성 문제를 가지고 토론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의 첫 느낌은 “한가하군” 하는 것이었는데, 아무리 바빠도 때로는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자기를 살피고, 처해 있는 현실을 검토하는 명상의 시간이란 필요한 거지. 어쩌면 바로 내가 지금 그런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나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바깥의 동지들이 “꽤나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네” 하면서 한심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 아니거든.

예수의 생에서도 우선 40일 광야가 있었고, 몸이 곤죽이 될 정도로 피곤해 있으면서도 제자들이 잠든 틈을 타서 산속으로 혼자 기도하러 들어가곤 하셨으니까. 그런데 그런 명상에 있어서 불교는 우리 기독교인들보다 월등하게 앞서 있는 것 아니겠어? 그야말로 어른과 아이의 차이라고 해야 하겠지. 기독교가 예수의 민중적인 것을 거의 이천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그것도 한국이라는 한구석에서 겨우 찾아가지고, 불교에 대해서 기독교의 민중적인 것을 내세우는 건 어쩐지 쑥스럽다고 생각지 않아? 내가 불교의 세계에 크게 끌린다고 해서 기독교의 민중적인 면을 버리는 건 결코 아니지.

기독교 신앙과 민주주의에 관해서, 네가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자기를 상대화시켜 겸허한 자세로 서로 남을, 남의 생각과 권한을 용납하고 존중하는 것이라면, 이것이 곧 자기 초월이라고 지적한 점은 아주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되는군. 신앙이 자기 초월이라고 할 때, 구체적이요, 민주적인 자기 초월을 신앙의 실천으로 삼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주 좋은 깨침이었어. 나는 그동안 기독교 복음을 평화의 복음이라고 믿고, 힘으로 다스리는 정치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말로 하는 민주정치, 다양성이 배타적이 아니라 서로 용인되는 민주사회의 원리는 그대로 평화의 길이라고 믿고,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한 봉사를 평화의 복음의 실천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었어. 이제 그것이 남의 인격과 생존과 자유와 생각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되는 자기 초월, 곧 사랑의 길로 보이게 되어서 다행이군. 좋았어. 사랑의 사회적인 실천이 정의라고 할 때, 민주주의는 곧 정의의 실현을 통해서 평화를 이룩하는 일이 되는 거고.

민주주의를 일단 제도라고 생각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인 사명은 이 제도가 사랑, 정의로 운영되어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 되도록 헌신하는 일이라고, 그것이 민주주의를 통해서 하늘나라의 면모를 조금이라도 실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군. 그때 우리의 온갖 관심과 노력의 초점은 “인원”에 있는 것이고. 그런데, 이건 반드시 기독교만의 것이라고 주장할 것은 못 되거든. 이것은 전 인류의 보편적인 염원이 아니겠어? 그렇다면 기독교가 이룩하려는 것도 기독교 특유의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보편적인 염원에 소금으로 녹아들어 자기를 완전히 희생시키는 일이 곧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일이 되지 않겠어? 그때 다른 종교인들도,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진정으로 그렇게 살아간다고 할 때, 우리는 그들과 기꺼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거지. 그런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싶겠지만, 그럴 필요가 반드시 있을까? 하느님의 눈에 우리는 다 당신의 아들딸인 거구. “公”의 신학에 관한 나의 반응은 월요일 쓰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형 씀

 

동생 동환에게 하는 불교와 기독교에 관한 생각, 기독교 신앙과 민주주의에 관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