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우월론의 콤프렉스

동환에게

 

명예교수로 취임한 걸 축하해야 할 건지 모르겠군. 난 요새 한국에서는 학문적으로 성숙하는 일이 외국에 비해서 아주 늦다는 생각이 들어. 서구의 학문을 극복하고 그 위로 머리를 쳐든다는 일이 그만큼 우리는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기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그만큼 젊음을 오래 유지한다는 뜻도 되지 않을까? 좋은 머리로 20대, 30대에 새 학설을 들고나오는 것보다, 인생이 성숙해가면서 학문도 성숙해 간다는 건 바람직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야. 외국에서라면 명예교수가 된다는 것은 퇴물이 된다는 뜻이 아니면, 젊어서 세운 학설을 발전시키고 보완하는 작업이나 하는 것이 거의 통례이겠지만, 여기서는 성숙한 인간으로 학문을 추구하는 새 출발점이라고 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안(병무) 박사는 언제 은퇴인지는 모르지만, 그 나이에 지금도 새롭게 문제를 보려는 기백이 보이니, 더군다나 그 건강에, 다만 감탄할 뿐이야. 그야말로 목숨을 내건 투쟁이라는 느낌마저 들지 않어?

나는 학문의 세계에서 손을 뗀 지 한창인데, 구약성서의 최첨단을 가는 학자들과 대화를 한다는 게 걸맞지도 않고, 질문이라는 게 엉뚱한 것이 안 되는지 모르겠군. 그래도 오늘 우리들의 문제와 너무 절실하게 관계있는 것이기 때문에 감히 용기를 내 본 건데, 제일 자신이 없는 것이 내재에 관한 질문이야. 안 박사가 하느님이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신학을 구상하고 있는 줄로 아는데, 그것도 어디까지나 철저 내재의 입장이 아닌가 몰라. 이원론을 극복하고 일원론의 입장에 선다고 할 때, 초월이 어떻게 문제될 것인지 모르겠군.

기장 총회가 이천년대를 내다보면서 신학적인 전망과 자세를 밝히고 정립하려고 했다는 데 대한 네 회답은 사실 나를 하나도 납득시키지 못했어. 앞으로 15년이 이천 년대에 이르는 과정으로 문제 되었으리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어. 알고 싶었던 것은, 그 시기가 과정으로라도 어느 정도 문제 되었었느냐는 건데, 내가 예상했던 대로 별 신통한 것이 없었던 것 같군. 역시 초점을 오늘에 맞추었어야 한다고 생각해. 얼마나 큰 문제들이 얼마나 산적해 있는데.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도 기독교의 길이 옳고 불교의 길은 안 되었다는 평가를 내리는 기독교 우월론의 콤플렉스가 나는 못마땅한 거야. 기독교가 ????를 ????에 앞세우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지? 불교가 그 점에 있어서 우리보다 한 걸음 늦은 것만은 사실이지. 불교는 기독교보다 그동안 저지른 사회적인 죄악이 적어서 기독교가 부딪치고 있는 반발과 같은 강한 사회적인 반발을 덜 받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불교가 명상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기독교는 세계 지배와 억압과 착취에 혈안이 되어 있었거든. 불교는 기독교만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 아니겠어? 평화에 대해서 적극적인 공헌은 못 했을지 몰라도, 기독교처럼 파괴적이지는 않았었다고 봐야 할 것 같아. 淸淨心을 산중에서 명상이나 하는 것으로 얻으려는 불교의 자세는 잘못된 거지. 그러나 나는 그것을 얻으려는 그들의 철저성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진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이야.

 淸淨心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얻으려는 뜨거운 마음을 나에게 일으켰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석가여래 님께 정말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 그리고 오늘과 같은 난세를 살아갈 때, 정말 필요한 것이 바로 淸淨心이라는 걸 나는 날이 갈수록 더욱 절실히 느껴.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그의 종말을 앞두고 자리다툼을 한 것 같은 추한 꼴은 보이지 말아야지.

기독교 신앙과 민주주의적인 이념의 문제는 좀 더 두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아. 명예교수 취임 강연을 못 들어서 유감 천만이군. 다음번 편지에는 그 이야기를 써 보내 주었으면 고맙겠어. 건투를 빌면서.     

               

형 씀

 

명예 교수로 취임한 동생에게 기독교 장로회 총회의 자세, 기독교와 불교의 문제 등에 관한 의견을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