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훼의 철저한 배타성의 사회적인 기원과 시회적인 기능에 대해서

동환에게

 

Gottwald 씨에게는 별 질문을 던지지 않고 다른 세 기고가에게만 질문을 던진 것은 아마도 그의 학설에 내가 거의 동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어도, 어쩐지 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오늘 아침 그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느낀 점을 적어 보기로 하지.

Segundo 신부가 이데올로기라고 한 것을 그는 신학이라고 부르고 있군. 신학사는 곧 이데올로기의 역사라는 말이 될 것 같군. 물론 신학적인 표현에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신학 외에도 예술, 문학도 있지만. 그런데 그도 신학적인 표현(representations)과 구별되는 신앙이 무엇이냐는 것을 밝히지 않았군.

Gottwald 씨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스라엘의 신 야훼의 철저한 배타성의 사회적인 기원과 사회적인 기능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어서 아쉽다는 점이야. 그동안은 자기들이 애굽에서 고생할 때, 자기들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고 구출해 주신 신 이외의 어떤 신을 섬기는 것도 배신망덕 (背信亡德)이 되기 때문에 야훼만을 섬길 것이 요청되었던 것이라고 난 생각했었지. 이스라엘인들은 그걸 배신망덕이라고 하지 않고 음란이라고 불렀지만.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깨친 것은, 새 공동체의 유지라는 사회적인 기능이 있었다는 점이야. 엘리야와 이세벨의 대결에서도 그렇고, 호세아와 바알 종교의 대결에서도 그것이 그리도 심각했던 것이 그 때문이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어. 야훼 대 바알의 문제가 남방 유다에서 보다 북방 이스라엘에서 더 심각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던 것이지. 남방 유다에서는 예루살렘에서 비야훼화된 야훼가 문제였는데, 그건 아모스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남방 출신으로서 복방의 죄악상만 규탄했다는 걸 보아서. 신약 시대의 Zealot 들의 눈에도 그게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예수는 Zealot들이 못 보는 그 점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셨던 거고.

내재의 문제에 있어서 Siebert뿐 아니라, 요사이 학자들의 관심은 주로 역사 내 내재 여부에 있기 때문에, 자연과 내재의 문제는 질문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으나, 이 기회에 그 문제를 지적해 두고 싶군. 이건 구속사와 창조신앙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고 해야 할 거야.

이 점에 있어서 구약성서는 철저한 초월로 일관한다고 보아야 하겠지. Animism 혹은 범신론, 다신론의 철저한 부정이 구약의 창조신앙이니까. 구약 신앙에서 자연은 인간의 삶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것”은 지배와 정복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 않어? 그런 성서의 자연관이 오늘 서유럽과 미국의 자연파괴문명을 낳은 것이 아니겠어? 자연과 훨씬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자연의 생명을 나의 생명처럼 사랑하고 아끼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구약의 유일신 신앙이나 창조신앙에 냉철한 비판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라는 것, 그동안의 나의 글에서 충분히 나타나 있을 거야. 나를 자연의 일부로 안다는 건, 나의 마음도 그 일부라는 말이 되거든. 그리고 이 마음이 곧 하느님 안에 있고, 마음 안에 하느님이 계시는 거고. 하느님을 자연의 일부인 나의 안에서 경험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해. 그런 점에서 우리는 샤르댕을 다시 공부해야 할 것 같아.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자연의 일부로서 하느님을 숨 쉬면서 산다고는 해도 이 자연의 세계에서는 내재만으로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도 들어. 우주가 아무리 무한대라고 해도 유한하다고 상정할 때, 하느님은 이를 초월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는 말이지. 그러니 우주가 유한하냐 무한하냐는 것은 우리의 사고로는 결판을 내릴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군.

Animism이나 다신론에는 우리가 결코 버릴 수 없는 면이 있다고 생각해. 나는 문물과 생명으로 마음으로 하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이젠 움직일 수 없는 생활 감정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될 때, 만물은 다 나로서는 함부로 처리해 버릴 수 없는 지성소가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유일신 신앙은 독재자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면, 다신론은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여기서 경계해야 할 것이 物神신앙이지. 하느님의 자리에 오른 物神은 인간의 존엄마저 유린하는 폭군이 되는 거지만, 고대인들의 다신론의 뿌리는 신과 사람 다 物의 혈친 관계에 대한 신앙이었을 것이라는 느낌이야. 서로 아끼고 보호하고 감싸며 같이 존재해야 하는.

다신교가 유일신 신앙으로 발전하면서 “것”은 그야말로 인간 폭력의 지배 아래 들어갔는데, 하느님이 내 안에, 내가 자연 안에, 거꾸로 자연이 내 안에, 내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이런 관계에서 다신교도 유일신 신앙으로 지양되는 길이 바른 길이 아니냐는 생각을 해 보는데. 너무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고 생각지 않어? 같은 유일신 신앙인데, 돌이나 나무, 새, 짐승에 폭군으로 군림하는 유일신 신앙이냐, 그 하나하나를 나 자신처럼 아끼고 사랑하면서 하나로 품에 안는 민주적인 유일신 신앙이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거지. 생명의 신비를 손으로 만지면서 그 느낌을 가지고 생각해 보는 것인데, 과연 잘못된 생각일까? 오늘은 이만.    형 씀

 

Gottwald 의 논문집을 읽고 야훼의 철저한 배타성의 사회적인 기원과 시회적인 기능에 대해서 저자에게 질문을 보내줄 것을 동생에게 부탁하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