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내재의 문제와 이데올로기와 신앙의 문제

문(동환)박사에게

 

오늘 금강경(金剛經) 해설 주석을 읽다가 사순창(四旬倡)의 한 귀만 깨쳐도 다 된다는 불다의 말을 읽고는 불교 경전을 섭렵하려는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어. 그건 그야말로 반불교적인 지식욕이라는 걸 깨달은 거야. 그러니 불교에 관한 책을 구하는 걸 중단하라고.

오늘은 다시 Gottwald박사에게 질의하고 싶은 걸 쓸 테니까, 자유로 번역해서 보내주면 좋겠어. 공주에 있을 때 보낸 나의 질의에 친절하게 회답해 주었는데, 고맙다고 해주고, 그동안 정신없이 바빠서 의견 교환을 계속 못 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말도 전해주고. 그의 ‘Trilesory(?) Yahweh’는 성서를 읽는 나의 안목을 아주 새롭게 해주어서, 그의 시야에서 그동안 몇 번 기장 회보에도 구약 해설을 썼었고,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카톨릭의 ‘생활 성서’에 3회까지 연재하고 중단해야 했다는 것도 알려주면 기뻐하겠지. 그의 연구가 가장 마음에 걸리고 있던 걸 풀어준 것은 히브리인들이 출애굽 한 지 40년에 어떻게 침략군이 되었느냐는 여기 신학생들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이 막혔었는데, 그 점이 아주 시원히 풀렸거든.

이번 그가 편집한 논문집을 읽고 (1) 신의 내재의 문제, (2) 이데올로기와 신앙의 문제, (3)야훼엘 대 바알의 문제를 물어보고 싶은 거야. 

첫째, 신의 내재의 문제는 Siebest 씨의 논문에 대한 질문이 되겠는데, 우선 전체적으로 동감이라는 걸 말하고, 기독교인은 절대 내재설 (Absolute Immanentism)에 항복 (Capitulate before) 해서는 안 된다는 Golwitzer의 주장이 과연 무엇을 말하느냐는 것이 나의 첫 질문이야. 내가 보기에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하느님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과 역사 속에서만 경험되는 신일 수밖에 없는데, 히브리인들의 신 야훼나, 예수의 하느님이나 인간의 운명과 완전히 하나가 된 신이었는데도, 이렇게 말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이냐는 것이 나의 질문이 되겠어. 히브리인들의 종살이는 곧 그들의 신인 야훼의 노예상태이고, 그들의 해방은 곧 야훼의 해방이었거든. 히브리인들의 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야훼 자신의 사회시가 되는 것이겠고. 이렇게 해서 야훼는 사회학적인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예수의 수난사가 그래도 하느님의 계시가 되는 까닭도 거기 있는 것일 테고. 우리가 하느님을 경험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 속에서 또 다른 사람들 속에서, 이를테면, 이 역사 속에서 ‘너는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하느님의 항의를 듣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어? 초월을 말할 때도, 나 아닌 남을 결코 유린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만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형상으로 사람이 창조되었다는 신앙인 거지.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인간성은, 그의 생존권은 절대 신성불가침이라는 걸 인정하는데 초월이 있다면 있는 것 아니겠어.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는 일은 사랑을 실천하는 길인 거고. 사랑을 예수의 상위 의미로 강조하는 점에서는 Standawsky 도 우리와 같은 것 같군. 이를테면, 초월도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의 설 자리는 절대 내재의 입장이어야 할 것이 아닐까? 이것이 나의 첫 질문이 되겠어.

둘째, 이데올로기와 신앙의 문제는 Segundo 신부에게 하는 질문이 되겠어. Segundo 신부는 신앙과 역사적인 현실 사이의 공백 (Vacuum)을 메우는 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라는 것이야. 신앙을 순간순간 변해가는 상황에 적용하려는 인간의 이성적인 노력이 곧 이데올로기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건 불가피하다는 것이야. 신앙이 불변인 데 비해서 이데올로기는 상대적인 가변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 그런데 그가 말한 불변의 신앙이 무엇이냐는 것이 밝혀져 있지 않군. 그런데 이건 그대로 당연한 것으로 전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어디까지가 신앙이고, 어디부터가 이데올로기냐는 것은 매우 델리케이트한 문제이니까.

오늘 신앙과 역사적인 현실을 연결하는 매체 (Catalyst)로서 어떤 이데올로기가 요청되느냐는 걸 찾기 위해서, 오늘의 현실과 같은 현실을 성서에서 찾아서 그곳에서 표명된 이데올로기를 오늘에 옮겨 적용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는 그의 견해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해. 그러나, 그가 지적한, 어떤 상황도 서로 똑같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 외에, 또 하나 다른 이유가 있다고 나는 생각해. 그것은 성서에서뿐 아니라,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서 신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매체로서 성공한 이데올로기가 거의 없다는 것이야. 출애굽의 이데올로기인 평등주의 (내가 보기에 그것은 십계명에 나타난 인권존중이었던 같아. 평등주의는 인권존중의 한 면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군.)는 왕국 건설과 함께 실패하는 것 아니겠어?

그렇다고 신구약의 이데올로기사를 연구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인가? 그게 아니지. 절대 필요하지.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들이 어디서 왜 실패했느냐는 걸 아는 것은 오늘 우리의 문제를 푸는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띠는 것이니까.

이데올로기는 창출(Invent)되어야 한다는 Segundo 신부의 주장에 나도 전적인 동감이야. 우리가 바로 그것이 절실히 요청되는 자리에 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나 내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실제적이요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해. 후자가 전자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군. 이데올로기는 간단할수록,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명료할수록 좋다고 생각해. 헌법을 이데올로기라고 볼 때, 그건 정말 인권보장을 받아야 할 서민 대중이 누구나 쉽게 짧은 시간에 읽고 이해하고 동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 되겠지. 그리고 실제적인 상황의 요청으로 언제나 백지화할 수 있고, 수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군. 이 점에 있어서 지혜문학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를 던져 준다고 하겠어. 지혜문학은 원리원칙이 아니라 ‘길’을 강조하거든. 원리원칙은 ‘하느님 두려움’이라는 한 마디에 멎는 것이거든. 그 원칙으로 가는 길은 천 갈래, 만 갈래일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이 길이 막히면, 저기 새 길을 트면 되는 것이니까. ‘하느님 두려움’이라는 이데올로기야 그렇게 말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길이 무엇이냐는 걸 찾는 일이, 그리고 그걸 같이 뚫고 나가는 일이 중요한 것 아니겠어?

‘야훼엘 대 바알’의 문제는 내일 쓰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형 씀

 

Gottwald 의 논문집을 읽고 신의 내재의 문제와 이데올로기와 신앙의 문제에 대해 저자에게 질문을 보내줄 것을 동생에게 부탁하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