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남은 15년의 과제

동환에게

 

21세기를 바라보는 선교의 과제가 선교대회의 주제였다고?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15년 후의 21세기가 아니라, 20세기의 마지막 15년이 아닐까? 15년 후를 내다보고 자세를 갖춘다는 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이때 미래학이나 미래를 쓰고 있다는 건 거의 확실하게 현실 도피적인 사고의 표현이요, 결과적으로 현실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라고 하지 않을까?

내가 65년에 뉴욕에 갔을 때, 미국의 신학계는 과학에 대한 신앙이 요원의 불처럼 발하고 있었지. 과학이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것처럼 떠들어 대면서 앞으로 남아도는 유휴시간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에 대처하는 일이 밤새는 줄도 모르고 토론되곤 했지. 66년에 귀국해 보니까 한국에서도 과학신앙의 시대에 기독교 신학이 어떻게 적응해야 하느냐는 것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더군. 그러던 것이 2-3년도 안 가서 과학의 횡포 아래서 겪고 있는 인류의 고통이 전 세계의 관심거리가 되는 것을 우리는 보아야 했던 것이 아닌가?

구약의 예언자들이 미래를 예언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늘의 문제를 조명하고 풀어보려는 노력의 일환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기독교 장로회는 무언가 선도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무언가 해마다 그럴듯한 새 문제를 제시해야 한다는 초조감 같은 것으로 프로그람이 짜여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 15년이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나 인류 역사에 있어서나 얼마나 중요한, 아니 얼마나 무서운 기간인데, 그걸 뛰어넘어서 21세기를 논하다니. 물론 향후 15년의 논의를 거쳐서 21세기를 논했겠지만, 문제는 초점이야. 초점이 향후 15년에 맞추어져야 그 절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민족적인, 전 인류적인 노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것 아니겠어?

또 하나 기독교 신학자들의 안이한 자세에 대한 나의 코멘트. 불교나 요가가 몸과 마음의 문제를 보는 시각은 이러이러하다고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그건 우리의 길과 다르다고 규정해 버리는 자세 말이야. 이건 정말 곤란한 거라고 생각해. 불교나 요가는 어디까지나 고요한 명상 속에서 문제를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 아니겠어?

나는 종교 간의 대화라는 학자님들의 접근법의 허황함을 지난번 『신학 사상』의 대화에서 또 한 번 느꼈어. 중요한 것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같이 일하는 거야. 그리고, 서로 힘이 되는 거야. 그러다 보면, 우리는 타종교에서 지금까지 기독교에는 결핍되어 있던 것, 함축되어 있으면서도 언어가 되지 않았고, 사건이 되지 않던 것들을 찾아서 더 완전한 모습을 갖출 수 있고 충분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 아니겠어? 쥐 잡는 게 고양이라는 말을 우리는 재음미해야 할 것 같아. 타종교에 대해서 이렇게 겸허한 자세로 자체를 반성하고, 배우고, 보완해 가노라면, 다른 종교들도 우리에게서 무언가 부족한 점을 발견하고 자체를 보완, 발전, 비약시키게 되는 것이 아닐까?

공통점을 발견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 다른 점을 발견하는 일이 더 중요한 거지. 그런데, 다르기 때문에 밀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자체를 비추어보고 견주어보면서, 하느님의 완전을 회복하는 일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말씀’, ‘말씀’ 하면서 말씀만이 전부인 양 생각하는 기독교 신학이 체증을 일으키고 있다가, 불교를 건너다보니, 거기에 우리가 잃어버린 마음, 회복해야 할 마음이 있다는 것을 나는 발견했던 거지. 그리고 마음의 맑음을 위해서 마음까지 비우려고 혼신의 힘을 다 기울이는 불교의 자세를 보면서, 입만 나불거리고 논리 전개에만 열중해서 만날 티격태격 싸우는 기독교의 천박한 모습이 역겨워진 거야. 말의 자그마한 차이 때문에 서로 정죄하고 비난하는 기독교의 독선과 위선이 견딜 수 없이 된 거야.

불교나 요가에서 참마음, 빈 마음이려고 노력하는 자세, 그리고 요가에서 몸과 마음의 일치를 배우는 데 멎지 않고, 그걸 몸과 마음으로 터득하는 것으로 나는 기독교 신앙의 맹점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을 얻은 것이야. 이것만으로 나는 불교나 요가에 한없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 그리고 불교나 요가를 명상이나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이고. 미륵불교를 명상이나 하는 불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어? 요가에도 Bhakti Yoga는 그냥 앉아 있는 게 아니야. 몰아의 경지에서 무언가 값나가는 일을 위해서 전적인 헌신을 하는 요가거든. 칼마 요가는 일의 결과에 전연 마음을 쓰지 않고 일에 몰두하는 유파이고.

앞으로 15년 동안 우리가 헤치고 나가야 할 가시덤불, 풀어나가야 할 문제들이 논의 안 된 것은 아니겠지? 다음번 편지에는 그걸 좀 써 보내 줘. 나는 21세기까지 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동안에 풀어야 할 문제들에서 한 치만큼도 돌볼 머리의 여유가 없다는 느낌이 들고.

회답을 기다리면서. 형 씀

 

선교 대회의 주제가 '21세기를 바라보는 선교의 과제'라는 것에 대해 남은 20세기의 15년을 바라보는 자세가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내용. 기독교가 타종교와의 대화에서 보다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