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진실과 솔로몬의 거짓

영환에게

 

가끔 전화로 목소리를 들을 뿐, 아버지 장례식에도 못 나와 만날 기회를 놓치고 보니, 벌써 몇 해냐? 오늘 새벽에 기도하고 명상을 하는 중에, 이제 그쪽을 정리하고 아주 나와서 무언가 신나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늦기 전에 말이다.

난 요새 호근이와 성근의 활약을 보면서, 너까지 나와서 트리오가 되면 얼마나 신나게 일들을 해나갈 것이냐는 생각이 들어 오늘 나는 꽤 흥분해 있다.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만큼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이 없다는 느낌이다. 지금은 시문학의 시대인데, 호근, 성근, 그 밖에도 적지 않은 유능한 패거리들이 있어 연극의 르네쌍스를 이룰 것 같은 느낌이다. 아버님이 가시기 전, 네가 나와서 산업선교 쪽에 투신해 주기를 얼마나 바라셨는지 모른다. 지금 네가 산업선교 쪽에 투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연극을 통해서 같은 뜻을 얼마간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오늘 접견 때 좀 더 자세한 안을 이야기해 주겠다. 생각해 보아라.

어제 선희에게 편지를 쓰면서 마음의 뒷문으로 거짓이 어떻게 숨어드냐는 것을 나 나름으로 파헤쳐 보았는데, 오늘 새벽에 성경을 읽다가 꽤 중요한 새 사실을 발견했지 뭐냐?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이런 기도를 올리지. “야훼께서는 몸소 깜깜한데 계시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여기서 (이 깜깜한 지성소에서) 길이 사십시오..’ (열왕기상 8:12) 야훼께서 언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스라엘 전통 속에는 이 말씀이 있었던 거지. 솔로몬은 그 말씀을 따라 지성소를 깜깜하게 만들고 거기 야훼를 유폐시키고는 세상의 영광과 부를 혼자 누리려고 했던 것이거든. 그런데, 하느님은 어떤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것이 늘 수수께끼였는데, 오늘 새벽에 그것이 밝혀진 거야. 하느님은 고생하는 천덕꾸러기들의 깜깜한 가슴 속에, 그들의 절망적인 삶 속에 계시겠다고 하셨던 거라고 봐야 해.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걸 텐데, 그 말로 야훼를 지성소에 유폐하려고 했던 거야.

창세기 1장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가서 암담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씌어진 거다. 달빛도 별빛도 다 꺼져 버린 바다, 그 완전한 어두움 속에서 끝도 없이 설레고 뒤척이는 바다를 생각해 보아라. 그것이 바로 바벨론에 포로로 붙잡혀 가서 종살이하는 사람들의 심정이었던 거야. 하느님의 영은 바람으로 그 암흑 위를, 한 오리 빛살도 없는 어두움 속에서 끝도 없이 뒤척이고 있는 바다 같은 포로들의 가슴 위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야훼 하느님은 어두움을 뒤로하고 도망치는 분이 아니라, 그 속에 계시겠다는 건데, 솔로몬은 그 말을 빙자해서 하느님을 어두움 속에 유폐하려고 했던 거거든. 그러니 생명을 내대고 한 말, 준엄한 진실이 불꽃 튀는 남의 말을 그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다른 상황에다가 가져다 쓸 때, 그 진실이 거짓이 된다는 거라는 걸 이렇게 잘 보여주는 예가 또 있을까? 하느님의 진실이 솔로몬의 거짓이 된 거야.  나의 몸의 진실에 충실하기 때문에 남의 몸의 진실에도 충실한 사람, 이 이중의 진실에 목숨을 내걸고, 자기의 전 인격과 존재를 던져서 하는 말만이 진실인 거야. 그 말이 아무리 훌륭하고 멋지고 고상하다고 해도, 이 이중의 진실 앞에 자기의 전부를 던져서 하지 않을 때, 남의 말을 내 말인 양 도용해서 할 때, 그건 빈말이야. 빈말은 곧 거짓말인 거지. 히브리어에서는 거짓말을 빈말이라고 하거든.

이런 빈말, 거짓말은 역사를 끌고 가지를 못해. 오히려 저주와 파괴를 끌어들일 뿐이지. 그 대신 저 이중의 진실로 무장한 사람은 아무도 꺾지 못하거든. 우리는 예수에게서,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걸 보는 것 아니겠니?

연극에서 배우들은 자기 말이 아닌 남의 말만 하고 있는데, 밥벌이든가 명예욕의 충족되어 버리고 마는 거지. 자기 진실을 지켜 온갖 거짓과 싸우는 것이 바로 인생이지. 비단 배우뿐 아니지. ‘한씨연대기’의 성근이를 위시한 배우들에게서 나는 그런 진실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 하고 있는 가벼운 터치로 전개되는 일종 코메디도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면, 배우들뿐 아니라 전 스태프가 그런 심정으로 하고 있는 거라고 봐야지.

그러나 타성, 매너리즘은 늘 경계해야 하지. 난 네가 돌아와서 조카들과 팀을 이루어 무대예술을 진실로 충일하는 것으로 만들어, 민족사에 기여해 준다면, 그동안의 모든 마이너스가 보충되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나도 50 중턱에서 시인으로 새 출발하지 않았니?

 ‘늦봄 아지랑이에 노고지리 목총 풀리듯’ 시인으로서 나의 목소리가 늦게 풀린 걸 이렇게 노래하고 보니까, 그게 좋아서 나는 나의 예명을 늦봄이라고 부르고 싶어진 것이다. 그래서 너도 늦봄 형님의 동생으로 다시 출발해 볼 생각을 해 보아라. 많이 생각해 보아라.                       

형 씀

 

캐나다에 이민가 있는 동생 영환에게 고국에 돌아와 의미있는 할 것을 권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