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마음을 어디서 찾느냐?

동환에게

 

네가 벌써 명예교수로 은퇴하게 되었으니, 인생이란 정말 잠간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제 매이지 않고 좀 자유로운 몸으로 현장에서 몸을 비벼대면서 신학을 할 수 있을테지. 또 그래야 하는거구. 오늘 접견장에서 네가 한 말, “하느님의 마음을 어디서 찾느냐?”는 것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띠는 거겠지 물론. 요새 바울 서간들을 읽는데, 바울의 출발점은 두가지 점에서 핵심을 벗어난 것 같아. 그의 회심은 어쩌면 신학적인 회심이 아니었을까? 민중의 아픔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경험에서 그의 회심이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인 것 같아. 따라서 그의 대화의 상대로 밑바닥 민중이 아니었던 거고. 둘째, 몸의 중요성을 몰랐다는 것. 몸의 부활을 말하면서도 몸의 값을 그는 몰랐어. 선교냐 전도냐 할 때, 그는 어디까지나 전도자가 아니었을까? 민중의 신학은 몸의 신학으로 출발해야 한다고 나는 믿어. 주기도의 중심에 서 있는 일용할 양식이 민중신학의 출발점이어야 한다는 거지. 병고치는 예수의 기적이 민중신학의 중요한 내용이어야 하고.

그런데, 기독교 신학은 (공관 복음서 저자들을 포함해서) 몸과 마음의 관계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는 게 요가를 하면서 내가 깨친 거야. 내가 불교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도 그 까닭이고. 요가와 불교의 관계는 밀접하면서도 일단 분리시켜 생각해야 하는데, 요가는 불교보다 몸, 몸놀림, 몸 움직임을 통해서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는 거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어. 그런데, 그들이 일치하는 점은 거짓은 마음으로 들어온다는 거야. 그래서 석가가 말하는 空은 마음까지 없는 상태이거든. 왜냐하면, 마음이란 거짓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니까 라는 거지. 석가는 마음의 수련을 통해서, 요가는 몸의 수련을 통해서 마음을 씻어내자는 거야. 그런데, 그동안 내가 깨친 것은 마음을 몸에 복종시킴으로 마음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거라고. 마음이 몸을 소중히 한다는 것 자체가 진실이거든. 내 몸이 소중한만큼 남의 몸도 소중하다는 걸 알아주는 것이 곧 사랑의 진실이고. 안 먹으면 배고프고, 너무 먹으면 속탈이 나고, 욕심을 부리지 않고 먹을만큼 먹어야 (일용할 양식의 의미지) 몸이 건강하다는 것, 이것이 몸의 진실 아니겠어? 때리면 아프고, 쓰다듬어 주면 좋고, 이것도 몸의 진실이고. 일하고 먹으면 밥맛이 있고, 놀고 먹으면 밥맛이 없는 것, 이것도 몸의 진실이고. 혼자서 먹으면 밥맛이 없고, 여럿이 같이 먹으면 밥맛이 있는것, 이것도 몸의 진실이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몸을 섞으며 사랑하면 기쁘고, 그것이 거부되면 불행한 것, 이것도 몸의 진실이지. 이 몸의 진실을 정직하게, 전적으로 받아드리는 데서 마음은 진실을 얻는다는 것, 이것이 석가가 말하는 色卽是空이 아닐까 싶어. 나의 몸의 진실이 소중한만큼 남의 몸의 진실도 소중한 것을 알아주는 데서 마음의 진실은 사랑의 진실이 된다는 것, 이것을 空卽是色이라고 해도 되는 걸지? 

이렇게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몸의 진실과 마음의 진실이 하나가 되는 걸 기독교는 全人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지? 全人의 구원이라는 것도 서구적인 개인주의적인 신학의 태두리를 못 벗어나는 것이겠군. 全人的인 공동체의 구원, 혹은 공동체적인 전인의 구원이라고 하는 말이 맞겠군.

이런 구원이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민중이요, 그런 구원은 바로 민중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 민중신학을 하는 사람들의 확신 아니겠어?

아프리카 신학 두권, Mission to Latin America 가 들어와서 나의 구미를 돋구는군. 열심으로 읽어야지. Gottwal의 선구적인 연구를 한 학자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데)가 쓴 “Tenth Generation” 을 네가 사다 주었는데, 그동안 바빠서 못 읽었는데, 그 책이 어디 들어가 박혔는지 알 수 없단 말이야. 읽고 싶은데, 집에서 찾을 수 없으면 한신 도서관에는 있을 테니까 넣어주면 좋겠어. 

다시 만날 때까지. 형 씀

 

은퇴한 동생에게 기독교 신학이 몸과 마음의 관계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는 생각을 전하며 읽고 싶은 책을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