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원(悲願)일 수밖에 없는 참 기도

늦봄이 봄길에게

 

(5월 2일) 화창한 5월 첫 주일이군요. 지금은 11시 5분. 당신의 사회로 한빛교회 예배가 시작되었겠군요. 이 시간 마음으로나마 한빛교회에 가 있고 싶어서 이렇게 붓을 드는 거죠. ‘하느님, 이 몸에서, 당신의 교회에서, 이 나라에서, 문제 많은 이 세계에서 오늘도 영광 받으소서’ 이것이 주일 날마다 드리는 나의 기도의 제목이죠. 어떻게? 하느님의 뜨거운 마음이 공기처럼 온 세상에 넘실거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의 살 속, 뼛속으로까지 스며들어 이루어져야.

어떻게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뜨거운 마음이 이루어지는 일일까요? 일용할 양식 아쉬운 사람이 없이 되는 일, 모두 일용할 양식만으로 만족하게 되는 일이 아니겠소? 그게 그대로 안 되는 데서 얽히고 꼬이는 일이 일어나거든요. 그것을 풀지 않고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도 오지 않고 결국 하느님께 영광이 돌아가지 않는 거 아니겠소? 그래서 모든 것을 푸는 일,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이 일어나야 하고. 이 모든 일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시련에 지지 않고 이기게 해주십시오, 가로막는 악에서 건져 주십시오’ 하고 비는 거죠. 우리의 몸이, 삶이, 역사가 이 기도가 되어야지요.

이 기도가 우리의 몸일 때, 우리 숨결이요 꿈일 때, 이 기도는 어쩔 수 없이 슬픔이군요. 참 기도는 비원(悲願)일 수밖에 없는 것 같군요. 지금 만족한 사람에게는 기도가 없는 거죠. 우리가 이 겨레의 아픔과 슬픔, 절망 속에 들어가서 겪는 아픔, 슬픔, 절망이 곧 기도인 거죠. 이것이 곧 하느님의 슬픈 기도인 거구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오고 간 첫 말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속에는 하느님의 슬픔이, 아니 사람을 찾으시는 하느님의 기도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겠소? “카인아,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이것도. “모세야, 애굽에 가서 고생하는 내 백성을 건져다오.” 이것은 명령이라기보다는 호소인 거죠. 히브리어는 우리말과 달라서 기도도 명령형이거든요. 성서에 있는 소명의 기사들은 모두 하느님의 기도라고 해도 되는 거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것도 물론 호소인 거죠.

79년 4월 5일 서울구치소에서 캐나다에 계시는 어머님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본 환상 이야기는 당신도 잘 알 거요. 나의 기도가 구름이 되어 캐나다를 향해서 태평양 위 하늘을 둥둥 떠가는데, 저쪽에서 어머님의 기도가 구름으로 떠오다가 내 기도의 구름을 몰고 와서, 환한 대낮인데 내 위에 소나기로 쏟아지던 환상을 어찌 잊겠소?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도 그런 거 아닐까요? 하느님의 기도에 밀려와서 소나기처럼 하느님의 기도로 우리 위에 쏟아지는 기도, 그것이 이 겨레의 슬픈 기도이기도 하구요.

이 겨레의 비원이 하느님의 기도가 되어 분출하는 것을 요즈음 나는 백(기완) 형의 시들을 읽으면서 느끼고 있어요. 나의 「흰 뫼의 신화」보다는 그의 「백두산 천지」가, 또 나의 「죽음을 살자」보다도 그의 「최후」가 정말 슬프고 뜨거운 기도이군요. “조국이여 / 사랑하는 조국이여 / 우리들만 요렇게 서로 물어뜯다가 / 쫄딱 망하란 법이 대체 / 어디 있단 말인가?” 백형에게 민족통일은 종교요 신앙이군요. 그 아픔, 목메는 슬픔, 그 간절한 기도에 함몰할 때(6천만 겨레가) 통일이 오는 거죠. 정치적 통일만이 아닌 진정한 민족통일이. 

난 지난 달 편지에 기쁨이 나의 기도에서 울리기 시작했다는 말을 썼었는데, 그건 정말 잠깐이었소. 3, 4, 5월, 화창한 이 봄, 성하로 접어드는 6월까지 이 겨레가, 우리 민족사가 슬픔에 잠겨 있는데, 내가 혼자 기뻐하다니, 벌 받을 소리죠. 아무리 뚫어지게 내다보아도 내일은 오직 어두움뿐인 전과자들의 어두운 표정들에 묻혀 있으면서 기쁨을 느끼다니, 정말 부끄러운 소리죠. 민족의 구원을 외면한 개인의 구원 같은 건 벼락 맞을 소리 아니겠소? 기쁨 같은 건 잠깐 피었다가 지는 개나리꽃이구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마는군요. 

통일된 새 나라의 나라꽃은 개나리로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평소의 생각이었소. 그런데 당신의 433신에 따라 들어온 양수리 언덕에 활짝 핀 진달래를 벽에 붙여 놓고 들여다보다가 우리의 나라꽃은 진달래여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 가닥으로 찢어지며 불어 제치는 황금빛 나팔 소리, 개나리는 너무 맑고 곱기만 해서 안 될 것 같군요. 할아버지, 할머니, 아들, 딸, 며느리, 손자, 바둑이까지 얼싸안고 비비대며 두 동강 난 나라 걱정 같은 거 아랑곳없이, 비록 가난할망정 엎어지며 뒹굴며 눈물겹게 오순도순 살아가는, 집집을 울타리 쳐주는 개나리. 인가로만 인가로만 모여드는 개나리의 마음 떨쳐 버릴 수야 없지만, 나라 잃은 서러움에 가정의 행복 같은 거 탁탁 털어 버리고 산으로 산으로 들어가 싸우다가 죽어 간 의병들의 넋에 지펴 산으로 산으로만 들어가서 제 가슴을 찢어 피는 진달래의 슬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온 강산을 그 슬픔으로 통일하는 진달래가 우리의 꽃이군요. 이 겨레의 아픔과 슬픔에서 그 아픔과 슬픔만으로 피는 우리의 꽃, 진달래. 그러나 이 한 많은 슬픔이 가고 부산을 떠난 기차가 서울을 거쳐 신의주까지 치닫는 그 날이 오면, 나라꽃의 영광을 개나리에게 양보하고 산골로 물러설 줄 알겠기에 진달래는 정말 우리의 꽃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5월 3일) 어제 쓴 편지가 너무 슬퍼진 것 같군요. 내가 남달리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아마 내가 남달리 행복하기 때문인 것 같군요. 내가 개인으로, 가정으로 받은 축복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행복으로 느끼면 느낄수록, 남의 불행이 더 크게 가슴에 다가오는 걸까요? 저번에도 썼지만 나는 나의 행복이 부끄럽고 죄스럽게까지 느껴지는데, 이건 어떻게 벗어 버려지지 않는군요. 요가로 몸이 더없이 건강하다는 것까지 미안하게 느껴지거든요. 내가 남달리 많은 복을 받았다면 그만큼 내가 지고 가야 할 짐이 무거운 거 아니겠소? 그러니 남달리 무거운 짐을 지고 갈 몸이니 남달리 건강해야지 하면서 오늘 아침에도 한 시간 요가를 했지요.

날마다 당신의 알뜰살뜰하고 그윽한 마음이 번져 있는 편지를, 그것도 좋은 그림과 시까지 곁들여서 받는다는 일, 여기 모든 직원에게 일종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는 셈이지요. 거의 시기를 받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오. 5.2평 되는 나의 방 사방 벽에 붙어 있는 당신의 편지에서 번져 나오는 당신의 사랑에 감싸여 살면서 행복을 느끼지 않는대서야. 지금 방에 들어가 세어 보았더니 당신의 편지만 24장, 바우의 그림 편지, 거기 갈겨쓴 호근의 글, 영미 그림 2장, 캐나다의 아름다운 풀과 꽃 그림이 있는 카드에 적혀 있는 선희 편지 등 나의 방은 화려하기만 하다오.

또 「선구자」, 「봄의 교향악」의 악보도 붙어 있구요. 「북간도 교포 선교회」기사가 있는 편지는 내가 앉아 있는 자리 바로 뒤에 붙어 있어요. 너무 감격스러워서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억센 해바라기 그림이 있는 편지죠. 옥스퍼드대학 교수가 만주 쪽에서 찍은 백두산 사진이 있는 편지도 정말 좋군요. 정말 당신의 붓글씨 작품도 석 장이 붙어 있어요. 이 겨운 행복이 나를 슬프게 하는 거예요. 이 애타는 행복은 민족의 비극이라는 홍수에 쓸려 가는 한 줌 흙 같군요.

이런 심정에서, 나는 하느님의 슬픔을 조금 헤아려 보는 거요.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당신의 나라 축복에 들어가 기쁨을 누리기까지, 그러니 세상 끝날까지 하느님은 슬픔일밖에 없다는 거죠. 이를테면 하느님이 구원을 받으시는 날은 인류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구원을 받는 날인 거죠. 그러니 인류의 기도가 곧 하느님의 기도가 되는 거 아니겠소? 어찌 개인의 아픔뿐이겠소?

 

(5월 5일) 5년에 걸친 징역살이에 두 번째로 어제 감기에 걸렸군요. 뜨거운 목욕을 하고 방에 엎드려 책을 보다가 그만 잠이 들어 버렸는데, 그때 감기에 걸렸나 봐요. 맥박이 73에 열은 아마 38도 정도 아니었을까요? 저녁을 먹고 났더니, 몸이 안 좋아서 자리를 깔고 누웠지요. 아스피린 두 알을 먹고. 그런데 하루 저녁으로 끝난 감기라는 작은 마이너스가 안겨준 플러스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겠소? 4년에 걸쳐 갈고 다듬어 오던 한글 풀어쓰기의 체계가 완성되었군요. 누워서 할 일은 없고 해서 손가락으로 쓰고 또 쓰고 하오.

 

동환에게

 

진갑을 맞는 동생이라고 갑자기 말을 높이는 것도 쑥스러워서 그냥 동환이라고 부르기로 하지. 나이 먹어 가는 것은 축하할 일이 안 되지만, 요는 지난 한 해라는 세월 속에 얼마나 보람을 담았느냐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또 앞으로 오는 한 해 동안 얼마나 하느님의 마음을 담아 사느냐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생일은 축하해야 하고 축하를 받아 마땅한 것. 이만큼 사설을 늘어놓고 62년 전 이날이 있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축하를 하네. 진정으로 오는 일 년 안에는 귀국할 수 있기를 빌지. 꼬여 가는 세계정세, 국내정세가 풀리기를 비는 것이 가장 큰 생일 축하일지도 모르겠군. 꼬인 게 풀려야 귀국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도 나갈 수 있을 테고.

정말 고트발트(Gottwald)의 『Tribes of Yahweh』를 잘 읽었어. 기가 막힌 책이더군. 제일 속시원했던 것이 판관기나 여호수아서의 전쟁 기록이 침략 전쟁 기록으로 보였었는데, 그게 아니고 해방 전쟁이었다는 것이니 얼마나 혁명적인 새 학설인가? 그런데 야훼 신앙이 평등 사회를 향한 사회적인 몸부림의 아들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사회과학적인 가설을 새김질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더군. 마침 서남동 목사가 같은 책을 다시 보내 주어서 다시 읽으면서, 그 가설에 일단 수긍이 가기는 했는데. 그러고 나서 생기는 의문을 적으면 이런 것이 될 텐데 고트발트 씨에게 전해서 대답을 듣게 해주었으면 좋겠어.

첫째, 그 몸부림이 이데올로기와 제의(cult)를 갖춘 종교는 아니지만, 그것이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religion in action(행동하는 종교)’이고 거기에 비해서 야훼 신앙은 ‘religion in reflection(반성하는 종교)’이고.

둘째, 종교사적인 질문이 되겠는데, 야훼는 주전 13세기 해방 전쟁 이전부터 히브리인들의 신이었어(출 5:3, 9:1 등).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천대받는다는 것은 곧 그들의 신 야훼도 애굽 신 레의 지배 아래서 굴욕적인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었지. 적어도 히브리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의 해방은 곧 그들의 신 야훼의 해방이기도 한 거지. 그렇게 볼 때 그들의 해방 전쟁과 ‘Yahwism’을 선후의 관계로 보는 데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셋째, 이것도 종교사적인 질문인데, 성서의 Yahwism은 모세와 같이 출애굽 한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에서 E1을 섬기는 농민들(그들이 바알을 버리고 바알에게 밀려난 E1신을 중심으로 모였다는 것은 종교사적으로 퍽 중요한 것 같다)과 다른 히브리 그룹들(그들의 신은 반드시 야훼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이 같이 애굽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해방 전쟁을 벌이는 데서 탄생한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Yahwism을 두 단계의 발전을 거친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볼 때 제1단계의 Yahwism의 특징은 ‘해방’이요, 제2단계의 Yahwism의 특징은 ‘평등 사회’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제2 단계의 특징은 평등 말고 다른 또 무엇이 있었을까? 여기서 십계명의 자리와 의미가 퍽 중요한 것 같군. 아무튼 그의 가설은 구약 성서의 많은 문제를 시원하게 풀어줄 것 같아. 앞으로 기회가 허락되면 그의 옆에 가서 얼마간 있으면서 문제들을 풀어 봤으면 싶어. 그에게 좋은 연구의 길을 열어 준 데 사의를 표하고 나의 질문들을 영어로 옮겨서 전해주었으면 좋겠어. 그의 연구가 지금 학계에서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 퍽 궁금하군. 찬반으로 갈려서 격론이 벌어지고 있을 테지만. 새로운 가설을 처음 제창한 멘뎀홀의 Tenth Generation도 읽어보고 싶군. 집필하고 있는 책이 언제쯤이면 햇빛를 볼 건가? 기대하고 있다구. Faye에게도 건투를 빈다고 전해주고. 창근, 태근의 공부도, 인생도 짭짤한가? 

 

영미: 

 

예술적인 흥취가 솟아야 그림이 나온다는 건, 나도 시 쓰는 사람이니까 모르지 않는다. 네가 초등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 우리 집에 왔기에 내가 그림을 그려달라고 한 일 기억나니? 너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나하고 산으로 나가자고 했지. 산에 나가서 아마 두 시간은 있었을 거다. 그러다가 ‘이제 들어가’해서 들어갔더니. 네가 그림을 그리는 거 아니겠니? 예술적인 흥취가 솟지 안아 못 그리다가 산에 나가서 두어 시간 지나는 중에 그게 솟아오른 거지. 그때 나는 너를 타고 난 미술가라고 생각했었다. 기대한다. 모두 모두 보람 있는 한 해를…

 

어머님, 

 

어제는 어머님의 싱싱한 모습을 뵐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어머님도 저의 건강한 모습과 하루하루 보람 있는 나날을 보내는 걸 보시고 기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지금 건강에 대한 욕심을 버리느라고 애쓰고 있습니다. 다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 하는 비명만은 울리지 않으면서 살고 싶은 겁니다. 몸 때문에 마음이 하고 싶은 일을 못 하는 일만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나 거뜬히 해 넘길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저 그 정도의 건강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87세의 고령으로 서울서 여기까지 왔다 가시는 어머님의 건강을 하느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어머님도 그 축복을 찌푸리지 마시고 감사하면서 하루하루를 사세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슬픔은 세상 사람들의 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거든요. 그것은 세상을 구하는 하느님의 힘이요, 사랑입니다. 그저께 고린도전서 13장을 읽다가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에 꽝하고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습니다. 지중해 일대를 단신으로 정복한 바울의 힘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말을 뒤엎으면 ‘사랑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제 『기독교사상』에서 이동철 씨의 가슴에서 솟아나는, 바위에서 터지는 것같이 시원한 말에 먹물 먹었다는 제가 항복했습니다. 하느님이 뭐예요, 양심이지요. 양심은 뭐예요, 상식이지요. 그럼 상식이란 무엇이냐는 것을 이런 말로 했군요. 사람이 열이 있는데, 빵이 열 개 있으면, 하나씩 나누어 가지는 것이 상식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것이 양심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인 거구요. 신앙이란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죠. 유별난 게 아니고. 유별난 신앙들이 상식의 신앙이 되어야겠습니다. 아쉬운 대로 이만.

 

1982.5.2

 

기도는 슬픔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 사랑만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을 표현. 동생 동환이 보내준 책을 읽고 저자에게 보내는 신학적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