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평등

당신 나의 봄길에게

 

안양에서 띄우는 첫 글월이군요. 서늘하고 상쾌한 아침이오. 어머님이 너무 무리하셔서 지치지나 않으셨는지 저으기 마음이 쓰이는군요. 나는 더없이 건강하고 씩씩한 상태예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거의 다 일하러 나가기 때문에 저녁 시간이 서울보다 거의 두 시간이나 늦어서 다시 저녁을 먹기 시작했어요. 환경도 좋고 조용하고 운동도 더 많이 할 수 있어서 식욕이 왕성해졌다고 할는지. 오늘 아침에도 교회 새벽종 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나서 냉수마찰을 하고 6시 30분 점검이 시작될 때까지 팬티만 입고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요가를 했다면 여기서 보내는 나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오.

어제 아침에는 요가를 하는 내 눈에 솔잎에 달린 이슬방울이 햇살에 반짝이는 것이 얼마나 맑고 아름다웠던지 정신없이 들여다보다가 속으로 당신에게 이렇게 뇌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오. ‘솔잎 끝에 스며 나온 당신의 푸른 마음, 아침 햇살을 받아 터질 듯이 반짝이네요.’ 솔잎에 달린 이슬방울 같은 건 생각해 본 일도 없었기에 그만큼 신선하게 나의 감성에 울려왔던 거죠. 방이 정남향은 아니지만 해가 잘 들고 전면이 창이어서 햇빛도 충분하고 전망도 썩 좋아서 아주 기분이 좋다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밖에 있을 때는 일광욕을 너무 하지 않았던 것 같군요. 햇볕에 나다닌다고 일광욕을 하는 것은 못 되거든요.

여기 음식은 서울 음식보다 입에 잘 맞아요. 우선 밥이 맛이 있군요. 쌀 한 톨 한 톨 씹어 입안에 단물이 가득 담기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고, 가슴은 고마움으로 벅차오르지요. 식사 시간을 한껏 즐기는 거죠. 이건 가족들을 안심시키려고 꾸며서 하는 말이 절대로 아니오. 눈을 지그시 감고 한정 없이 밥을 씹고 있는 내 모습을 들여다보면 퍽 행복해 보일 거구먼요.

아, 정말 전일 뜻밖에 당신을 만나던 날 아침은 흐려 있었지요. 교도소 앞길에 늘어선 미루나무들에서 가을이 떨고 있는 것 같았소. 북극에 묶여 있던 눈보라가 슬슬 시베리아로 움직여 나오고 있다는 소식에 벌써 떨 건 없잖아, 그런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런데 당신을 만나고 돌아와서 내다보니 그새 해가 나오고 해서 그런지 미루나무들에서 한국의 가을은 신나서 술렁거리고 있었소. 무르익어 가는 들판이 보기 좋았던 거죠.

여기서는 밤만 되면 서울로 달려가는 기차 소리가 끊이지 않아요. 그러나 그건 나를 괴롭히는 소음이 아니라 내 마음을 싣고 서울로 원산으로 회령으로 해서 두만강을 건너 용정으로 달리는, 아득한 향수를 몰아오는 가슴 울렁이게 하는 소리라오. 35년 전 당신과 처음으로 달릴 때 우리 앞에는 38선도 휴전선도 없었건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통일의 염원으로 가슴을 불태우며 통일에 대한 명상과 기도에 잠기는 거라오.

통일을 과제로 놓고 생각하다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커다란 문제에 한 줄기 빛이 비쳐 오는 것을 얼마 전에 경험했어요. 자유가 없는 평등이 얼마나 허구냐는 건 공산 세계를 보면 뚜렷한 거죠. 그와 동시에 평등이 없는 자유도 똑같이 허구죠. 여기까지는 상식에 속하는 거구요. 그러면 자유와 평등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가요? 이것도 저것도 다 있어야 하는 두 다른 것인가요? 그게 아니라는 건 이런 형식으로 깨달았군요. 그 형식이란 ‘자유의 평등’인 거요. 이렇게 이 둘은 토씨 ‘의’로 연결된 하나인 거요. 공산 세계에서 핏대를 세우는 ‘빵의 평등’도 ‘자유의 평등’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비로소 의미 있는 것이 되는 거죠.

우리 막내며느리 채원이가 엄마가 되어 가는 중이라고! 만세! 저를 닮은 예쁜 딸을 낳아서 우리 무릎에 안겨주었으면 꼭 좋겠구먼요. 성근이, 색시를 마냥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바우같이 행복한 아기가 태어나는 거다. 머리를 까딱까딱하며 인사를 하는 바우가 자라는 걸 볼 수 없어서 유감이지만, 눈만 감으면 눈앞에 선하니까!

 

점심을 먹고 한잠 자고 났더니 땡 하고 당신의 편지가 날아들었어요. 이래저래 오늘은 즐거운 날이군요. 안양에서 당신의 사랑의 글을 처음 받는 날이군요. 편지에 문의한 것부터 대답해야지. 불어책은 나와 같이 내려와서, 여기서 받았소. 양(성우) 시인의 신접살림 가보고 싶고 같이 한잔하고도 싶지만, 기다려야지. 한껏 행복하기를 빈다고 전해주시오. 영미 편지는 정말 반갑게 읽었고, 지금도 그림을 기다리고 있다고 일러주시구려.

당신 환갑날에 모여 온 아름다운 마음들로 만발한 꽃밭에서 풍기는 향기, 지금도 내 마음에 그윽하오. 묵시록 21장에 신부로 단장된 새 예루살렘이 갖가지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지요. 이제야 그 묘사가 얼마나 아름다우냐는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당신의 환갑날 모여든 고마운 마음들이 보석처럼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라는 것, 적어도 묵시록의 저자는 그런 심정으로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고 싶었던 거지요. 어쩌면 박(형규) 목사는 나와 그렇게 마음이 통하는 걸까요? 나도 그 대목이 너무 좋아서 양 시인의 새집에 그 구절을 써 붙이고 싶었던 거거든. 당신을 안양으로 안내해 주신 고귀한 손께 거듭거듭 감사를 드리고 싶군요. 

나는 지금 윤(반웅) 목사님 계시던 방에서 살고 있어요. 윤(반웅) 목사님의 그윽한 마음을 숨 쉬고 있다고 전해 주시오. 편지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내가 여기서 만들어 보내도록 할 테니까 염려 마시오. 불어 3권까지 마치려면 금년 말까지는 갈 것 같군요. 1일 1식으로 몸이 좀 야위었던 것만은 사실이지요.

운동 시간이 되어서 나가 운동하고 돌아와서 냉수 목욕하고 다시 붓을 드니 4시 30분이군요.

아무래도 이 편지는 이틀 걸려서 써야 할까 보군요. 냉수 목욕하고 변소 유리창에 비친 내 몸을 보니 군살 하나 없는 적당한 운동으로 잘 단련된 몸, 누가 진갑이 지난 사람의 몸이라고 하겠소? 그런데 얼굴을 보니 이건 주름투성이로군요. 실망, 실망. 수염이나 깎을까 하는 생각이 다 드는군요. 10월 접견 때는 아주 싱싱한 모습을 보일게요.

나보다는 어머님 건강을 잘 보살펴 드리도록. 잣죽을 대접하고 호박씨, 해바라기 씨를 볶아서 까 드리도록 해보시오. 수시로 집어 잡수시게. 그리고 믹서로 채소와 과일 주스도 만들어 드리고. 안(병무) 박사가 교회에 나와서 증언했다는 소식 기쁘군요. 서(남동) 목사님이 그 바쁜 시간에 꽃바구니를 안고 오다니, 건투를 빈다고 전해 주시오. 나가서 돕지 못하는 이 안타까운 심정,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9월 11일(목). 어제저녁에 당신의 둘째 편지(금)가 들어와서 나를 기쁘게 해주었소. 손 한번 잡아 보지 못한 명준 군 부둥켜안아 주고 싶군요. 성(내운) 교수의 시 낭송도 듣고 싶구요. 막코드 교장에게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지금 성령만이 교수인 신학교에 유학 와 있다고 전해 주시오. 성경 읽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너무 달라졌으니까. 프린스턴에서 잘못 가르친 건 아니지만 신학이란 저마다 제 자리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프린스턴에서 배운 것이 기초가 되어 있기는 해도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새로 보게 된 거죠.

요새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주기도문의 ‘용서’를 비는 대목이오. 용서란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쓸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맺혔던 매듭을 풀고 적대 관계에 있던 관계가 사랑과 평화의 관계를 이루는 일, 얽혀서 옴짝도 못하던 관계에서 풀려나 한 목적을 향해서 다 같이 새로 출발하는 일이거든요. 이것을 개인의 일로서가 아니라 민족적인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는 거라오. 그리스도인은 용서하는 사람, 푸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그 선 자리는 하느님과 같이 높은 자리라는 것을 말하는 거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원한을, 적대 관계를 푼다는 말이 되겠죠. 원한에서 풀려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해요. 자유롭게, 신나게 뛰지를 못한다고요. 산등성이를 달리는 노루, 사슴같이 자유롭게 뛰는 몸가짐이 중요한 거죠.

35년간 큰집에서 맏며느리로 살면서 고생도 많았고 수고도 많이 했건만 세상에 제일가는 상팔자라고 느낀다니 그냥 고마울 뿐이구려. 나도 지금 이 자리를 상팔자로 알고 살아가고 있어요. 나의 설교 원고 가운데 「최악에서 최선을」이라는 설교가 있을 거요. 그 설교할 때는 남의 얘기를 한 거지만, 지금은 그 설교를 조금은 사는 것 같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요. 내가 놓여 있는 자리를 최악이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여하튼 현재를 최선으로 살려고 애쓰다 보니 인생이란 살만한 것이라는 것을 날마다 고마움으로 느끼는 거죠. 모두 모두 고마운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 선물로 나누어 드리시오.

 

당신의 사랑 늦봄 씀

 

어머님

 

어머님의 정신력과 믿음이 그 노쇠한 몸을 끌고 이겨 낼 줄 믿기는 합니다마는 이제 서서히 긴장을 푸시며 잘 잡수시고 건강을 회복하십시오. 10월 접견 때는 뵐 수 있으리라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어머님의 농성 소식을 들으면서 이사야서를 읽다가 26장 18절에 “해산의 아픔 끝에 낳아 놓은 것은 바람이었다”는 구절에 딱 부딪혔어요. 또 33장 11절에는 “잉태한 것이 지푸라기니 낳을 것은 검불밖에 무어가 되겠느냐”는 말씀이 있어요. 어머님이 저희 두 아들 때문에 지금 속을 태우시는 것이 저희를 낳으실 때의 아픔보다 더하면 더했지 조금도 덜한 것이 아닐 거예요. 그러면 지금 어머님이, 아니 우리 모두가 겪는 해산의 진통에서 바우 같은 놈이라도 태어날 것인지? 그냥 바람이나 검불일 것인지? 성경에는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받는 아기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지요. 앞으로 태어날 이 겨레의 아기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지어야 하나요? 전 민족의 집약된 애타는 염원을 담은 이름이 있을 법도 한데요. 저는 지난 8·15에 실망하고 앉아 계실 어머님을 생각하며 눈을 감고 오래 앉아 있다가 속으로 어머님께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이 아들의 간절한 마음이니 들어주세요. 전 여기 이렇게 한낱 티끌로 앉았습니다. 어머니, 눈 코 입 귀 팔다리 손발 모두 없이 당신께 받은 이 어리숙한 마음만으로 앉았습니다.’ (약 10줄 읽을 수 없음)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나니까 이 마음이 어머님께도 전달되리라는 마음이 들더군요. 이런 심정으로 살고 있으니까 어머님, 너무 마음 태우지 마시고 느긋하게 기도하면서 기다리십시오. 이 겨레의 역사 속에는 분명히 성령으로 잉태된 새아기가 자라고 있어요. 진통의 간격이 좁아져 가고 있습니다. 여, 야, 정부, 국민 다 같이 환성을 지를 새아기의 탄생을 맞을 준비들을 해야지요.

저희도 문칠이와 바우로 본전은 뺐으니까, 이제부터는 ‘덤’인 거죠. 덤 제1호는 성근이와 채원의 사랑의 열매일 모양이군요. 예쁜 증손녀를 꿈꾸며 기다리세요. 어머님께는 성경 읽는 경험담을 좀 써야 하는 건데 지면이 다해 가는군요. 글자를 읽지 마세요. 글자 뒤에서 들려오는 하느님 마음의 고동 소리를 들으세요. 북소리 같은 그 고동 소리에 글자들은 다 사라지는 겁니다. 바로 이거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그냥 느낌이어야 해요. 내 가슴을 북처럼 울리는 강한 느낌이어야 해요. 그것이 언젠가 꼭 말을 해야 할 때가 오면 나도 모르게 말이 되어 나가는 겁니다. 이렇게 말해도 되겠죠. 성경의 문자들을 몽땅 용광로처럼 뜨거운 하느님의 마음에 부어 버리는 겁니다. 글자는 하나도 안 남는 거죠. 그 뜨거운 쇳물을 내게 쏟아붓는 거죠. 그때 내게서 떨어지는 활자 몇 개 주워 찍어내면 나에게 온 하느님의 말씀을 받는 겁니다. 이런 비유도 성립될 것 같습니다. 성경의 글자들을 쓰레기 더미 같은 나의 생에 쏟아붓는 거죠. 그래서 글자는 형태도 없이 되어버린 다음 역사의 밭이랑에 갖다가 거름을 주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움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보면서, 거기서 하느님의 산 말씀을 보게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성경에 대하는 것이 성경에 올바로 대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부디부디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채원에게

 

축하한다 진정으로. 사랑의 열매로 미지의 새 생명을 몸속에 받아 기른다는 일, 이건 여성만이 누리는 축복이지. 괴롭기야 하겠지만 우주의 신비의 극치가 제 몸속에서 저도 모르게, 저로서도 어떻게 해볼 도리 없이 고요히 자라 간다는 것을 느낄 때 내 몸은 이미 내 몸만은 결코 아닌 신비를 지닌 몸이 되는 거지. 남자들은 아무리 부러워해도 그 경험은 얻어 볼 수 없단다.

신비로운 마음의 노래로 가슴 울먹이며 하루하루를 맑게, 기쁘게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자기만을 위하는 마음에는 기쁨이 깃들이지 않는 법이거든. 기쁨이란 남을 기쁘게 해주었을 때, 그 얼굴에서 번져 오는 기쁨으로 내 마음이 기뻐지는 거거든. 기쁨, 행복의 길은 이 밖에 아무 데도 없느니라. 이런 기쁨으로 새 생명이 자라는 네 몸과 마음을 채우도록 기도한다.

1979. 9. 10. 아빠 씀

 

안양교도소로 이감 후 첫 편지. 

통일을 생각하며 자유의 평등을 얘기함.

주기도문의 ‘용서’에 대한 생각을 표현함.

임신한 막내 며느리에게 보내는 축복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