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0516 가룟 유다의 부활

바우 할미에게





벌써 5월도 반이 지났군요. 지금은 분명히 늦봄이라고 하겠소. 나의 철인 거죠. 나의 창 앞에 자잘한 흰 꽃이 하나 가득 핀 나무가 서 있기에 물어보았더니 보리수라는군요. 늦봄은 슈베르트의 낭만의 꽃 보리수의 철이군요. 어제 당신 편지 석 장에 호근이가 이탈리아에서 보내 준 카드 한 장 받았지요. 문칠의 사진, 호근의 멋쟁이 사진도. 정말 기뻤소이다. 손자가 저를 닮았다고 해서 기쁘지 않을 할아비가 없겠지만.





여기까지 쓰고는 철필촉이 나빠서 촉을 바꾸어달라고 했더니 오늘이 18일이 되었군요. 





할애비의 기쁨은 백두산 꼭대기에나 오를 것 같은 느낌이라오. 어제는 14일 편지가 들어왔는데, 좀 기분이 언짢은 것 같으니 웬일이죠?  나의 건강은 더할 수 없이 좋다고 하겠소. 그저께는 꼭 한 시간을 뛰고도 별로 숨이 차지 않을 정도라오. 요가나 단전호흡법이 심장을 얼마나 튼튼하게 만드는지를 미처 몰랐었소. 어느 책에도 그런 것은 쓰여있지 않구요. 한 시간 뛰고도 숨이 차지 않다는 것은 심장이 아주 튼튼해졌다는 거죠. 안(병무) 박사나 문(동환) 박사도 무리 없이 살금살금 요가를 하면 반드시 심장이나 혈압에 놀라운 효과가 있으리라고 확신하오. 요사이 우유를 하나씩 먹는데, 그건 영양 전체의 균형상 우유는 하나가 충분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죠. 아무튼 6월 접견도 며칠 남지 않았으니, 그때 와 보면 내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알게 되겠지요.



요사이 나는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과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이라는 찬송가를 부르는 기쁨에 젖어 있어요. 그리고 ‘가룟 유다의 부활’이라는 작품에 몰두하고 있다오. 덕분에 바우의 목련꽃 웃음을 생각할 겨를도, 독서할 시간도 많이 빼앗기고 있다오. 아마도 꽤 큰 작품이 될 것 같은 느낌이 오는군요. 가룟 유다는 어느 제자보다도 뚜렷한 주관이 서 있는 사람이었다고 보겠는데, 그가 예수에게 매력을 느껴 3년을 따라다녔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고 보이지 않소? 그러면서도 그와 예수와의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긴장이 있었을 거고. 그가 예수를 팔았다고 할 때, 그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었지요. 그런 관점에서 복음서를 새로 읽기 시작했다오. 가룟 유다의 눈으로 예수에게 아무 긴장 없이 몰입했던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과 가룟 유다의 부활은 그 성격이 아주 다를 수밖에 없지요. 내가 요새 어떤 정신 상태에서 지나는지를 알 수 있겠지요. 예수를 새로운 긴장 관계에서 새로운 안목으로 보는 흥분! 가룟 유다의 복음서가 쓰였다면 어떤 것일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소?



베켙의 희곡 등, 현대 희곡들을 읽고 싶군요



전날 조아라가 입원했다는데, 정선의 딸이겠지요? 웬일인지? 요새 내가 특히 기억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이름에 아라의 이름도 들어있어요. 차진정 권사를 찾아갔을 때 일 기억나지요? 그 씩씩하던 모습, 병문안 갔던 사람들이 도리어 격려를 받던 일.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격려해 주라고 말씀드리고, 앞으로 완전히 회복되어 다시 전처럼 교회와 겨레를 봉사하시게 되도록 위해서 옛친구 문 목사가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한다고 전해주시오. 양(성우) 시인도 수술 후에 회복이 순조로운지 퍽 궁금하군요. 윤(반웅) 목사님, 강(희남) 목사님, 고(영근) 목사님의 건강도 걱정스럽군요. 문안을 전해주시오. 김(지하) 시인에게도 어머님을 통해서 소식을 전해주시오. 임 여사를 통해서 전주에 계시는 여러분에게도 안부를 전해주시오. 잊지 않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이런저런 분들 생각하면, 내가 이렇게 건강하고 보람있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송구스러울 정도. 나 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하느님께 감사할 일뿐이군요. 이건 억지로 자위해서 하는 말이 절대로 아니오. 날마다 부르는 새 찬송가, 가룟 유다의 눈으로 예수를 다시 보는 놀라움 등, 여기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지요. 밖에서 보낸 열 달, 나를 공중 분해하던 세월을 반성하면서,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 새로운 설계 등, 또 자세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생각하면 다만 감사할 뿐이요. 아침에 일어나 203장을 부르고, “당신의 마음에 내 마음은 열려 있습니다.”라는 기도로 하루가 시작되구요. 자리에 들 때면 “이 밤에도 내 마음은 열려 있습니다. 꿈으로 찾아와 주소서” 하며 눈을 감는다오. 



호근이 Florence에서 미켈란젤로의 조각들을 보아주었으면 좋을 텐데. 꼭 카나다에 들러오도록 편지를 내시오. 당신 붓글씨 쓰기가 궤도에 오른 것 같아서 정말 기쁘군요. 격려를 보내오. 좋은 작품을 많이 많이……   당신의 늦봄





바우 증조할머니





어머니가 바우를 안고 계시는 사진을 보다가 이사야서 11장 1절 생각이 났습니다. 마른 그루터기에서 돋은 새싹 말입니다. 얼마나 탐스러운 새싹인지. 그리고 그 마른 그루터기가 새싹보다도 더 크게 웃고 있는 모습……. 정말 흐뭇합니다. 80여 성상에 걸친 피눈물 얼룩진 어머님의 수난에서 한 점 티 없는 평화로운 웃음의 햇순이 그렇게 곱게, 소담스럽고 싱그럽게 돋았으니, 어머니, 어머님의 모든 고난이 충분히 보답을 받은 것이 아니겠어요? 감사할 뿐입니다. 접견 오는 한 달을 손꼽아 기다리시는 걸 애타하지 마시고 기쁨으로 생각하세요. 저는 어느새 한 달이 지났나 하고 놀란답니다. 6월 1일 뵈올 때를 즐거움으로 기다립니다. 아주 건강한 모습 보여 드릴게요.



아버님 유언 담긴 편지를 잘 읽고 명심한다고 전해주세요. 지금 같아서는 나가면 무어든 쓰고 또 쓰고 싶은 생각입니다. 성서 번역을 완성하는 일은 성서 공회에서 부탁 않더라도 단독으로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굳어져 갑니다. 원전과 대조해 가면서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나 손댈 데가 많이 발견되는군요. 부디 건강하소서. 바보 같은 어머님의 맏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바울의 말대로 바보가 되는 일 아닙니까? 바보가 되는 만큼 믿음이 깊어지는 일 아니겠어요? 숫제 바보가 되면 억울하지도 애타지도 않게 되는 것 아닐까요?





바우 어미에게





어쩌다가 네가 우리 가문에 들어와서 내가 보기엔 이 겨레의 내일을 상징하는 것 같은 바우를 낳아 주었는지, 생각하면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요새 노래하려면 긴장을 느낀다고? 공자님 앞에서 문자를 쓰는 것 같지만 내 의견을 한마디 할게. 그동안은 자기의 목소리에만 자신을 갖고 노래를 불러왔는데 인제 그것만이 아닌 고비에 다다른 거지. 청중과의 사이와 음악과의 사이의 긴장을 풀라고 하고 싶다. 그 긴장은 곧 적대 관계지. 음악을 내 목소리로 정복하고, 내가 부르는 노래로 청중을 정복한다는 생각 때문에 긴장이 생기는 것이 아닐는지? 음악은 네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거야. 청중도 음악을 사랑해서 와서 앉아 있는 거지. 청중과 함께 음악을 한껏 사랑해 주고 즐기면 되는 거야.



성경에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말이 있어. 찾아보라고. 긴장이란 일종의 두려움이거든. 바우를 사랑하듯 음악을 사랑하라고. 바우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무슨 긴장이 있을 수 있어? 없지? 마냥 즐겁고 고마울 뿐이지? 그런 경지에서 노래를 부르면 되는 거라고.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럴지 모르지. 아는 것도 누가 옆에서 일깨워 주면 새삼스러울 수도 있지. 한껏 노래를 사랑하고 한껏 즐기라고. 내가 사랑하고 즐기는 만큼 청중도 그 노래를 사랑하고 즐기게 될 거야. 바우 생각보다 가룟 유다 생각을 더 한다고 섭섭해하지 말어. 파이팅!





문규, 영규 아빠에게





전도서 11장 1절을 원문에서 그대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오. “네가 먹을 양식을 바다에 던져라. 먼 훗날 어디서 그걸 만날 거다.” 인생을 이렇게 살면 얼마나 느긋하리오. 너무 조바심을 말기를 바라오. 지금 문규 아빠가 바다에 던지는 것은 10년도 못 되어 되돌아올 테니까.





문규, 영규야



너희 아빠, 엄마의 고생을 잊으면 그야말로 벌받는다. 훌륭하게 자라서 아빠, 엄마의 오늘의 고생을 눈물겹게 갚아 드려야 해. 언젠가 부둥켜안고 춤을 출 날이 오겠지. 그동안 공부도 많이 하겠지만 인간으로 더욱 성숙해야 하는 거야. 큰아버지는 너희가 보고 싶다.





영환, 예학에게





낯선 땅에 가서 그동안 그야말로 赤手空拳에 쌓아 올린 생의 기반을 생각하면 눈물겹지. 형도 너희가 정말 보고 싶고. 인제 인생의 후반기를 같이 빛나게 살고 싶구나. 만나면 쌓이고 쌓인 회포 풀 일도 많고. 호근이 가거든 나를 만난 듯 회포를 실컷 풀어라. 언젠가 만나면 영환에게 용서를 빌고 싶은 일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당동교회 청년회에 가서 음악 감상을 시키는 것을 중단시킨 일. 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이다. 한 번은 저녁 예배를 보고 들어와서 손찌검을 한 일. 그 밖에도 많이 있겠지만. 아무튼 살아가다 보면 용서받을 수 없는 일들이 있지만, 그 아픔에서 비로소 우리는 인생을 깨치는 거지. 언젠가 옛이야기를 하면서 보람있게 살아보자꾸나. 형은 부모만큼은 아니라도…





성수, 영금에게





아무 배경도 기반도 없는 데서 생을 설계해 나간다는 일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안다. 계획대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일이 전개되지 않는다고 너무 초조해하지 말아라. 주어진 오늘을 주어진 제약 속에서나마 충실히 살아가노라면 모든 일이 뜻하지 않은 보탬이 되어 돌아온다.



우리 세대의 좌절을 너희 세대가 겪는다는 것은 바라지 않지만, 나의 생을 생각해 봐라. 스무 살에 신학교에 들어가서 서른여덟에 목사가 되었으니 나의 생이 얼마나 좌절과 중단의 연속이었는가? 그리고 그 후로 오늘까지의 나의 생도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거든. 내가 순간순간을 최선으로 산 것도 아닌데, 그 좌절들을 하느님은 몇 갑절씩 축복으로 보탬 해 주셨거든. 조바심을 털어 버리고 마음의 여유를 회복하면 의외로 모든 일은 술술 풀릴 거다.



1979. 5. 16. 문칠의 외할아버지 씀






막달라 마리아, 가룟 유다와 예수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며 ‘가룟 유다의 부활’ 이라는 작품을 구상 중이며 가룟 유다의 눈으로 예수를 다시 보는 기쁨을 표현. 



어머니가 증손자를 안고 찍을 사진을 보는 기쁨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