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늦봄의 말과 글>

연대의 언어와 하나됨의 길 (2025년 9월호)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민주주의와 깃발> 전시회 입구에 들어서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강렬한 외침이 눈에 띕니다.
“연대야말로 힘이다.”
그렇습니다. 12.3 계엄 정국에 거리로 나선 시민들에겐 광장이 학교였고 서로가 서로의 교과서였습니다. MZ들과 5060이 세대를 넘어 어깨걸고 ‘다시 만난 세계’를 합창했고, 남태령으로 달려나간 어린 여학생들은 농민들의 트랙터 행렬에 합류했습니다. 거리의 연대가 승리의 역사로 기록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늦봄의 삶도 연대 그 자체였습니다. 노동자든 농민이든 학생이든,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그들과 어깨를 걸었습니다. 연대를 통한 하나 됨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은 신념이었습니다.
9월호에선 ‘민주주의와 연대’, 그 깊은 의미들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편집장>
 
 

“부르면 달려갔다”...노동자-청년-학생 끌어안기 

독재정권 폭압 맞서 ‘연대’ 절실 
1985년 민주화세력 통합 위해 주위 만류에도 ‘민통련’ 조직

 
‘시인 특유의 자유인적 기질을 가져서 어른들 속에서도 좀처럼 ‘조직적 실천’에 응하기가 쉽지 않은 스타일이었다. 도대체가 틀에 묶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김형수. 2018)
  

틀을 넘어선 연대의 선택

김형수 작가가 묘사했듯 늦봄은 ‘조직적 실천’보다는 자유로운 사유와 삶을 추구했던 사람이다. 그에게 ‘무슨 파’니 ‘무슨 그룹’이니 하고 구분되는 틀은 억압과도 같았다. 분통 터지게 하는 그런 틀에서 우리 모두 걸어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하지만 그는 1985년, 민주화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자발적으로 ‘민통련’이라는 틀 안으로 들어갔다.

이는 통합(재야 명망가들이 모인 민주통일국민회의와 젊은 층 중심의 민중민주운동협의회의 통합)을 둘러싼 질서와, 기존 동료들과의 갈등을 감내한 결단이었다. 안병무에 의하면, 늦봄이 통합 조직을 만들기로 마음을 굳힐 때 민주화 동료들은 그를 말렸다고 한다.
 
옛 동료들은 강력히 만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점 의견 차이가 커지자, 그는 젊은이들이냐 동료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 몇 차례 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 아들 또래의 동지들과 의기투합하여 품이 넓은 조직을 건설하고 의장이 되었다. … 신기하게도 그는 그곳에서 놀랄 만한 지도력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김형수. 2018)
 
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연대’가 절실했던 시기, 늦봄은 그의 아들뻘 동지들과 함께 품 넓은 조직을 만들어냈고, 그 안에서 연대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는 놀라운 리더십을 발휘해 냈다. 그의 연대는 타협이 아닌, 깊은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85년 1월 민통련 창립대회에서 젊은 노동자의 어깨에 두손을 올리고 반가워하는 문익환 목사. 
 
 

청년에 대한 신뢰와 연대

늦봄은 청년과 학생들을 깊이 신뢰했다. 그들이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희생의 선봉에 있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전태일 분신 이후 발현된 그들의 연대 의식에 감동하며 이렇게 언급했다.
 
학생 운동이야 일제 때도 있었지만, 4·19에서 터졌다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로 잠들었던 것이 되살아난 건데, 그 특징은 노학연대에 있죠. 요새는 농학연대로까지 뻗어 나가게 되구요. 과학 정신으로 무장된 이념 운동으로까지 번져 나가게 되는데… (1992. 2. 8 옥중 편지)

늦봄은 학생과 노동자들이 부르면 언제 어디로든 달려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애타는 마음을 나누었다. 학생 노동자 열사들의 장례위원장이 되어주었고, 유가족들의 울타리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연대는 단순한 지지의 표현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된 실천이었다.
 
 

노동자들의 울타리가 된 연대

 
◇노동자들이 부르면 어디든 달려갔다. 1985년 7월 20일 동일방직 노동조합운동사 출판기념회를 찾은 문익환 목사가 다함께 어깨동무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학생 시절 늦봄을 만났다는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손은정 목사는, “문 목사님은 노동운동에도 깊게 연대하셨다”라며, 늦봄의 신앙 강좌와 노동자교육을 들었다는 그 선배(송효순 목사)의 회고담을 직접 들려주었다. (2025 통일의집 ‘영성 프로그램’ 강의)
  
당시 군부 독재 상황에서 미가서와 출애굽기 이야기를 많이 하셨던 기억이 나요. 참 설득력이 있었어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그리고 우리 편이구나 싶었어요. 울타리 같은 분이었다는 기억이 있어요.
 
손 목사는 늦봄이 쓴 여러 시에서도 그의 노동자 연대 의식이 드러난다고 소개했다. <성근아>도 그중의 하나다.
 
난 어젯밤 노동문학을 읽다가
한 노동자의 뒤통수를 함마처럼 내려친 졸리움에
함마처럼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함마처럼 뒤통수를 내리치는 졸리움
상상할 수 있니 
 
노동문학을 읽다 깊은 졸음에 빠진 자기 모습과 노동자의 고단함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했지만, 단순한 피곤함의 묘사를 넘어, 노동자들의 삶에 공감하려는 시인의 고백으로 읽힌다. 늦봄은 연대의 언어를 시로도 썼다.

 

연대를 이루지 못한 좌절

1987년 대선, 늦봄과 민통련은 후보 단일화를 이루기 위해 마지막까지 애썼지만, 분열은 막지 못했고, 패배는 현실이 되었다. 그는 자책하며 16일간 단식을 감행했고, 상처 입은 동지들을 추슬렀다. 그러나 민통련은 1년 뒤 해체되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연대의 절실함과, 이를 이루지 못했을 때의 뼈아픈 대가를 새기게 했다.
 
◇1988년 5월 19일 조성만 열사 장례식에 참석한 문익환 목사와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1987년 대선에서 끝내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다. 

 

하나됨을 향한 외침

1989년 방북 이후 늦봄은 ‘하나됨’을 더욱 강하게 강조하기 시작했다. 상고이유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0.5+0.5=1 … 이 1은 그냥 하나가 아닙니다. 이 하나는 찢김으로 해서 죽었던 겨레가 살아나 한 공동체, 한 생활 공동체가 되는 걸 말합니다. … 통일은 우리가 커진다는 걸 말합니다. 아니, 이미 커졌다는 걸 말합니다. (문익환. 1999)
 
그는 하나됨을 단지 민족의 통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존재론적 성장, 우리 자신이 더 커지는 과정이었다. 안병무와 결혼으로 하나 된 후 박영숙이 더 커졌고, 자신도 봄길과 결혼하여 커지지 않았느냐고 설명하는가 하면,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삶의 참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도 ‘나누임은 거짓이고 악이요, 하나가 되는 것은 참이요 선이요’ 라 언급하기도 했다. 즉, 하나됨이 삶의 철학이자 실천의 기준이 된 것이었다.
  
 

마지막 편지- 마지막 연대의 호소

하나됨에 대한 늦봄의 의지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별세 당일 오전 범민련 남·북·해외 본부로 보낸 마지막 편지에 쓴 간곡한 호소가 아닌가 한다. 그는 통일운동이 시련을 겪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범민련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남한 정부를 포함한 남쪽의 통일운동을 더 크게 하나로 묶어내야 한다고 설득했다.
 
우리는 이 벽을 돌파하지 못하면 한을 천추에 남길 것입니다. … 통일운동 자체를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면서 반세기에 걸친 민족 분단의 역사를 청산하고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하겠다고 어찌 감히 말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 좌도 우도 다 같이 한겨레가 되어 분단의 장벽에 온몸 부딪쳐 가야 합니다. … 7.4공동성명을 받아들이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지지하는 모든 개인과 단체는 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 1월 18일 편지. (문익환. 1999)
 
◇돌아가시기 전날 밤인 1994년 1월 17일, 통일의 집을 방문한 민통련 사람들을 대문까지 나와서 배웅하는 문익환 목사. 
 
1월 12일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늦봄은 남한 정부와 주변 단체들을 포용하지 못하고 배제하는 것은 결코 통일운동의 진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신념이었다.
 
 

하나됨은 지금 여기의 과제

전태일 이후 별세까지 늦봄의 삶은 연대의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에게 연대는 형식이나 이상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길이었다. 그의 연대는 결국 하나됨을 향해 있었다.

오늘 우리가 ‘일상 속 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면, 그 출발점은 늦봄이 보여준 연대의 행동, 하나됨의 의지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거리에서의 외침뿐만 아니라, 서로를 포용하고 신뢰하는 작고 단단한 실천들 속에서 자라난다. 그것이 늦봄이 보여준 민주주의의 얼굴이다.

<글: 조만석>
 
[참고 문헌]
문익환 (1999). 『문익환 전집』. 서울: 사계절출판사
김형수 (2018). 『문익환 평전』. 파주: 다산북스
문익환 옥중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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