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의 커버스토리>
1961년, 미국 코네티컷주 장미농장의 활발하고 유쾌한 막내딸 페이(Faye)는 미국에 유학 온 15살 연상 노총각 동환과 결혼하기 위해 배로 태평양을 건너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생일 선물로 말을 선물 받을 정도로 유복했던 그녀가 ‘문혜림’으로 한국에서 맞닥뜨린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학창 시절 약자를 위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간직하며 낯선 나라 한국에서 더욱 낮은 곳을 향했습니다.
세상의 아픔에 동참하고 새로운 내일을 향한 작은 실천.
두 사람이 가는 곳엔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수도교회, 갈릴리교회, 새벽의 집, 두레방, 무지개의 집….
문동환과 문혜림 부부가 꿈꾼 공동체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8월호에서 살펴봅니다.
명동촌, 새벽의 집, 두레방…
길 잃은 민중들과 함께하며 서로 생명을 살리고 연대하기
◇문동환 목사의 고향 북간도(연변 용정시)를 찾은 문동환-문혜림 부부.
노환으로 침대에 누운 문동환 목사는 북간도를 떠올렸다. 눈을 감은 채 그의 머릿속으로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의 풍경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지금도 누워서 명동 동거우 언덕에 있는 나리꽃 생각이 나”
(다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에서)
그는 여섯 살 때 장차 커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커서 뭐가 되려는가” 하는 물음에, 그는 북만주의 지도자였던 김약연 목사를 떠올렸다. 목사가 된다는 건 김약연 목사처럼 민족을 위해 그렇게 살고 싶다는 다짐과 같았다.
그에게 북만주 명동촌은 단순한 고향이 아니었다. 그곳은 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었고, 동시에 그가 평생 연구와 실천을 통해 정립한 떠돌이신학의 핵심을 뚜렷이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었다. 민중, 즉 떠돌이들이 스스로 각성하며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전형을 보여준 곳이 바로 명동촌이었다.
◇일본 신학 유학 시절 문동환(가운데)과 안병무(오른쪽).(1940년대 초)
▲명동촌 (1921~1931)
떠돌이들이 만든 모범적 공동체
명동촌 이주민들은 반봉건 투쟁의 실패와 일제의 국권 침탈을 겪으며, 조선 땅에서는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 이들은 결국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향했다. 그들은 북간도에 터를 잡고, 민족의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세우며 함께 힘을 모아 공동체를 세웠다.
각 가문은 개간한 농토에서 나온 소득의 3분의 1을 학생 교육에, 또 다른 3분의 1은 독립운동을 위해 내놓았다. 낡은 유교적 질서를 과감히 버리고 기독교라는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였고, 지도자들의 헌신 아래 튼튼한 공동체를 세웠다. 명동촌의 모범은 북만주 전역에 학교와 단체,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민족 공동체들이 연이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문동환에게 명동촌은 잊을 수 없는 고향이자, 떠돌이들이 연대와 나눔을 통해 만들어낸 이상적 공동체였다. 그는 “우리 고향 북간도의 일은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되네”라고 간곡히 말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명동촌이야말로 훗날 그가 말한 참 공동체의 원형이었기 때문이다.
▲해방신학과 수도교회 (1967~1974)
신학 연구와 공동체 실천으로의 길
미국 유학을 마치고 기독교교육학 학자의 길에 들어선 문 목사가 공동체에 깊은 관심을 게 된 것도, 어쩌면 그의 몸과 기억 속에 배어 있던 명동촌 경험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1970년 미국 유니온신학교에서 교환 교수로 있을 때, 그는 남미 해방신학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귀국 후 한국에 해방신학을 소개하며 민중신학 정립에 영향을 미쳤고, 이때부터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물질문명의 폐해를 비판하며 기독교가 어떤 사명과 역할을 가져야 하는지를 더욱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수도교회 수요강좌 제1회 졸업생들과 함께 한 문동환 목사.(앞줄 왼쪽에서 6번째)
그는 교회를 ‘하나님이 전 인류공동체를 구원하기 위해 선택한 소수의 공동체’라고 보았다. 수도교회에 초빙받아 목회하던 시절, 그는 전 세계의 다양한 공동체 사례를 소개하며 한국 교회도 새로운 공동체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열망은 결국 ‘새벽의 집’ 공동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 새벽의 집 (1972~1980)
나눔과 평등의 실험
다섯 가족 13명이 시작한 새벽의 집 공동체는 개인 집들을 처분하고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가족 연합체였다. 이들은 수입을 한 통장에 넣고,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공동 살림을 꾸렸다. 물질에 대한 탐욕과 이기심이 현대사회의 비극이라 보고, 소유의 개념을 넘어 나눔을 실천하며 갈등과 소외를 극복하려는 실험이었다.
◇새벽의 집에 붙어 있는 공동서약서(1972. 11. 30)
‘나’보다 ‘우리’를 소중히 여기고, 서로 나누고 섬기겠다는 의지로 재산 공유까지 실천했으며, 가사 노동도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당번제로 맡았다. 이는 개인주의와 권위주의를 넘어서는 평등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
4년 후, 새벽의 집은 도시를 떠나 경기도 양주군 농장으로 이주했다. 산업 문화는 죽음의 문화라 생각했기에, 월급을 받으며 도시에서 사는 삶은 공동체의 가치관과 모순된다고 본 것이다. 그들은 직접 땅을 일구며 생명을 잇는 생명문화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문 목사의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인한 수감과, 공동체를 이끌던 최승국 총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농촌 공동체는 더 발전하지 못하고 약 8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럼에도 새벽의 집은 물질주의를 넘어선 돌봄과 나눔, 민주적 참여의 공동체로 큰 주목을 받았다.
미국에서 노년에도 생활공동체 실천
1991년 미국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내면서도 문 목사는 제도화된 교회를 비판하며 삶 중심, 생명 중심의 공동체를 향한 관심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성서연구반을 조직해 3년간 성서를 함께 읽고 토론했고, 2011년에는 생명문화연구소를 창립해 생활 공동체의 실천을 더 구체화했다.
▲두레방 (1986~1992)
문혜림이 세운 기지촌 여성 공동체
문 목사 못지않게 부인 문혜림 여사도 공동체 활동에 깊이 헌신했다. 그녀는 미군 기지촌 여성들을 돕기 위해 ‘두레방’ 공동체를 열어 약 6년 동안 기지촌 여성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애썼다. 두레방은 지금까지도 억눌린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연대 공간으로 이어지고 있다.
◇두레방 소식지(1988). ‘두레방은 이땅에서 소외되고 억눌린 삶을 살고 있는 이를 위한 공동체’라고 쓰여있다.
죽음의 문화를 넘어서는 창조적 삶
문동환이 평생 추구한 공동체의 정신은 결국 생명공동체로 귀결된다. 그가 말한 생명공동체는 단순히 이상향이 아니라, 바벨탑처럼 권력과 이윤 중심으로 굳어진 제도와 그로 인한 죽음의 문화를 넘어서는, 창조적 삶의 방식이었다. 그는 서로의 생명을 살리고 연대하는 공동체, 곧 성서의 떠돌이 전통을 오늘의 삶에서 재현하는 참 공동체를 꿈꾸었던 것이다.
침대에 누워 목을 움직이기도 힘들었지만, 문 목사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지금은 자본주의, 제국주의 세력이 판을 치잖아. 물질주의, 거기에 다 유혹을 받는 줄도 모르고 그냥 쫓아가는 것이 대부분이지. 그것을 경계하면서 생명 중심 문화를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겠지.”
(문동환. ‘북간도의 십자가’에서)
<글: 조만석>
<참고 문헌>
문동환(2009) 『문동환 자서전』. 삼인
문영미(1996) 『새벽의 집』. 보리
다큐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Youtube, CBSJOY 채널)
◇ 문동환 목사가 선교 공동체에 대해 쓴 노트. 국내와 세계의 문제점을 지적한 후, 새 공동체의 지향점과 그 형태에 관한 생각을 적어놓았다.
(🔗오픈아카이브에서 원문보기. 39-40쪽)
월간문익환_<문동환·문혜림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