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스승 문동환, 내 영원한 동지 문혜림
◇의정부 미군부대옆 ‘뺏벌’에 있는 두레방 사무실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문혜림 여사와 유복임. 문영미 제공.
▲ 나의 동지 문혜림
“인터뷰는 더 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첫 만남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밤을 새울 수 있는 사람이라서 좋아요.”
문혜림 선생님을 처음 만난 날, 아주 짧은 인터뷰를 마치며 내게 해주신 말씀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여신도회전국연합회에서 특수선교센터 두레방의 현장실무자를 구하기 위한 인선위원회가 열렸고, 나는 그 첫 후보자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곧이어 인선위원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른 인터뷰는 더 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그렇게 문혜림 선생님과의 긴 인연은 시작되었다.
두레방은 처음, 의정부시 가능동 미제2사단 본부 Camp Red Clouds 인근에서 미군과 국제결혼한 여성들을 위한 상담센터로 문을 열었다. 문 선생님 스스로가 국제결혼을 하신 분이었기에 동병상련의 느낌과 함께,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나 막걸리빵 사주세요”
▶작은 것에 행복해할 줄 아는 사람
아주 가끔 두레방이 한가한 시간일 때면 문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하고 귀여운 표정으로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시고는 “유 선생, 냉커피 한 잔만 타 줄래요?”하고 부탁하셨다. 내가 만든 냉커피가 제일 맛있다고 하시면서 즐거워하셨다.
문 선생님은 작은 것에 행복해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같이 의정부 재래시장에 갈 때면 꼭 들르던 좌판이 있었다. 밀가루를 막걸리로 발효시켜 만든 가장 싼 빵을 파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유 선생, 나 막걸리빵 사주세요”하며 즐겨 드시곤 했다.
코네티컷주 부유한 장미농장 막내딸
▶회상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버리고 아픔과 고난의 땅을 선택하다
문 선생님은 옛 시절을 회상하며 긴 얘기를 해주시기도 했는데, 어린 시절의 이야기, 문동환 교수님과의 만남과 결혼, 박정희와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엄혹한 한국의 상황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하여 미군부대 전용의 우편시스템을 이용하는 등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었다.
미국인인 문 선생님은 코네티컷주의 커다란 장미원을 운영하는 중산층 가정의 막내딸로 매우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막내딸을 유난히 사랑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생일 선물로 작은 말 한 마리를 선물하셨는데, 말 자체가 비쌀뿐더러 마구간도 필요하고 관리도 만만치 않은 아주 비싼 선물이었다고 했다.
하트퍼드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던 시절 15살 연상의 문동환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채플에 가서 지켜보았던 그는 키 크고 마른 몸매에 창백한 얼굴이었고, 고국을 그리워하며 혼자 조용히 피아노를 치는 그의 분위기에 반하셨다고 했다.
졸업 후 문동환은 한국으로 돌아갔고 그를 그리워하던 문혜림은 한국행을 결심한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행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미국 신문과 방송을 통해 소개되던 한국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부모를 잃고 길거리를 울며 헤매는 아이들의 나라,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고 했다. 막내딸의 결심을 막을 수 없었던 아버지는 절망하셨고 밝고 강인했던 아버지의 눈물을 문 선생님은 그때 처음 보았다고 했다.
새 이름 ‘은혜로운 숲, 혜림’
▶독립운동가 집안의 며느리가 되다
홀로 한국에 온 문혜림을 시어머니인 김신묵 권사님은 따뜻이 맞아주셨다. 시아버지는 문재린 목사님으로 두 분은 북간도에서 일본 군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교육과 목회 활동에 전념하셨다. 문동환은 아내에게 본명 헤리엇(Harriett)과 비슷한 발음이면서 은혜로운 숲이라는 뜻의 ‘혜림’으로 한국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일상복으로 한복 고집
▶한국사랑과 아이들
문혜림 선생님은 한국 사람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셨다. 한복을 입고 아이를 업은 채 연탄불을 갈고 하는 사이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어 키웠다. 두레방 초대 운영위원장이던 이우정 교수님의 회고에 따르면 “한국 여성들도 한복을 입지 않는 시대로 바뀌어 가는데, 굳이 불편한 한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고 여러 번 말리셨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한복을 입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두레방 행사가 있을 때 한복을 입으신 문 선생님의 모습은 참 잘 어울렸다.
▲ 나의 스승 문동환
언니 따라 간 수도교회에서 처음 만나
▶첫 만남
스승이신 문동환 교수님께서는 귀국 후 수도교회 교인들과 함께 마가복음에 나오는 기독교 공동체적 삶을 시도하셨고, 가진 것을 모두 내어놓고 함께 쓰고 나누는 그 공동체 ‘새벽의 집’은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고 했다.
내가 문동환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은 재수할 때, 작은 언니를 따라갔던 수도교회에서였다. 그 당시 수도교회는 사직터널 근처에 있었는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일반적인 교회들에서는 큰 십자가가 걸려 있는 강대상 가운데에 설치한 독특한 상징물이었다. 상징은 비스듬한 지게가 커다랗고 둥근 지구를 지고 있는 형상이었다.
보는 순간 가슴과 머리가 동시에 활짝 열리는 느낌이었다. ‘아, 교회는 세상을 향해 이런 자세여야 하는 거였구나!’
교인용 의자는 둥글게 놓여있었고 교인들은 다리를 꼬기도 하며 편안한 모습이었다. 목회자이신 문동환 목사님은 그중 한 의자에 앉아서 설교하셨고, 양복 속에 어두운 붉은 색의 남방셔츠를 입으셨는데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수도교회에서 설교 중인 문동환 목사. 뒤에 십자가와 함께 살아 움직이는 교회 상징으로 십자가 형상이 보이고 그 밑에 세상의 문제를 짊어지는 지게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의미하는 상징이 있다. (1969)
군부독재에 맞선 투사
▶투사, 지식인, 목사, 민중신학자
문동환 교수님의 겹치는 이미지는 먼저 박정희, 전두환 등의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시던 투사의 모습이다. 그로 인해 교수님은 여러 번 투옥되셨고, 그것은 내가 수도교회에서 보았던 ‘세상을 지고 가는 지게’를 떠오르게 했다.
“감옥에 계셨으면 강의를 듣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스승이에요?”라고 묻는 이가 있다면 “우리에겐 그 모습이 살아있는 강의였어요.”라고 답할 것이다. 교수님 자신이 고통받으셨을뿐더러 가족들이 받아야 했던 어려움도 심각했다. 당장 먹고살 일이 문제로 닥쳐왔다.
▲ 두레방
미군과 사실혼 여성, 아이들에 관심
▶생활전선에서 문혜림이 만난 여성들
문혜림 선생님은 전공을 살려 생활전선에 나섰다. 의정부시 고산동―동네에서는 한번 빠지게 되면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다는 뜻으로 ‘뺏벌’이라 불렀다―에 있는 미군부대 Camp Stanley에서 알코올 및 약물 중독 미군들을 상담하는 업무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바쁘게 살던 중, 어느 날부터 무언가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미군과 미국인 가족들은 상담을 통하여 어려움에 대한 지원을 받는데, 미군과 실혼 관계인 한국인 여성과 아이들은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 여성들이 기지촌 여성이었다는 이유로 말이다.
고민이 깊어지고 많은 생각을 한 후, 미국에서 자신이 속한 교단인 미국장로교총회에 자신을 한국 파견 선교사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였고, 미국장로교총회는 이에 응답하였다. 두레방을 시작할 수 있는 전세금을 마련해주었고, 한국파견 선교사 급여를 매달 지원하였다. 전세금은 여신도회 전국연합회에 위탁 기증하여 두레방 운영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김대중-이희호 부부도 축하
▶ 두레방 개관식
그렇게 두레방이 시작되었다. 현장실무자를 구하기 위해 인터뷰를 하고 의정부시 가능동 미2사단본부 Camp Red Clouds 근처에 600만원의 전세방을 얻었다. 두레방은 자그마한 방 1개와 부엌, 그리고 프로그램 방이 딸린 아담하고 소박한 장소였다. 1986년 3월의 개관식에는 많은 이들이 와서 축하해 주셨다.
문동환, 문혜림 내외와 친분이 두터운 김대중 선생님께서는 커다란 화분을 보내주셨고, 아내이신 이희
호 여사는 직접 와서 축하해 주셨다. 두레방의 집주인 아주머니께서는 “저분 혹시 이희호 여사 아니세요?” 나는 “네, 맞아요.” 집주인 아주머니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화환에 쓰인 붓글씨를 보시면서 “그럼 이 김대중이 그 김대중이에요?”라고 물으셨고 나는 “네, 그 김대중 맞아요.”라고 웃으며 대답해 드렸다. 고마운 것은 우리가 세 사는 동안 늘 불안해하면서도 한 번도 나가라거나 하는 불이익을 주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그동안 나는 대전에 있던 주소지를 두레방으로 옮겨 단독 세대주로 등록했고 그 방에서 살기 시작했다. 농촌운동을 하려면 농촌에 가서 농민으로, 노동운동을 하려면 공장에 가서 노동자로 살면 되었겠지만, 나는 기지촌 활동을 하려고 기지촌으로 오긴 했으나 스스로 기지촌 여성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렇다면 최소한 현장에서 살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출퇴근 대신 지역주민이 되기를 선택했다.
◇두레방 사무실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문혜림(1989)
기초 생활영어, 요리 등 가르쳐
▶ 두레방 프로그램
두레방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했다. 문 선생님의 전공을 살린 상담, 영어교실, 요리교실 등과 더불어 남편인 미군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한국어교실도 시도했다. 개점휴업 상태였긴 했지만 말이다. 어떤 미군도 한국인 아내를 위해 한국어를 배우려 하지 않았다.
한국인 여성들을 위한 영어교실은 늘 활기차고 웃음이 넘쳤다. 기초적 생활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선생님은 얇고 재미있는 회화책을 선택하셨다. 책 한 권을 뗄 때마다 우리는 책거리잔치라는 이름으로 흥미로운 프로그램들을 확장해 나가기도 했다.
뺏벌 윗쪽으로 물 맑은 계곡이 있었고, 우리는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요리 솜씨도 좋으신 문 선생님은 미국의 추석 명절인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에 칠면조를 굽고 대접하는 예절도 가르치셨는데, 미군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다.
◇1996년 9월, 두레방 10주년에 문혜림을 그리며 ‘두레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선물한 기념 액자
"기지촌 여성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근엄한 사람도 아니며
하나님의 뜻을 멋지게 설교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다만 이들과 함께할 수 있고 이들의 고통에 귀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가장 필요한 사람이지요.
문혜림 선생님을 그리며 두레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드립니다."
-구육년 구월 열이레-
이제야 그분들을 하늘로 보낸다
▶헤어짐
문동환 교수님은 고국으로 돌아와 딸 영미의 집에서 지내다가 2019년 3월 향년 98세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교수님이 돌아가신 후 2019년 여름 미국으로 떠나시는 문 선생님을 모시고 송별 예배를 드린 것이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많이 여위고 쇠약해진 선생님은 우리를 잘 못 알아보셨지만 해맑은 아기의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문혜림 선생님은 2022년 3월 뉴저지 막내딸 영혜의 집에서 향년 86세로 별세하셨다.
이제야 훠얼훨 하늘로 그대들을 보낸다.
문동환이여, 나의 스승이여.
문혜림이여, 나의 동지여.
안녕, 안녕….
※유복임
한신대학교 졸업 후 전도사 생활을 하다가 두레방 실무자가 되어 문혜림과 함께 두레방을 개척했다. 이후에도 다시함께센터 소장으로 성매매피해 여성들을 돕는 일을 했다.
월간문익환_<문동환·문혜림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