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문동환·문혜림 특집>
특별기고: 두레방 다큐 제작 박경태 감독 (2025년 8월호)
커피와 통일
두레방 20주년 기획 위해 미국서 인터뷰
기지촌 여성을 위한 현장 단체 두레방이 문을 연 지 스무 해가 되던 해였다. 20주년을 기획하며 두레방을 설립한 문혜림 선생님 인터뷰를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0년,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80~90년대의 두레방을 기억하는 활동가들은 모두 떠나고, 마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2000년대 두레방이었기 때문에 80년대의 이야기는 전설처럼 느껴졌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과거를 잇고 배울 만한 기록물조차 변변치 않았다. 이름 모를 사람들의 수많은 사진과 엽서, 빵 포장 스티커, 맥락 없이 뒤섞인 공문 파일이 전부였다. 두레방 소식지를 보며 이전 선배들의 활동을 머릿속에 그려 보고, 두레방의 활발했던 시절을 상상하는 것이 전부였다.
“커피 기대해도 좋아요”
그렇게 문혜림 선생님의 기억이 스무 해를 넘길 무렵 절실히 필요했던 것 같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한국 목사님의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으며 직접 운전을 해 주신 덕분에 나와 김동령 감독은 뉴욕에서 조금 떨어진 전형적인 베드타운, 그 소박한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진에서 보던 문혜림 선생님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선생님은 “커피 한잔할래요?”라고 물으셨고, 우리는 손사래를 치며 괜찮다고 머뭇거리자 크게 웃으시며 “저 한국 사람 잘 알아요, 커피 엄청 잘 만드니 기대해도 좋아요!”라는 말에 순간 긴장이 풀리며 웃음이 터져 버렸다.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비록 일주일의 짧은 미국 여정이었지만, 아메리카노가 흔하지 않았던 그때, 나는 온갖 생색을 내며 한국의 믹스커피와 결별하게 되었다.
◇지난 2005년 12월 문혜림 여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경태 감독. 촬영 김동령
“자네는 통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리고 작은방에 계신 문동환 목사님께 인사를 드렸다. 아마도 한국식 보료 같은 곳에 비스듬히 앉아 계셨는데, 나를 보자마자 단정히 앉으시며 처음 건넨건낸 말씀이 “그래서 자네는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였다.
‘통일’,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어... 해야겠죠.. 뭐.. 언젠가는...네..” 그 무렵 한국에서 통일에 관한 의식 조사가 있었는데, 신세대는 통일에 무관심하다는 통계가 신문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렇게 목사님의 진심 어린 걱정과, 그 걱정을 보태는 나의 답변을 뒤로하고 첫날 방문을 마쳤다.
기지촌 여성 돕겠다는 겸손한 마음 하나
그리고 둘째 날. 문혜림 선생님과의 인터뷰에서,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우선은 두레방 설립 이야기. 미국 장로회 펀드로 두레방을 설립했지만, 종교와는 무관하게 그저 기지촌 여성을 서로 돕겠다는 단순한 마음 하나. 그리고 두레방을 찾아온 기지촌 여성과 젊은 대학생들이 원하는 방향이 있다면 그에 따르는 겸손한 마음 하나. 그렇게 문혜림의 시작은, 비어 있는 큰 방에 사람들이 공평하게 옹기종기 모여 앉을 수 있도록 초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시간의 차이와 어떤 상실감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어쩌면 뒤죽박죽 시간여행을 한 사람이 겪는 멀미 같은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의 중심 미국에서 60년대 결혼이주한 한국. 그곳에서 목숨을 건 가족의 민주화 운동. 그리고 가속도가 붙은 한국의 80년대와 또 다른 장소인 기지촌. 이곳에서 만난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시간들과 관계 맺고, 다시 돌아온 미국의 90년대. 그곳에서 시작한 상담이란 것이 “어떤 진공청소기를 사야 할지 고민된다”는 말에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어지러웠던 이야기였다.
다행히 우리 같은 정착민에게 모든 것은 천천히 변해 간다. 하지만 문혜림 선생님은 가는 곳마다 공동체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가 겪은 시간은 그곳 사람들의 시간 속에 자신의 시간을 만들어 온 여정이었다. 결국 흔적은 남는다.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흔적도. 그렇게 단순한 마음은 그 위험한 여정 앞에 머뭇거리지 않았지만, 상실의 우울은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 2005년 두레방 다큐를 제작하면서 제작하면서 문혜림의 일상을 찍고 있는 박경태 감독. 촬영 김동령
문혜림의 ‘커피’와 문동환의 ‘통일’ 못잊어
그리고 우리는 문혜림, 문동환 선생님의 단골 쌀국숫집으로 향했다. 사실 지금은 흔하지만, 20년 전 처음 먹어 본 그 충격적인 맛있음에 기뻐하며 너무 게걸스럽게 먹었던 건 아닌지 하는 부끄러운 기억이 남아 있다. 그렇게 1986년에서 2005년의 20주년을 기념하고, 이제는 40주년을 앞둔 2025년에 문혜림 선생님이 타 주신 커피의 맛과 문동환 목사님의 통일에 대한 질문이 선명하게 남는 순간이다.
◇지난 2005년두레방 두레방 20년을 맞이해서 미국을 방문, 문동환-문혜림 부부를 인터뷰 하고 있는 박경태 감독. 부부의 단골 쌀국숫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촬영 김동령
※박경태 감독
동국대 사회학과 재학 중 영상운동에 뛰어들어, 기지촌을 다룬 <나와 부엉이>(2002)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미군 혼혈인과 재개발 지역을 조명한 <있다>(2006), <사당동 더하기 22>(2009) 등을 연출하며 사회적 약자에 주목해왔다. 김동령 감독과 함께 만든 <거미의 땅>(2012),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로 여성영화인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서울독립영화제 등에서 수상했다.
월간 문익환_<문동환·문혜림 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