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나와 늦봄>

이명식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고문 (2025년 7월호)

신혼집에 늦봄 하룻밤 모신 기억 잊을 수 없어

  
◇통일의집 다큐 ‘늦봄과 봄길의 보라색 대문’(2022)의 인터뷰에 응하는 이명식 고문. 오른쪽은 1987년 석방된 문 목사를 맞이하고 있는 이명식 민통련 조직국장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막내로 첫 만남

문익환 목사님을 모시게 되었던 것은 1984년 10월 민주통일국민회의(약칭 국민회의)가 창립되어 장충동 분도회관에 사무실을 내고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을 무렵입니다. 

목사님은 의장으로 전체 조직을 지도하셨고 저는 집행부의 막내로 심부름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국민회의에는 재야 어르신들과 동아투위, 조선투위 출신의 해직 언론인, 기타 노동계, 여성계 등 다양한 분야의 활동가들이 함께하는 민주화운동의 중추적인 조직이었습니다. 

 

강연료 봉투 뜯지도 않고 주시기도

목사님은 조직 내에서 가장 막내인 저에게 과분한 사랑과 관심을 주셨는데 어떤 때는 지방에 강연을 다녀오시면 강연료로 받아오신 봉투를 뜯지도 않고 주시기도 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 내부에 노선 투쟁이 심화하고 있었는데 저에게 학생운동과 연관이 계속되고 있는지, 학생들이 어떤 주제로 나뉘었는지 등에 관해 물었습니다. 저는 계급 문제를 더 중시하는 편과 민족문제를 중시하는 편이 나뉘었다고 답하자 목사님께서는 계급 문제 해결 없이 민족문제 해결 없고, 민족문제의 해결 없이는 계급 문제 극복은 불가능하다고 하시면서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갈등이라 하셨습니다.

 

방북 직전 결혼식 주례 서 주셔

목사님을 모시고 민주·통일 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했던 기억은 저의 청년 시절 가장 큰 보람이자 자랑이란 자부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1989년 방북 직전에 저 결혼식 주례를 서 주셨습니다. 평양에 다녀오셔서 감옥살이하시고 출소하신 이후에 전국을 다니며 방북 보고대회를 가졌습니다. 당시 저는 부산에서 신혼살림을 살고 있었는데 목사님은 부산 보고대회 이후에 부산의 인사들이 준비한 숙소를 사양하고 당신이 주례를 서 주었던 저의 신혼집에 잘 살고 있는지 가보아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목사님을 우리 집에 하룻밤 모셨던 것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이명식 고문은…
문익환 목사가 의장을 맡았던 민통련의 조직국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막내로 참여해서 늦봄을 물심양면 보필했다. 2018년 늦봄 탄생 100 주기를 맞아 통일의집을 복원할 때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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