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는 ‘빛은 어둠을 이기고야 만다’는 것을 믿었다
◇평양 숭실학교 시절의 문익환(왼쪽)과 윤동주. 서로 모자를 바꿔쓰고 찍은 사진이다.
늦봄은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은 책이 윤동주(동주)의 시집이라고 했다. 이렇게 말한 날이 1993년 9월, 별세 몇 개월 전이었으니, 그가 평생 동주의 시집을 가까이 두고 있었다는 말과 같다. ‘1980년 육군교도소에 수감 중일 때에도 감옥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죽어간 벗 윤동주의 시들을 새삼 읽어보고 싶어졌다’니, 동주와 그의 시는 늦봄이 위안과 힘을 얻은 원천이었다 할 것이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은 동주 시집
평생 동주의 시집을 끼고 살았기에, 동주 시의 감상이나 해석에 관한 한 늦봄이 어떤 연구자보다 더 정확하고 깊이가 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많이 읽었다는 이유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동주와 함께 자라며 공부했고 시대를 같이 산, 그를 아는 친구였다는 사실이다.
늦봄은 만주 신경 거리에서 일왕의 항복 선언을 듣다가 먼저 동주를 떠올렸다. ‘네가 살았으면 얼마나 좋아하랴’는 생각에 속으로 울었다.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스러진 친구 동주.
도쿄 동주 하숙방에서 만난 두 사람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건 1942년 9월쯤이다. 폐병에서 회복하여 공부하러 다시 도쿄로 간 늦봄은 동주의 하숙방을 찾아가 반갑게 만났다. 동주가 도시샤대학 편입을 위해 몽규가 있는 교토로 이사하기 직전이었다. 태평양전쟁 중인 도쿄, 유학생도 포함한 조선인 징병 계획까지 발표된 이후라 혼란스러웠을 시기에 만난 둘은 앞날을 걱정하며 심란한 마음을 나누지 않았을까?
◇연세대 윤동주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문익환의 ‘동주형의 추억’ 친필 원고.
약 2개월 전인 1942년 7월 동주는 여름 방학 중 용정에 귀향하여 보름간 머물렀다. 이때 늦봄도 용정에서 도쿄신학교로 복학할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보름 동안 두 사람은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도쿄신학교와 연전 문학부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된 이후부터 둘은 방학 중에만 만날 수 있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터놓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속 깊은 대화하기에 보름이란 시간이 오히려 짧았을지도 모른다.
“귀향 도중 경성에서 두 친구와 놀았어요”
◇‘경성서는 연전 동무 두 사람을 맛나서 몇 시간 놀았읍니다.’ 늦봄과 동주가 경성에서 만났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 문익환이 도쿄로 박용길에게 보낸 1941년 2월 편지다. 폐병으로 귀향 도중 경성에서 연전 동무 두 사람을 만났다고 적었다.
한편, 고향이 아닌 경성에서의 짧은 만남도 있었을 거로 추측해 본다. 1941년 2월, 늦봄이 폐병 치료를 위해 용정으로 귀향한 직후 도쿄의 봄길에게 쓴 편지에는, 귀향하던 중 ‘경성에서 연전 동무 두 사람을 만나 몇 시간을 놀았다’고 적은 대목이 있다. 연전에 유학 중이던 동무는 윤동주, 송몽규, 김정우 세 사람 정도였으니 아마도 두 사람 중에 동주가 있지 않았을까?
늦봄과 동주는 명동소학교와 몇 개의 중학교를 거친 10여 년을 함께 지냈다. 안중근이 권총 사격 연습을 했다는 이야기 등으로 민족 독립 의지를 몸으로 배운 시간, 그 속에서 둘은 ‘기독교와 유교를 민족애라는 용광로 속에서 완전히 녹여서 새로운 세계관, 인간상’을 가진 원숙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늦봄과 동주, 둘은 분명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다른 사람이었지만 또한 동일한 혼을 가진 유사한 사람이라 해도 괜찮지 않을까?
‘사람을 알고 시를 아는 것과 사람을 모르고 시를 아는 것, 어느 것이 좋을까?’ 이런 질문으로 시작한 늦봄의 글이 있다. 어떤 것이 맞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 질문을 놓고 우리의 현실을 돌아본다. 동주 시를 배울 때라면, 대개 우리는 몇 개의 시만 외우고, 또 몇 개의 한정된 단어와 연결해 배우고 있지 않은가? 서정성, 슬픔, 일제 저항, 민족시인 같은 단어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동주가 배운 것, 그의 행동, 걸어간 길, 동주가 언급하는 ‘시대’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은 채, 일반적 상식만을 바탕으로 그의 시를 겉핥기만 하였음을 반성한다. 다행히 늦봄의 몇 가지 글이 바른 길잡이 역할을 해주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주 시를 바라보니 기쁘기 그지없다. 이제야 동주의 시를 그의 삶과 함께 놓고 제대로 읽고 또 읽는다.
동주 시의 촛불, 등대는 ‘빛의 승리’를 상징
그러면 늦봄은 동주의 시를 어떻게 말했던가? 이 글에서는 눈에 띄는 한 가지만 찾아본다.
동주가 17세인 중학 3학년 때 쓴, 첫 시 「초 한 대」.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 나의 방에 풍긴 /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초 한 대」 4~5연)
「초 한 대」는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날 밤 쓰였는데,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하고 인류의 제단에 오른 어린 양 예수의 탄생을 생각하며 시를 썼다는 것이 늦봄의 생각이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는 요한복음의 말씀으로 역사를 보는 동주의 눈이 열렸던 것 아닐까라는 짐작까지 한다.
동주의 마지막 시 「쉽게 씌여진 시」.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쉽게 씌여진 시」 8~9연)
첫 시에선 촛불이, 마지막 시에는 등불이 등장한다. 늦봄은 이를 두고 ‘동주의 시 속에서 일관한 것은 빛의 승리’이고, 동주는 ‘어둠이 집채 같아도 팔랑이는 촛불에 밀려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가졌다고 했다. (『문익환 전집 6권』 수필. 「초 한 대」)
동주는 ‘조국 광복’과 ‘ 빛은 어둠을 이긴다’ 믿어
동주는 ‘아침이 쉬이 오는’ 것을 믿었다.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라며 백의민족의 결의를 읊었다. 마침내 그는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결의를 다졌다. 민족의 독립을 믿으며!
동주는 조국광복을 애타게 염원했다. 그러나 그는 염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국광복을 믿었다. 이것은 민족 얼이란 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이요, 빛은 어둠을 이기고야 만다는 것을 믿는 일이었다. (『문익환 전집 6권』 수필. 「하늘과 바람과 별의 시 」)
그 믿음은 동주의 믿음인 동시에 감옥을 10여 년 드나들던 때 늦봄의 믿음이기도 했다.
동주가 없는 문익환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민족정신과 기독교 신앙이 혼연일체가 된 그의 시 정신이 그가 자리를 비운 이 역사를 살아가도록 늘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빌면서 지난 46년을 살아온 셈입니다. (옥중 편지 1990. 6. 1)
21세기 한국에서 동주가 바라던 광복은?
21세기 한국에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노래가 계속 울려 퍼지는 현실, 80년 전에 동주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동주가 바라던 광복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던 늦봄의 옥중 절규가 동주 80주기, 광복 80년에 더욱 귓전에 울린다.
<글: 조만석>
<참고문헌>
문익환 (1999) 『문익환 전집』. 사계절출판사
◇늦봄 서재의 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 옆에 늦봄이 번역한 『릴케 기도시선』이 있다. 늦봄과 동주는, 도쿄와 경성 유학 시절, 방학 때 고향에서 만나 키르케고르와 릴케를 놓고 이야기하곤 했다.
월간 문익환_<늦봄의 말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