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이달의 사건>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발표, 1989년 3월 25일 방북 (2024년 3월호)

민주와 통일을 막아선 벽을 뚫다

 
 
 
◇ 3·1민주구국선언 사건 구속자 가족들의 시위. 보라색 한복에 ‘민주인사 석방하라’고 쓴 부채를 들고 있다. 
 

선언문 작성자로 22개월 징역살이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발표
1976년 3월 1일, 문익환 목사는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은, 이 나라가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하고, 경제 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하며, 민족 통일은 이 겨레가 짊어진 지상의 과업임을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유신헌법 비판과 긴급조치 철폐 주장을 담고 있었다. 윤보선, 김대중 등 재야인사 10명이 성명서에 서명했고, 관련자 18명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어 재판받았다. 서명자는 아니었지만, 작성자인 문 목사는 22개월의 징역살이 후 석방되었다.

1974년~75년에 걸쳐 유신헌법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과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태 등에서 민의가 무엇인지 나타나고 있었지만, 유신정권은 75년 5월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여 국민의 눈과 귀와 입을 완전히 틀어막고자 했다. 문 목사는 75년 4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집행과 김상진 군 할복자살로 큰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8월 장준하의 죽음을 보게 되자 그가 못다 한 일을 이어받겠다고 결심했다. 그 결과 다음 해 3월 1일 민주구국선언을 작성, 명동성당 삼일절 기념 미사에서 이우정 교수가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유신정권 시기 최대의 반정부 선언이었던 3·1민주구국선언은 반독재투쟁의 불씨가 되어, 다음 해 3월 재야인사들의 민주구국헌장 발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77선언, 언론인들의 자유언론 실천 선언 등으로 이어졌다.

 

4·2남북공동성명 발표

▶1989년 3월 25일 방북
한편,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했다. 4월 3일까지 10일간의 방북 기간 중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회담했고,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4·2남북공동성명을 내놓았다.

1988년 6월 남북학생예비회담을 하려던 청년·학생들의 판문점행이 저지당하고, 곧이어 발표된 노태우 정부의 7·7선언에도 불구하고 전민련의 판문점행도 무산되자, 문 목사는 통일의 물꼬를 트고자 방북을 결심했다. 89년 새해를 맞는 새벽 ‘잠꼬대 아닌 잠꼬대’ 시를 쓰며 반드시 평양으로 가고 말겠다는 결의를 보인 그는, 정경모-유원호와 동행하여 방북한 후 4월 13일 귀국했다.

문 목사의 방북은 국내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정부 당국은 공안 정국을 조성하며 통일운동을 탄압했고, 재야에서조차 여러 가지 부정적 영향을 내세워 그의 방북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방북으로 민간의 통일운동 확산은 물론이고, 남북한 당국자 회담과 91년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 남북 간 화해와 관계 진전에도 매우 큰 영향을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3월, 문익환 목사는 민주와 통일을 막아선 거대한 벽을 뚫고 길을 만들어 나간 것이다.


◇ 3·1민주구국선언 사건 구속자 가족들의 시위. 보라색 한복에 ‘민주인사 석방하라’고 쓴 부채를 들고 있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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