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성서 번역 곽노순 목사(1) (2024년 2월호)

“문익환은 ‘순수’ 그 자체”
100% 순수를 지닌 어린아이가 늙어서까지 순수 지킨 유일한 케이스

 
💌 편집장의 커버스토리
한신대 교수시절 문익환 목사는 ‘깐깐하기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모두가 기피하는 그의 히브리어 수업을 유일하게 신청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바로 『월간 문익환』 2월호의 주인공 곽노순 목사입니다. 만만찮게 ‘깐깐했던’ 물리학과 전공생은, 신학을 공부하러 한신대에 와서 혼자 늦봄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1대1 수업임에도 출석일수를 놓고 티격태격할 정도로 ‘깐깐했던’ 둘은 얼마 후 성서번역을 함께 하게 됩니다. ‘동료’가 된 후에도 3개월을 매일 다투던 두 사람은 서서히 서로에게 물들어가며 의형제 같은 ‘동지’가 됩니다. “문 목사님을 한 마디로 얘기하면 ‘순수’ 그 자체야. 100% 순수를 지닌 어린아이가 늙어서까지 순수를 지킨 유일한 케이스야”. 이 한 문장으로 늦봄을 정의한 곽 목사. 그에게 늦봄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곽노순 목사를 찾아 뵈었다. 그는 문익환 목사의 한신대 제자였고, 문 목사의 성서 번역 시기에는 쌍둥이 같은 존재로 4년을 함께 했다. 곽 목사가 거주하는 아파트는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동네에 있었다. 지세가 좋다는 말씀을 드리니 아파트 뒷산의 기운을 받아 건강하다며 웃으셨다. 미리 준비한 『대한성서공회사』 책을 내놓고 성서 번역 시절의 사진들을 보여주며 문 목사와 선종완 신부를 회고한 그는, 월간 문익환 발행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내가 못 한 일을 여러분이 하니 내가 참 부끄럽구먼”이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문 목사님을 ‘순수함’으로 설명한 말씀이 깊이 다가왔다.
 
 

 문익환 목사와의 스승-제자 인연 

 

학생이 나 하나… 1:1로 수업

▶문 목사님의 제자이시죠?
태곳적 이야기인데, 내가 이공대학을 졸업하고 신학이 뭔지도 모르고 갔지. 문 목사님이 구약 전공으로 프린스턴 석사 마치고 오셔서 가르치는데 학점을 얼마나 안 주는지 학생들이 수강 신청을 안 해요. 그래서 학생이 나 하나야. 그때 김재준 이사장님 있을 때인데 수강생이 한 명뿐이더라도 과목이 유지되도록 했으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신약은 희랍어로 구약은 히브리어로 배운다는 그 원칙에 따라 신청했지. 당시에는 교수와 학생이 사택에 함께 생활하고 있었어. 강의실 갈 것도 없이 문 목사님 사택에 가서 중국 차를 대접받으면서 히브리어를 가르침 받았지. 학생이 나 하나뿐이니 사랑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냥 전생의 인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지.

 

까다롭긴 문 목사와 내가 막상막하

분위기를 말하자면 문 목사님도 까다롭고 나도 까다로웠어. 학기가 끝났는데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어. 학교에 하루 더 와야 출석 일수가 맞는다고 그러셨어. 나는 원하는 만큼 넉넉히 배웠으니까 괜찮다고 대답했지. 나는 누구한테 수강하라 조언 받지도 않았고, 학점 안 준다는 것 상관없이 내 필요에 따라 신청했고, 또 내가 원할 때 배우고, 원치 않으면 딴 데 가고 했지(결석). 학생이 한 명인데도 하루 더 오라는 말씀에 그럴 필요 없다고 대답했으니 문 목사님이 충격이었나 봐. 서로 막상막하야, 농담 아니야.

 

문 목사 대신 학생들에 히브리어 강의

사실 난 다른 학생들과 비교할 게 아니지. 나처럼 대학을 마치고 다시 입학한 학생은 처음이었으니까. 내가 히브리어를 다 마스터했을 적에 문 목사님이 이집트 여행을 가시게 되었어. 썸머스쿨 때였는데, 나더러 학생들에게 히브리어 가르치라고 하신 거야. 내가 같은 반 학생들 가르치고 학점 줬어. 그렇게 아껴주신 학생은 나 하나밖에 없고…


▶강사료도 받으셨는지?
강의 끝나고 교무처에서 강사료 받으러 오라고 해서 갔지. 그런데, 비유해서 말하면, 1시간당 500원의 강의료를 학생에게 받았다면 내 강사비는 300원으로 쳐서 낮추더라고. 200원은 학교에서 떼먹는 거지. 그래서 내가, ‘학교는 학생들에게 500원만큼 가르치겠다 약속하고, 강의한 나한테는 300원만 주면 되느냐, 문 목사님이 돌아와서 나머지 200원어치 더 가르칠 거냐?’고 항의해서 500원을 다 받았지. 나는 수학을 전공했던 사람이라, 맞느냐 틀리느냐를 따지고 하는 사람이야. 나에게 이로우냐 불리하냐는 평생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공동번역 성서』 번역 시절 

 
◇ 한신대 건물 앞에 선 『공동번역 성서』 구약 번역팀의 문 목사와 곽 목사(당시 박사 과정 중 귀국)
 
 
◇ 곽 목사가, 자신이 보관 중인 『공동번역 성서』 번역 당시 3인의 사진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인사 갔더니 ‘당장 내일 와라’

▶성경 번역 참여 과정
내가 미국 하트포트신학대학원에서 박사 과정 1년을 보내고 한국에 쉬러 왔어. 문 목사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당장 내일부터 오라는 거야. 번역팀에 먼저 있던 사람이 이스라엘 유학을 하러 간다고 떠났대. 나이다 박사(미국성서공회 번역총무)의 번역 철학에 의하면 3명 이상 인원이 참여해야지 2명은 있을 수가 없어. 그러니 한 사람이 더 필요했던 거지. 나는 3명 있다는 걸로 알고 갔지만, 얼떨결에 거기 참여하게 되었어.

나는 성경 번역 전공이 아니지만 고고학과 성서언어학을 했으니, 나이다 박사가 보기에 내가 아주 적격이라는 거야. 번역을 하려면 그 부분의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 언어학 측면에서 형태론이나 의미론은 내가 1등이니까, 다니던 학교와는 1년 휴학 약속하고 참여했어. 그런데 나이다 박사가 총장에게 편지로 ‘We need him’이라 해서 4년간 번역 작업을 하게 된 것이지.

 

세 명 모두 빡빡, 처음 3개월 매일 싸움

▶성경 번역 과정에서 의견충돌은 없었는지?
번역에 참여한 처음 3개월간은 매일 싸웠어. 싸우는 게 원리 원칙이지. 천주교나 개신교가 아니라 히브리 텍스트를 갖고 싸우는 거거든. 셋이 빡빡한 게 똑같았어. 세 사람의 의견이 다르면 2대1이 되는데 ‘올드가이 대 영가이’, ‘기독교 대 천주교’, ‘남쪽 사람 대 북쪽 사람’의 형국이었지. 신약 번역팀은 8~9명이었지만, 구약 팀은 3명뿐이어서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도저히 일이 진행될 수 없었어. 그러니까 우리는 형제가 될 수밖에 없는 거야. 2대1로 만장일치가 안 되면 함께 목욕탕에 가곤 했지. 그리 지내다 보니 나중에 의형제처럼 됐지.

 

나중에 결국엔 의형제처럼

셋이 다 말수가 없지, 생각은 깊지, 천주교와 개신교 간 보이지 않는 벽이 있잖아. 그렇게 싸웠는데도 어느 방학 때에 정동 집으로 천주교에서 수녀님들 보내서 계란 99개를 보냈더라고. 그 정도로 서로 아껴 주었어. 셋이 점심 먹으러 가면, 선 신부가 연장자인데도 4년 동안 먼저 택시를 타는 법이 한 번도 없었어. 남을 먼저 태우셨지. 일관되게 겸손했어. 문 목사야 더 말할 것도 없고.

 
▶3개월 싸움 끝나고 잘 맞으셨나?
쌍둥이같이 잘 맞았지. 서로 존중하니까. 20년 차이 나이도, 출신지인 남북도, 개신교-천주교도 다 무너졌지. ‘에큐메니컬’이라는 거는 이렇게 한 프로젝트를 갖고 머리를 맞대야 하는 것이지, 우두머리들이 어떻게 해서 되는 게 아니야.
 
 
  ◇ 공동성서 번역 당시 일하는 선종완 신부(왼쪽)와 곽 목사(가운데). 
 
 

택시 줄 서서 한국인들 실제 말에 귀 쫑긋

▶세 분의 번역 스타일은 달랐나?
우리 작업 이전에는, 잘 된 번역은 희랍어 형용사 동사를 그대로 옮기는 것이었지. 그러나 우리 때에는 나이다 박사가 세운 번역 원칙이 있었어. 바울이 연설할 적에 청중에서 나온 반응이 우리 청중에게서도 나오게 해야 한다, 그거였지. 당연한 거지. 그래서 우리 셋이 점심 먹으러 갈 때 택시 기다리며 줄을 서는 동안에, ‘산 사람들이 한국어를 어떻게 하느냐’에 귀가 반짝했지. 들어보면 국어에서 배운 것과 전혀 다른 거야. 그걸 반영하려고 했지.
 
 

문, 선 두 분은 한국인 입에 맞는 번역이 꿈. 나는 서포터

문 목사와 선 신부 두 분은, 어떻게 하면 한국 국민 입에 맞는 번역을 해 줄까 하는 것이 젊었을 때부터 꿈이었지만, 나는 그냥 쉬러 왔다가 테크니컬 서포트만 한 거야. 석사 때 배운 Text criticism(본문 비평)과 박사 때 배운 고고학, 성서언어학으로 전문 지식만 제공한 것이었지.

제대로 된 번역이 없었을 때에 두 분은 사명감으로 번역 작업을 했지. 나는 사명감보다 주어진 일에 성실했을 뿐이었고. 우리 셋은 정치나 장사꾼처럼 이익이나 불이익을 따지는 거 하나도 없이 거의 학문대로만 한 양반들이야. 구교 신교 갈등도 없이 싸우지 않고 일했지. 
 
 ◇곽 목사가 선종완 신부와 문익환 목사에게 보낸 편지(1973. 9. 27)와 송별 기념 사진(1973. 9. 5, 선종완기념관 소장)
   
<글: 조만석>
 

[(2)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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