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

어느 여성 노동자 (2024년 1월호)

[늦봄과 ‘이 사람]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어느 여성 노동자의 절규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늦봄의 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읍니다> 원고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이것은 늦봄의 세 번째 시집의 이름인 동시에 시집에 실린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세 번째 시집은 1978년 4월경부터 1984년 6월까지 쓴 시를 엮은 책으로, 늦봄의 두 차례 수감(78~79년, 80~81년)을 포함한 시기에 쓴 시로 구성되었다.

 

바로 앞에 절벽을 맞선, 젊은 여성 가장

시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는 시집에 수록된 전체 59편 중 가장 대표적인 시로, 군부 독재가 서슬 퍼런 칼날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84년 초쯤에 쓰인 시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지만, 시의 내용은 가슴 아리는 절박함을 느끼게 한다. 지금보다 무려 40년 전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개인의 심정을 그려 냈지만, 현재를 사는 지금의 우리들 역시 이 여성의 심정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 주변의 누군가는 그때 그 상황과 유사한 처지에 내몰려 있을 테니까.

늦봄은 아마 전날 저녁 직접 들은 이야기를 시로 옮겨 적은 듯하다. 깁스를 한 채  까막소(감옥)에 있는 남편, 어린애 하나는 친정에, 다른 애는 시댁에 맡겨두고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 눈 깜빡할 새 손이 잘릴지도 모르니 한순간도 가족 걱정 같은 딴생각 해선 안 되는 여성. 그녀가 반의 반의 반의 반 발자국이라도 물러서게 되면 앞에 맞서 있는 열 키도 넘는 절벽이 무너져 버린단다. 그러면 진이도 순이도 아기 아빠도 모두 묻혀버린다. 그 절벽이 절벽이 아니라 차라리 칼날이거나 백 리 가시밭이거나 불길이거나 하면 좋겠다는 게 여성의 심정이라니.

 

맥박도 야윈 청계노조 미싱사 같은…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그녀가 악쓰는 것 없이 뱉은 말을 들은 늦봄은 약간 몸서리쳐지는 소리였다고 적었다. 시를 반복해 읽으며 이 젊은 여성의 심정을 헤아리다 보면, 이보다 14년 전쯤 전태일이 풀빵 사서 나눠주던 ‘공순이’들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청계천 피복 공장에서 죽음과 맞서 싸우는 / 미싱사들 시다들의 숨소리들아 /…/ 우리의 맥박도 야위어 병들어 가는 살갗도 / 허파도 염통도 발바닥의 무좀도 / 햇빛 하나 안 드는 이 방도 /…/ 똥오줌이 넘쳐 냄새나는 변소도 / 미싱도 가위도 자도 바늘도 실도 / 바늘에 찔려 피나는 손가락도 /…/ 무엇 하나 전태일 아닌 것이 없다 (시 「전태일」 중)
 
시 「전태일」은 83년 11월 전태일 13주기, 모란공원에서 늦봄이 쩌렁쩌렁하게 낭독한 시다. ‘전태일 아닌 것은 모두 가라’ 외치던 그때의 심정으로, 84년 초 늦봄은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를 써 내려갔을 것이란 추측도 하게 된다.

 

노동자 사랑과 실천이 늦봄 생의 전부

‘민주도 통일도 자주도 그 핵심은, 그 본질은 공순이, 공돌이가 대표하는 민중의 생존 자체라는 것을 뜻’한다고 규정했던 늦봄. 실제 20여 년 그의 활동 중 많은 시간이 노동자 속에서 이루어졌다. 청계노조와 이소선 어머니와는 20여 년을 함께 동지로서 행동했다. 동일방직과 YH무역 등 여성 노동자, 80년대의 해고노동자들, 그들의 몸부림을 외면하지 않았다. 경찰에 떼밀리고 두드려맞는 현장에 같이 앉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분신한 노동자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 숯검정이 몸을 껴안았고 피투성이가 된 주검도 감싸 안았다.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의 영정 앞에서 절규했다.
 
 
 ◇ 김경숙 열사 6주기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하는 문익환 목사
 
 

위로와 격려만! ‘방법은 그들이 안다’

그런데, 늦봄은 노동자들을 가르치거나 이끌어간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주고, 함께 외쳐주고, 위로하고 격려할 뿐이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어떤 자리에서 한 늦봄의 말이다.

‘K 박사! 노동자, 농민의 구원을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 노동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을 쟁취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당신이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들의 구원과 그것을 이루는 방법을 그들 이상 정확히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김형수 2018)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늦봄은 무엇보다 그들 노동자의 절박한 처지를 충분히 알아주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힘든 내색조차 하지 못하며 꾹꾹 참아 눌러야 하는 그들의 아픔을 헤아리고자 했다. ‘반 발자국도 내디딜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대신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여성 가장의 심중을 헤아린 것처럼, 항상 늦봄은 한 사람 한 사람 노동자의 심정을 깊이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런 자세는 늦봄의 양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양심이란 ‘아픔을 아는 마음’이 아닐까 싶군요. 그것은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끼는 마음이지요 … 남의 절망 앞에서 내 눈앞이 깜깜해져서 몸부림을 치는 마음이 양심인 거죠. (옥중편지 1987. 2. 20)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지키려 한 늦봄의 실천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굳이 비유해서 말한다면,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한 늦봄  
 

<글: 조만석>
 
<참고문헌>
김형수(2018). 『문익환 평전』. 파주. 다산책방
문익환 옥중 편지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문익환

나는 어제 저녁 정말 무서운 사람을 만났습니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서 이야기를 듣던 에비 장군보다도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을사년 흉년 때 어머니의 외할머니를 물어 간 백두산 호랑이보다도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눈물 많은 여자였습니다. 어린애가 둘이나 딸린 젊은 여자였습니다. 남편은 유리 조박에 다리가 찢겨 깁스라는 걸 한 채 병원에서 까막소라는 데 끌려가 있답니다
날마다 공장이라는 데 나가 일을 해야 하는 몸이라서 아이 하나는 친정에 보냈고 하나는 시댁에 맡겨 놓았답니다. 이 여인은 돌아갈 집마저 박살나 버린 셈입니다 밤이면 돌아가서 썰렁한 방에서 쿨쩍쿨쩍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잠드는 곳을 집이라고 할 수야 없지요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그 여자는 별로 악을 쓰지도 않고 이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호소하는 투도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껌껌한 동굴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같았습니다 약간 몸서리가 쳐지는 소리였습니다 
그 여자는 오늘도 내일도 공장에 가서 백안시당하면서 일을 해야 합니다. 시댁에 맡겨 둔 두살바기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친정에 갖다 둔 다섯 살짜리 장난꾸러기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깁스가 얼어 들어오면 얼마나 추울까
혼자선 변소 출입도 못 할 텐데
이런 생각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는 눈 깜빡할 사이에 손이 짤려 나갈지도 모르니까요
이렇게 그 여자는 반 발자욱도 뒤로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아니 반의 반의 반 발자욱도 뒤로 물러설 자리도 틈도 세상은 그 여자에게 주지 않습니다
반의 반의 반의 반 발자욱이라도 물러서는 순간 그 여자의 앞에 맞서 있는 열 키도 넘는 절벽이 무너지겠기 때문입니다. 그리 되면 순이도 진이도 애기 아빠도 무너지는 절벽에 묻히고 맙니다
그 절벽이 가슴에 섬찟 와닿는 칼날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칼끝이 가슴을 파고들어도 한 걸음이나마 앞으로 내디딜 수 있을 테니까요. 앞으로 꼬꾸라지며 피를 쏟고 죽을 수라도 있을 테니까요
그 절벽이 한 백 리쯤 뻗어 있는 가시밭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온몸이 찢겨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여나믄 자쯤이야 헤치고 나가다가 쓰러질 수라도 있을 테니까요 
그 절벽이 불길이라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 불길에 몸을 던져 순이를 부르며 진이를 부르며 훨훨 타오를 수라도 있을 테니까요
그 여자는 반 발자욱도 내디딜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다고 했을 뿐입니다
 
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