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나와 늦봄>

(주)에스에스라이트 조정필 대표이사 (2023년 12월호)

“정필이 만큼은 내가 꼭 주례를 서줘야지” 

목사님이 그렇게 약속하셨는데…부고 소식에 통곡

 
◇2023년 1월 모란공원에서 열린 문익환 목사 29기 추도식에 참석한 조정필 이사. 
 
 

교회 고등부 회장으로 설교자 늦봄 첫 대면

▲1984년 5월. 
전북 전주의 전주금암교회 고등부 회장이었던 저는 저녁 예배에 설교자로 초빙되었던 문익환 목사님을 처음 뵐 수 있었습니다. 광주민중학살 진상규명과 통일운동에 대한 설교는 2시간 넘게 이어졌고, 말씀을 듣는 모든 순간순간이 특별한 충격으로 와닿았습니다. 아마도 그 순간부터 목사님에 대한 존경과 신앙인으로서의 통일운동에 대한 신념이 싹튼 것 같습니다. 
 
 
◇ 젊은 대학생시절 조정필 이사(왼쪽 첫 번째 앉은 이)와 문익환 목사
 
 
학부에 들어가서 기장 학생운동 조직인 신학연구회(후일 KSCF로 전환) 일원으로 문익환 목사님과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특히 1988년  전주 고백교회에서 2박 3일간 통일맞이 수련회를 했는데 목사님과 숙식을 같이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완산칠봉(동학농민운동 격전지)공원에서 밤새 지칠 줄 모르고 강강술래를 하던 청년 같은 목사님의 열정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세뱃돈 5000원 때문에 국보법 위반 누명

▲1989년 4월 20일.
전북지역대학생협의회(전북학협) 투쟁위원장이었던 저는 문익환 목사님 평양 방문과 관련하여 구속반대 석방투쟁 시위를 준비하던 중 검거되어 공안합수부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사과정에서 수첩 한 줄 메모 탓에 어처구니없게도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이 씌워지게 되었지요. 1989년 1월 2일 당시 김대중 선생님 자택으로 전북학협 간부들이 신년 새배 하러 갔는데 학생들이 먼 길 왔다고 하시며 5천 원씩 주셨는데 너무 감사하여 수첩에 ‘김대중 선생님 신년 세배 5,000’이라고 메모를 했었죠. 그리고 한 달 뒤쯤인 2월 6일 문익환 목사님께 구정인사를 드리러 갔었고 역시 수첩에는 ‘문익환 목사님 구정인사’라고 메모했었지요. 이게 화근이 된 겁니다. 

공안합수부에서는 검거와 동시에 가택수색 과정에서 나온 저의 수첩을 보고 ‘조정필 군이 1989년 1월 2일 김대중 씨로부터 미화 5,000달러를 받아 2월 6일 문익환 목사에게 방북 자금으로 전달했다‘라고 시나리오를 만들어 저에게 자백을 강요하였습니다. 새뱃돈 5천원이 방북 자금 5천 달러가 된거지요. 그렇다 보니 국가보안법위반 조항도 제9조(편의제공)를 적용하게 된 겁니다. 보통은 제7조 찬양고무 정도인데 대단히 드물게 제9조를 적용한 사례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질 않습니다. 이후 6일간 공안합수부에 끌려다니며 고문은 당하지 않았지만 계속 잠을 못 자게 하고, 뺨을 맞고, 고막이 터지고, 입속에서는 찝찔한 피가 계속 입안으로 넘어가곤 했습니다. 그 악몽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민변이 출범하고 한승헌 변호사님이 직접 전주까지 내려오셔서 변호를 해주신 덕분에 국가보안법 9조는 빠질 수 있었습니다. 

 

황망한 부고에 한신대 달려가 통곡

▲1994년 1월.
“정필이 만큼은 내가 꼭 주례를 서줘야지.” 그렇게 굳게 약속하셨는데 황망한 부고를 접하고 한신대 교정으로 달려가 통곡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늦봄의 말씀을 지금도 나의 신념으로

▲2023년 12월.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요, 이는 자주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 그 말씀이 생활인으로, 기업인으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저에게 마음속 아주 작은 신념의 불꽃을 꺼지지 않게 하는 생명의 말씀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목사님.

 
조정필 (주)에스에스라이트 대표이사는 성실한 기업인으로 (사)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에서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여러 열사들의 생일, 기일을 기억하는 따뜻한 마음과, 평화를 위해 몸으로 뛰는 열정의 소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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