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

리영희 교수 (2023년 11월호)

[늦봄과 이 사람]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당신도 히죽 웃었군요. 이게 시대정신 아니겠습니까”

 
 
◇ 김신묵 권사 빈소를 찾아 문 목사와 이야기하는 리영희 교수 내외

 
1989년 7월 6일, 늦봄은 수감 중이었던 안양교도소에서 신문을 받아보았다. 1면 오른쪽에 리영희 교수의 모습이 크게 실려 있었다(🔗신문 보기). 포승줄에 묶인 채 호송버스에서 내려 법정에 출석하는 장면이었다. 기사에는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하고 환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늦봄은 이 장면을 즉시 시로 옮겼다. 그러나 리 교수의 표정에 신문과는 달리 다소 재미있는 표현을 붙였다. “당신도 히죽 웃었군요. 나보다도 더 히죽이”라고. 두 사람은 각각 ‘방북’과 ‘북한 취재 기획’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 하여 구속된 같은 입장이었기에, 늦봄이 리 교수의 심정을 정확히 읽어낸 결과 나온 표현이 바로 ‘히죽이’ 아닐지 생각된다. ‘히죽이’는 ‘만족스러운 듯이 슬쩍 한 번 웃는 모양’이라는 뜻이다. (‘비웃거나 비꼬는 태도로 슬며시 자꾸 웃는’ 모양을 뜻하기도 한다)

 히죽이 웃는 늦봄과 리 교수. 그 모습은 방북 행위나 북한 취재 기획이 죄가 아니라 누구라도 해야 할 올바른 길이었다는 떳떳한 마음에서 나오는 표정, 잘했다는 만족감에서 나오는 표정일 것이다. 늦봄은 ‘이게 시대정신 아니겠냐’고 규정했다.

 

늦봄 “우리가 한 일은 결국 시대정신”

리 교수의 표정을 모티브로 쓰게 된 이 시의 제목은 ‘시대정신’이다. 늦봄은 시를 쓰기 전 6월부터 시대정신을 계속 생각해 오던 중이었다. 정경모와 함께했던 평양 방문은 ‘태아가 머리로 골반을 밀고 나오는 걸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은 필연’으로 느낀다고 쓴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난 요새 시대정신이라는 걸 느껴요 … 학생들은 북으로 간다고 아우성이고,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기둥으로 치솟고, 황석영, 리영희 씨도 간다고 그러고, 나도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경모 형도 나와 같이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정경모 동생 정성모 장로에게 쓴 옥중편지. 1989. 6. 18)


늦봄은 방북을 결행하기 일주일 전, 리 교수에게 연락하여 만남을 제의했다. 통일에 대한 그의 전문적 식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의 연락이 없어 만나지 못하고 방북 길에 올랐지만, 당시 리 교수도 취재단을 이끌고 방북할 계획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북한 취재 계획을 하게 된 실마리가 무엇이든 그것 또한 시대정신의 발로라고 늦봄은 생각했다.

‘시대 정신’을 쓴 후 불과 20여 일 만에 늦봄은 리영희 교수를 다시 불러낸다. 짧은 시 ‘나는 옛 친구가 좋아’에서다. ‘자본주의가 권하는 새로운 친구 컴퓨터보다 옛 친구 리영희가 백 배나 좋다’고 직설적 표현을 하기에 이르렀다.

 

리 교수 글에 아연실색할 정도 감동

시대 정신을 공유하게 된, 좋은 옛 친구! 이처럼 두 편의 시에서 늦봄이 그에게 호감과 공감을 나타냈다면, 리 교수가 석방 후 쓴 글에 대해서는 감동과 찬사를 보냈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 늦봄이 그의 ‘글을 읽고는 그야말로 아연실색’했다고(옥중 편지. 1989. 10. 9) 적었으니 말이다.
 
늦봄을 놀라게 한 첫 번째 글은, 리 교수가 집행유예 선고로 9월 25일 풀려나 10월 8일 자 한겨레 논단에 논설고문 이름으로 실은 글이다. 그는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에 따른 검사(정부) 측 논리에 대해 14가지 항목의 의문점을 제기했다. 이 글에 아연실색했다는 늦봄의 감탄은 80여 일 후인 1월 1일 편지에서 더 명확히 추측할 수 있다.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 전문가의 글이 왜 좋을 수밖에 없느냐는 걸 깨닫게 해 줍니다. 국가보안법이 위헌이요, 반시대적인 억지라는 것을 어쩌면 그렇게 증거를 대가면서 설득력 있게 잘 설파해 주셨습니까? 그 글을 읽으면서 국가보안법은 대한민국의 치부라는 생각이 들어서 항소이유서에 그렇게 썼습니다. (옥중 편지 1990. 1. 1)

  

리 교수 “국가보안법 시대 끝내고 이성의 시대 열자”

늦봄이 놀란 두 번째 글은, 12월호 『사회와 사상』에 실린 「국가보안법 없는 시대를 90년과 함께 맞이하자」이다. 늦봄은 이 글을 시원히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며 아내에게 감상을 전했다.
 
80년대를 역사에 묻어버리고 90년대를 향해서 문을 열어야 하는 이 시점에서 너무너무 좋은 말을 했군요. 그는 이성의 시대가 와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이성의 시대인 동시에 상식의 시대가 와야 한다고 말하고 싶군요. (옥중 편지 1989. 11. 27)
 
리 교수의 글에 감동한 늦봄은 마침내 90년대를 맞는 첫 설날인 1월 1일에 그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앞서 두 개의 글을 잘 읽었다고 말한 이 편지에서는, 90년대에는 ‘이성의 시대’가 와야 한다는 논지에 크게 동의를 표하며, 이성과 도덕의 관계에 관한 늦봄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다음과 같이 짧게 요약해 본다.
 
‘사물에 대한 정상적=과학적=이성적 판단만이 우리 모두에게 큰 이익을 안겨줄 수 있다. 나만의 작은 이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큰 이익을 탐하는 것은 이성적인 일이고 도덕적 선이다. 그런데 이성적=도덕적 판단에만 그치고 나면 도덕적 선을 완성할 수 없다. 도덕적 선을 관철하려는 강한 의지 즉 도덕적인 의지를 갖춰야 한다.’

 

늦봄 “리 교수 생(生) 속에서 도덕적 의지 발견돼”

여기까지 말한 늦봄은 리영희 교수의 생에서 그 도덕적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며 존경과도 같은 마음을 나타냈다. 리 교수는 본인 구속 직전, 늦봄의 방북을 비난하는 소위 ‘언론‘기관과 기독교 교회 ‘지도자’들을 통렬히 비판했었다. 집행유예로 석방된 후에는 정교한 논리로 국가보안법의 허구성을 펼쳐나갔다. ‘국가보안법 시대를 끝내고 90년에는 이성의 시대를 열자’고 외친 리영희 교수. 늦봄이 보기에 그는 ‘이성적 판단에 그치지 않고 굳은 의지로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진정한 지식인이었다. 그를 향한 늦봄의 화답은 이것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지금 각성하는 이성의 시대, 도덕적인 자각이 눈을 뜨고 활활 타오르는 황홀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90년대를 소신껏 살아 봅시다. (옥중 편지 1990. 1. 1)
 
리 교수의 이성적 판단과 도덕적 의지, 늦봄이 보인 민중에 대한 긍정적 믿음과 행동이 지금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건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 편지
리영희 재단 🔗https://rheeyeunghui.or.kr/
 
 
◇ 제4회 늦봄 통일상을 수상한 리영희 교수 
 
 
◇ 문익환 목사 석방 후 자택에서 만나 반가워하는 리영희 교수(맨 뒤)  
 
 
시대 정신

문익환

리영희 선생
당신도 히죽 웃었군요
나보다도 더 히죽이
이게 시대정신 아니겠습니까
 
서울 떠나기 한 주일쯤 전일까요
저녁이나 같이하면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한 일 기억납니까
북쪽 가서 통일 이야기를 할 텐데
당신의 전문 지식이 아쉬웠던 겁니다
시간을 보아서 연락하겠다고 하시곤
아무 연락이 없어서
아쉬운 대로 떠나야 했습니다
그때 당신도 평양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당신이 북한 취재를 생각한 건 7·7 선언 때문이지
시대 정신이 아니었다고 하고 싶으신가요
천만에요
7·7 선언도 시대 정신의 표현인 걸요
<🔗1989. 7. 6.>
 
나는 옛친구가 좋아

문익환

관심 있는 친구
컴퓨터를 새로운 친구로 사귀라고
자본주의는 선전인데
어쩌리오 나는 옛친구가 좋은걸
리영희 옛친구가
백 배나 좋은걸
<🔗1989. 7. 25.>
 
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