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
노동운동가 조화순 목사 (2023년 10월호)
[늦봄과 ‘이 사람’]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그의 눈물 한 방울이,
천만년 금도 안 가던 절벽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 문익환 목사 석방 환영 모임에서의 조화순 목사(1993년 3월)
‘똥을 먹고 살 수는 없다’
1978년 9월 22일 금요일 저녁, 종로5가 기독교회관 강당.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 똥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외침을 담은 연극이 진행되고 있었다. 연극 막바지, ‘똥물을 퍼붓는’ 장면이 나오자 해고 노동자들은 복받치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밤 9시, 울음바다가 된 강당 밖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행진하러 나서자, 입구를 막아선 경찰은 곤봉을 마구 휘두르며 노동자들과 참석자들을 폭행하고 던지다시피 연행했다.
이 연극 자리에 문익환 목사(이하 늦봄)가 있었다. 늦봄은 전태일의 분신 이후부터 ‘공돌이’ ‘공순이’들의 생존권에 최우선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민주화운동에 직접 뛰어들자마자 구속되었던 그가 첫 번째 수감에서 풀려난 지 두 달이 채 안 된 1978년 2월에 접한 ‘동일방직 여성 노조원들에 대한 똥물 세례’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에 늦봄도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응원하고 힘을 보태고자 연극에 참석했다. 이날 경찰의 마구잡이 구타로 인해 늦봄은 타박상을 입었다.
동일방직에서 6개월간 여공 생활
연극 자리에 참석한 또 한 사람, 조화순 목사가 있었다. 그의 참석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1966년 동일방직에서 6개월간 공장 생활을 체험한 조 목사는, 인천산업선교회에서 일하면서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고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이들을 규합, 교육하며 활동했다. 그는 지역 여성 노동자들의 전적인 신뢰를 얻었고, 조 목사로부터 배운 노동자들은 배운 것들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조 목사는 산업선교 6년 만인 1972년, 단위노조에서는 전국 최초로 여성 지부장과 여성 간부들로 구성된 동일방직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똥물 세례와 124명 해고 탄압에 저항
동일방직 여공들이 작업환경 개선 등 성과를 거둘수록 지역 내 파급 효과에 겁먹은 관계 기관과 회사 측의 방해와 탄압은 심해졌다. 1976년 7월, 2대 여성 지부장 체제를 와해하려고 반대파 남성 노조원들이 집행부 불신임을 시도하자, 여성 노조원들은 남성들과 경찰의 접근을 막기 위해 겉옷을 벗어 던지고 속옷만 입은 채로 절규하며 저항하기도 했다. 1978년은 운명의 해였다. 2월 21일 개최하려던 대의원 대회에 회사 측과 남성 노동자들이 습격하여 똥물 세례를 퍼붓고 옷 속과 입으로 똥물을 넣는 만행을 저질렀다. 여공들은 근로자의날 기념식장 시위와 명동성당 단식 농성, 부활절 연합예배에서의 호소 등으로 대응했지만 4월 1일 124명이 해고되었고 이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어디에도 취업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해고 노동자들과 조화순 목사는 9월 22일 기독교회관에서 연극을 통해 똥물 만행을 알리고자 했고, 경찰은 무자비한 구타와 함께 노동자들을 연행해 갔다. 조화순 목사는 현장에서 경찰에 머리를 가격당해 실신하였다. 경찰은 연행한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며 그들의 배후 세력이 산업선교회의 조화순 목사임을 인정하라고 강요했다.
조 목사는 경찰과 중앙정보부가 감시하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인천지역 여성노동자들의 지도자였고, 노동자를 선동한 불법노동운동 혐의로 이미 한번 구속된 경력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난하고 약한 여성 노동자들에게 언니와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전적인 믿음을 받으며 든든한 응원자로 활동하고 있었고, 10년에 걸친 그의 희생적 선교활동이 밑거름되어 공장 환경의 개선과 노동자 권익은 하나둘씩 쟁취되어 왔다.
노동자를 향한 ‘미친 사랑’ 실천
똥물 세례 사건 후 벌어진 여공들의 시위, 단식 농성, 해고, 복직 투쟁 등을 지나면서 늦봄은, ‘예수’ 같은 조 목사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고, ‘나는 보았다’라는 제목으로 ‘조화순 목사에게 바치는 시’를 썼다.
자신의 사랑과 헌신으로 스스로를 자각하게 된 여성 노동자들이, 경찰과 회사 측에 무참히 짓밟히는 현장을 바라봐야 하는 조 목사. 늦봄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일 년 내내 기른 이파리들이 낙엽으로 뚝뚝 떨어져 발아래 짓밟히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외로운 미루나무 같았다. 피와 살에서 나오는 피눈물을 삼키고 또 삼키며 ‘노동자를 향한 미친 사랑’을 실천한 조 목사. 그가 삼키지 못한 한 방울 눈물이 마침내 천만년 금도 안 가던 절벽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늦봄은 이 땅의 작은 예수가 흘리는 눈물과 그 눈물 한 방울이 절벽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았다.
연극 사건 후 두 번째 구속
9월 연극 사건 후 11월 초, 조 목사는 동일방직 사태의 실상을 알리는 강연을 하다가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두 번째 구속이었다. 늦봄은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폭로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으로 인해 10월 13일 구속되었다. 14개월에 걸친 두 번째 옥살이의 시작이었다.
80년 봄, 늦봄과 함께 복직 투쟁 도와
유신체제의 종말로 79년 말 석방된 늦봄과 조 목사는 1980년 봄, 1978년에 못 이룬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해 함께 싸우기 시작했다. 3월 13일 기존의 긴급대책위를 ‘동일방직 해고 근로자 복직추진위원회’(위원장 문익환)로 바꾸면서 본격적인 투쟁에 들어갔다. 늦봄과 조 목사가 실질적인 협의를 하는 소위원회에 포함되었다. 이후 복직 서명운동과 행정 재판, 단식농성 시도 등을 펼치며 복직의 가능성까지도 보였으나, 5월을 지나며 모든 것은 중단되어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조 목사는 목회 활동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판단과 활동 기준은 항상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에 두었다고 고백했다. 그가 1966년 동일방직에서 고통스러운 여공의 삶을 시작하고부터 이후 여성 노동자들과 똑같은 처지에 발을 딛고 산 18년간의 삶을 알면 알수록, 그는 분명히 예수의 길을 따라 걸었던 것이라는 생각과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삶과 늦봄의 시를 함께 곰곰이 생각해 본다.
◇ 출판기념회에서 동일방직 해고 근로자들과 함께한 늦봄(1987년)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박민나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한겨레신문』 연재 기사. 2013년
한홍구 「유신과 오늘-도시산업선교회 마녀사냥」 『한겨레신문』 2013. 1. 18
빛타래 화순네 아카이브 http://hwasoon.net/
전태일 재단 http://www.chuntaeil.org/
민주화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https://archives.kdemo.or.kr/main
나는 보았다
- 조화순 목사에게 바치는 시
문익환
제 살과 피로
일년내 기르던 이파리들
뚝 뚝 떨어져
뒹굴며 짓밟히며 불려가는 걸
입술을 깨물고
보고만 있어야 하는
길가의 외로운 너 미루나무야
가슴 메어지는 나의 하늘아
핏줄 속을 거꾸로 흐르는 미친 사랑아
살 속 뼈 속에서 스며 나오는 피눈물
속으로 삼키다가 삼키다가
미처 못 삼킨 한 방울 눈물
안개처럼 번개처럼 네 눈을 스치는 걸
나는 보았다.
하늘이 천만년을 번개로 내리쳐도
금도 안 가던 절벽이 그 순간
와르륵 무너지는 걸
나는 보았다. |
* 늦봄은 셋째 시집 후기에서 <나는 보았다>를 78년 4월부터 80년 5월 사이에 쓴 것으로 분류해 놓았다. 시의 내용과 2차 수감 기간 등을 고려하면, 9월 연극 사건 직후에 쓴 것으로 가정해도 무리가 없지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쓴 시기가 이 시를 이해하는 데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고 본다.
◇ 조화순 목사의 책 『낮추고 사는 즐거움』에 실린 늦봄의 시
▶ 문익환과 조화순이 함께 자리한 장면들
#1. 1976년 1월 23일, 늦봄의 3.1민주구국선언 한 달 전, 원주 원동성당에서 인권과 민주 회복을 위한 기도회가 신·구교 합동으로 열렸다. 기도회에서 천주교 신부들과 개신교의 문익환, 조화순, 문동환, 함석헌, 조남동 등이 서명하여, 원주 선언이라 불리는 반유신 선언을 채택했다.
#2. 1983년 11월 13일, 전태일 13주기를 맞아 노동자들과 민주인사들이 모란공원에 모였다. 당국의 방해 공작을 뚫고 겨우 모란공원에 도착하여 추도식을 거행했다. 조화순 목사는 80년 이후 3년 동안의 상황과 자신의 나약함을 뼈아프게 반성하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눈물이나 흘리려고 왔다면 그런 추도식은 이제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이후 등장한 문익환 목사는 준비한 자작시 <전태일>을 낭독하며 벽력같은 고함으로 ‘전태일이 아닌 것들아, 다들 물러가라’고 외쳤다.
#3. 1987년 1월 17일, 박종철 고문 사망사건 직후 결성된 ‘고문 및 용공 조작 공동대책위원회’가 연 대책 회의에, 문익환, 조화순, 김상근 등 종교계 인사들이 야당, 재야 세력과 함께 참여하였다.
#4. 1989년 3월 1일, 조화순 목사가 시무하고 있던 시흥 달월교회에서, 문익환 목사는 시흥· 안산 지역 기독청년협의회가 주최한 3.1절 강연회에서 강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