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나와 늦봄>
‘아카이브센터’ 정혜지 센터장 (2023년 10월호)
아카이브에서 만난 늦봄, 기록에 스며들다
사람과 사회의 정수가 바로 아카이브라고 생각합니다. 아카이브가 담고 있는 정보로 지식을 쌓고, 자신을 확인하고, 더 나은 세상을 발견하고, 서로의 아카이브를 넘나들며 지혜로운 사회와 건강한 생태계를 이루어 나가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아카이브 시스템을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 <1987> 세 번이나 관람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에서 오래 살았고 무교이며 90년대생인 저에게는, 문익환 목사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경험할 시간과 기회가 적었어요. 그러던 어느 해 영화 <1987>을 세 번이나 관람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비록 제가 태어나기 전 역사를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2016년 서울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저의 순간과 오버랩되는 장면이 많아서였습니다.(물론 87년이 더 ‘매운맛’이었지만요)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그날 서울시청 광장에서 연설하는 문익환 목사님 모습이 나옵니다. 민주화를 이루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의 이름 한 자 한 자를 목 놓아 부르는 그 모습이요. 이미 유명한 분이었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 만났던 문익환 목사님은 제겐 좀 특별하게 여겨졌어요.
아카이브를 통해 늦봄을 만났습니다.
2020년 봄, 제가 일했던 회사 내 연구소로 발령이 나면서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연구소에 발령날 당시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는 막 분류체계를 구축하고 디지털화 한 일부 기록물을 업로드하기 시작한 단계였습니다. 옥중서신과 사진첩이 많았고, 옥중서신이 정리되면서 단행본 <사랑의 기록가 박용길>이 탄생하게 된 즈음이었죠. 업무를 하기 위해 문익환 아카이브를 찬찬히 둘러보아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옥중서신과 사진들, 다양한 사료를 살펴보게 되었고,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의 의미, 또 기록정보의 논리적인 구조와 운영방식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과연 승자의 기록일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역사와 선사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문자의 유무입니다. 문자를 통해 우리는 인간사의 일면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게 되었죠. 문자와 정보가 권력의 도구이자 상징이던 시절에는 그래서 권력을 가진 자만이 자신의 역사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역사의 뒤안길에 스러져 간 이름 없는 자들의 기억은 문자로 남지 않았기 때문에 정보화가 되지 못했고 그렇게 기억 속에만 살다 휘발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문맹률은 1%에 그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보는 권력의 도구입니다. 옛날엔 정보의 양이 관건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정보의 질과 신뢰도가 권력의 규모를 좌우하겠지요. 그렇기에 아카이브는 만들어져야 합니다. 아카이브는 기본적으로 특정한 주제와 활동에 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공유하는 조직체라고 합니다. 정보가 얼마나 믿을만한지에 따라서 아카이브에 대한 신뢰도도 달라지고, 파급효과도 생깁니다. 신뢰할 만한 아카이브를 만들기 위해서는 누락되거나 오기재하는 정보 없이 꼼꼼히 전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키비스트는 기록의 무결성과 신뢰성을 지키는 여러 작업들을 합니다. 아키비스트에 의해 잘 정리된 역사는 사라질 뻔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정보화한 지식자원이 되겠지요.
◇ '아카이브의 힘'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는 정혜지 센터장
아키비스트의 사명감은 민주시민의 태도와 닮았다
요즘엔 이런 아키비스트의 사명감이 민주시민의 태도와 참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 민주시민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태도,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삶의 태도와 주인의식, 관용의 정신, 법과 규칙을 준수하는 태도, 공동체 의식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네요. (출처: 한겨레 온, <학교가 기르겠다는 ‘민주시민’이란 어떤 사람인가?>, 2022.08.17) 이 중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삶의 태도와 주인의식”이라는 정의가 눈에 띕니다. 자신의 역사에 주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기록하는 사람. 그래서 결국엔 역사가 우리를 기억하도록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사람. 민주시민의 아키비스트적 면모는 아닐까요?
“기록한 자가 역사의 승자”
그래서 저는 ‘기록한 자가 역사의 승자’라고 생각합니다. 자신과 공동체의 삶과 기억을 전달하는 기록 전달자가 역사의 중심과 선두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작은 삶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서, 내 기억이 기록이 되어 어떤 가치를 갖게 될지를 고민하면서요. 그렇기에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는 ‘기록한 자로서 역사의 승자’에 대한 모범적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암담했던 침묵의 시대에 누군가 할 말을 했다는 기록이라도 후세를 위해서 남기자”고 했던 문익환 목사님께서 바라던 민주시민의 가치를 실현한 장소이자, 시대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장소, 또 서로를 사랑하고 걱정하고 의기투합했던 문익환 목사님의 민주시민으로서의 삶을 전하는 장소가 되었으니까요.
※ 정혜지 센터장은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의 구축 및 운영을 지원해주고 있는 '아카이브 센터(주)'에서 일하고 있다. 아카이브 콘텐츠 <월간 문익환>의 애독자이며, 늦봄의 기록이 이용자에게 잘 전달되도록 아카이브 운영에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든든한 조력자이다.
월간 문익환_<나와 늦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