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이야기

문목사 단식에 관한 미 국무성의 입장을 다룬 신문기사

오늘은 우연히 발견한 짧은 뉴스 조각 하나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통일의 집에는 신문을 오려서 잘 모아놓은 자료들이 많이 남겨져 있습니다. 사진 속의 뉴스 기사처럼 원래는 어딘가에 잘 모아져있었을테지만 시간이 오래되어 조각만 어딘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경우도 많이 있지요. 

 

다행히 이 기사에는 메모가 남겨져 있지만 그것 조차 없는 것들도 꽤 있습니다. 기사 옆에 적혀있는 단서를 참고하며 읽어 내려가다 보니 뉴스 조각 안에는 꽤 흥미로운 사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뉴스 기사의 제목은 "문목사 단식에 국무성 관심표명 8순 노모는 급거 한국으로 나가" 로 육필로 메모해 놓은 정보에 따르면 이 기사는 미국 재미교포 단체가 발생하는 『신한민보』 1977년 6월 9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기사는 문익환 목사의 단식 소식과 아울러 미 국무성의 정례 기자회견 자리에서 한 기자가 했던 질문에 관한 국무성의 반응을 전하고 있습니다. 

 

"7일 미국무성 대변인 호딩 카터씨는 국무성이 문익환 목사의 단식 투쟁사건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하고 우리들은 잘 알려져 있는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이 포함되어 있는 명동사건(3.1민주구국선언사건) 관련자들의 복지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을 여러번이나 한국정부에 전달한 바 있다고 밝혔다"

 

바로, 문익환 목사로 하여금 첫 감옥생활을 시작하게 했던 민주구국사건과 전주교도소에서의 옥중 단식이 당시 미 국무성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는 이야기네요.

 

기사에 등장한 노모는 김신묵 여사로 이때 단식중인 아들을 만나러 자그만치 서른 여섯 시간의 비행기 여행을 견디고 아침 첫 차로 문익환 목사가 있는 전주교도소를 찾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그 후 문익환 목사는 21일간의 단식을 마쳤다고 하지요. 

 

 

※ 이 콘텐츠와 관련된 다른 사료

 

 

  • 문익환 목사의 단식에 관한 더 많은 사연이 궁금하시면 큰 아들이 작성한 "단식기"를 읽어보세요. 6월 1일부터 8일까지 단식의 상황을 잘 서술하고 있습니다. 
  • 또, 옥중 편지, 1977년 6월 10일자를 보시면 옥중 단식을 마치고 쓴 문익환 목사의 소회와 시, "나의 첫 기도"도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