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정도상 작가(1) 전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위원회 상임이사 (2023년 9월호)

나만 보면 “저기 ‘국어사전’ 온다” 
만날때마다 ‘겨레말큰사전’ 사업 강조…별명 처럼 불러

 
“조성만 열사 어머니의 양말을 벗기고 발가락 사이를 주물러주셨어요. 강단 위에선 불같은 목사님이지만 내려오시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죠.”
‘청년’ 정도상에게 늦봄은 흠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자 던 늦봄은 어느 날 기약 없이 훌쩍 먼 길을 떠났고, ‘청년’은 그 상실감을 못 이겨 7년이란 긴 시간을 방황했습니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 어느 뜨거운 여름, 정도상 작가는 『걸어서라도 갈 테야』라는 늦봄의 책을 넘기다 ‘남북공동국어사전’이란 한 문장에 제대로 꽂힙니다. 그리고 늦봄의 꿈을 꼭 이루어 내리라 다짐합니다. 바로 <겨레말큰사전>이 시작되던 순간입니다.
『월간 문익환』은 전북 익산에서 정도상 작가를 만났습니다. <겨레말 큰사전>과 그 뒤안에 담긴 늦봄의 뜻을 생각해 봅니다. <편집장> 
 
 
◇전라북도 익산시의 자택에서 반려견 ‘새봄’이와 함께 밝게 웃고 있는 정도상 작가.
 
 
지난 6월 28일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에서 <미리 만나는 겨레말 작은사전>을 출간했다. 산파역을 맡은 주역은 바로 정도상 작가. 태어난 곳은 경남 함양이지만 서울에서 고교를 마친 후에는 호남 지역에 관심을 두고 작품 활동을 시작한 <월간문익환> 9월호의 주인공이다. 5년 전 정착한 삶터도 전북 익산이다. 꽃나무와 잔디를 잘 가꾼, 한옥 같은 집에서 그를 닮은 반려견 ‘새봄’이와 함께 우리를 맞았다. 그는 겨레말큰사전에 얽힌 이야기와,  현장에서  발 벗고 뛰어왔던 소중한 경험들을 풀어놓았다. 
 
 
◇지난 6월 28일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에서 출간한 <미리 만나는 겨레말 작은사전>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문익환 목사님과의 인연 

서울 가서 통일의 집 방문해 인사드려

▶목사님과 통일맞이를 알게 된 것은?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했어요. 매년 5월이 되면 문 목사님을 초대해서 이야기 듣고 하잖아요. 저는 서울로 가서 통일의 집을 방문하여 인사드리고 목사님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과 가까워졌고, 특별히 범민족대회 같은 행사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목사님의 연설문 작성도 했어요. 목사님은 절대로 써 드린 대로 하시지 않았지만, 자료는 만들어 드려야 했죠. 당시에는 한글2.5 시대라서 컴퓨터가 꺼지고 글을 날려버리는 등 글쓰기가 불편했던 시절이어서 고생도 좀 했었죠.
 
 

조성만 열사 장례식 준비하며 가까워져

조성만 열사가 전주 사람이었죠. 장례식 때 전주에 와서 노제를 지냈어요. 그 준비를 제가 했는데 이때 목사님과 더 가까워졌습니다. 전주 시내 도로 전체를 학생들이 메워주고 시민들이 합세하여 노제를 잘 치렀어요. 그 후 목사님이 강연 등으로 전주 오시면 반드시 조성만 부모님을 찾아뵈었는데 제가 항상 목사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조성만 어머니 발가락 주물러주시는 모습 감동

목사님은 조성만 어머니의 양말을 벗겨 발가락 사이사이를 주물러 주셨어요. 파스 요법으로 아픈 곳을 치료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파스가 어느 부위에 어떻게 좋은지 일일이 설명하시는 모습이나 장례식에서 조사하시는 모습 등을 보고 많이 감동했어요. 강단에서는 포효하는 모습이지만 내려오면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시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함께 일하자 하시던 늦봄, 몇 달 후 별세

목사님의 방북과 석방 이후 통일맞이를 만들 때 어느 날 저를 불러서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 같이 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몇 달 안 돼서 별세하셨어요. (정 작가는 이 무렵부터 약 7년간, 과거를 돌아보며 방황과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도법 스님을 만나 실상사에서 1년을 지내기도 했다. 생명 평화 순례를 제안해서 시작했다고 한다.)
 
 

 통일맞이와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 

돈 없어 사무실을 연립주택 옥탑방에

▶통일맞이에서 하신 일은?
그 방황 끝에 40살이 되는 날 아침, 문득 생각했어요. 이제 내가 다시 대중운동에 복귀해도 각박해지지 않겠다고. 2000년 6.15공동선언이 있던 해에 선배로부터 소개받아 통일맞이 사무처장이 되었습니다. 통일맞이는 재정이 어려웠고 일이 잘 되어가는 편이 아니었어요. 강원도 고성에서 강화도까지 평화통일대행진을 두 번 진행했고요. 돈이 없으니 사무실도 자주 옮겨 다녔는데 신길동의 연립주택 옥탑방까지 갔습니다.

  

눈에 띈 한 문장 ‘남북공동국어사전’  

▶겨레말큰사전을 시작한 계기는?
뜨거운 여름이었는데 목사님의 책을 봤어요. ‘걸어서라도 갈 테야’였습니다. 책을 쭉 넘겨보는데 눈에 띄는 한 문장을 발견했죠. 김일성 주석에게 남북 공동 국어사전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김 주석이 수락했다고. 자세한 내용은 없고 이 한 문장이 딱 끝이었어요. 내가 이 사업을 받아야 하겠다고 생각했죠. 통일맞이 사무처장으로 활동에 복귀한 후, 그곳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목사님 관련 사업은 남북 공동 국어사전을 만드는 일이라 자각하고 뛰어들었습니다.
 
◇ 김 주석에게 『우리말 갈래사전』을 선물하며 설명하는 문익환 목사(좌)와 책 『우리말 갈래사전』(박용수, 1989)(우)

 
남북 공동 행사를 할 때마다 공동 보도문이나 성명서를 쓰는 등 실무진으로 참여를 계속했지만, 통일맞이 이름으로 사업 신청을 하면 통일부나 국정원에서 방북 승인을 해주지 않았어요. 2003년에야 문익환 평전을 쓰기 위해 취재하러 간다는 점을 설득해서 마침내 승인받았죠. 
 
 
  

마주할 때마다 북측인사들 설득

북한 측에는 2000년 이후 접촉 때마다 사전 편찬이 문 목사와 김 주석이 약속한 사업이라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오죽하면 북한 측이 저만 보면 “저기 국어사전 온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이야기를 꺼낸 지 2년이 지나서 2003년에야 통일맞이 이름으로 방북하게 되자, 북한의 6.15공동선언실천북측위원회 상임대표에게도 남북공동 사전을 편찬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이후 박용길 장로님이 김정일 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내시도록 장로님께 초안을 드렸죠. 친필로 쓰셨어요.
  
 

북측의 목사님 신뢰 위에 개인적 신뢰 쌓아 성사

▶편찬사업이 성사되기까지
편찬 사업이 성사된 것은 문 목사님에 대한 북한의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진실성을 그들이 아는 거예요. 제가 금강산을 방문했을 때도 통일맞이 이름을 보고 “문 목사님 단체입니까”라고 물으면서, 낙지와 술을 제공하는 등 호의적 대우를 해주었죠. 문 목사님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이해나 신뢰가 어마어마했던 것 같아요. 피부로 느꼈습니다. 저에 대한 조사도 미리 했는지 인민학습당에 가니까 제 책이 세 권이나 나와 있었어요. 저 사람은 뭔 일을 해도 사기를 치지 않을 거라고 신뢰하게 된 것 같았어요. 이런 것들이 사업 진행에 도움이 되었겠죠.

2004년 3월, 문 목사님 방북 15주기 추모 세미나를 연길에서 했는데, 북한 민화협과 남쪽 통일맞이, 한신대학교가 만나서 마침내 남북 공동 국어사전으로서 ‘겨레말큰사전’에 대한 최초의 합의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표준어와 문화어를 넘어 ‘겨레말’

▶큰사전 편찬이 갖는 의의는?
우리는 국어를 말할 때 표준어라는 용어를 쓰는데 북한은 문화어라고 합니다. 공동사전을 만들려면 이 명칭이 문제가 되죠. 그래서 중국과 타 국가에서 사용하는 보통어의 개념을 생각해 봤는데 남북 보통 국어사전이라고 부를 수 없겠더라고요. 작가로서 고민해 본 끝에 겨레말이라는 게 떠올랐습니다. 남북 학자들 간 많은 협의 끝에, ‘우리 민족이 사용하는 보통의 입말’이라는 의미를 담아 겨레말이라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 우리 민족이 가진 사전은 모두 분단 사전이에요. 표준국어대사전은 대한민국 정부가 만든 사전이고 조선말대사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만든 사전이죠. 한글 창제 후 이 영토 안에서 한반도 전체 언어 영토를 반영하는 사전은 없었어요. 겨레말큰사전은 최초로 남북과 해외 지역의 어휘까지 다 조사해서 올라가는 우리 민족 최초의 국어사전이 되는 겁니다. 언어사적으로, 최초의 보통어 사전이라는 것, 전 민족 언어 영토의 최초 사전이라는 것, 2가지 의의가 있는 거죠. 
  
◇임시 제본된 10권의 겨레말큰사전. 남북한 사전의 공통 단어 20만 개와 지역어(사투리) 8만 개, 해외 지역 언어 2만 개 등 약 30만 개의 어휘가 수록되어 있다.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목사님의 뜻은 남북이 “함께”

▶남북합의로 발간해야 하는 이유?
남쪽만 책을 내는 건 목사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고요. 남북 합의로 책을 내고 공동으로 기념행사를 해야 문 목사님의 뜻에 맞지요. 남북이 "함께" 해야죠.
(여기에서 정 작가는 목사님에 대한 부채 의식을 언급했다. 정부 차원의 특별법으로 만들어졌기에 겨레말큰사전에서 목사님과 통일맞이의 노력을 전혀 표시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 작가는 도라산역 문익환 시비의 설치와 다큐 영화 ’늦봄 2020’ 제작에 힘을 쏟았고 완성되는 것을 보았으니 이제 다소나마 부채 의식을 벗어났다고 고백했다. 목사님을 향한 변치 않는 존경과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정도상 작가는 <겨레말큰사전>은 남북의 합의로 발간돼야 그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2)에서 계속]

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