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과거에서 온 편지>
“자꾸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2023년 9월호)
1981년 9월 7일에 쓴 박용길의 편지
“물을 마시거나 입을 축이셔야죠… 당신과 같이 금식기도 못해 죄송”
얼마 정도 금식을 해보셨나요?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해 간헐적 단식을 권장하는 요즘이라지만 여기엔 ‘24일간 금식’을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금식이 시작된 지 14일이나 지나서 알게 되었죠. 1981년 9월 7일에 쓴 박용길의 편지는 아내가 본 남편 이야기입니다.
단식을 만류하기 위해 간 면회
9월 7일에 박용길과 아들 한 명은 문익환 목사 면회를 갔습니다. 닷새 전인 2일에 이미 그달 치 면회를 했지만 남편이 감옥에서 단식을 하고 있어서 또 가야만 했습니다. 9월 7일에 쓴 편지는 바로, 그 면회를 다녀온 날의 것입니다.
◇박용길, 1981년 9월 7일 면회를 다녀와서 쓴 편지.
▲편지 본문
어린 양
김경수
있는 듯이 없고 없는 듯이 있는
님의 얼굴에 어둡고 슬픈 것이 흐른다
감기고 끝내 열리지 않던 얼굴에
싱그러운 아침이 맺혔노니
님의 가슴에 황홀한 슬픔의 하늘이 구비돈다.
살아있는 모양은 있으나
실상은 죽어있는 이목구비들
어디를 향하나 해골의 골짝 뿐인
언덕에
기적같은 새벽이 밝아오고
없는 듯이 있고, 있는 듯이 없는
님의 목소리에 파도가 인다.
제215신 1981년 9월 7일(월요일)
바우가 이 그림을 보더니 얼른 방에 들어가 고모가 만든 곰을 안고 와서 “똑같지” 해서 웃었읍니다.
당신께서 입맛을 작구 다시시는 모습이 보여 안스럽습니다. 물을 마시거나 입을 축이셔야죠. 저도 같이 금식기도 드리지못해 미안합니다. 캄캄한 턴넬을 빨리 빠져나오시고 황홀한 체험을 쌓으시기 두손모아 빕니다. 하느님께서 힘주시기 다시 빌며
ㄱㅣㄹ
단식이 아닌 “금식기도”
그녀가 단식 사실을 알게 된 것은 9월 2일에 있었던 정기면회 때였습니다. 부모님과 아들, 손자 바우까지 대동하고 갔던 면회에서 남편이 “지난(달) 20일부터 금식기도를 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던 것이지요. 특히 면회 때 문익환은 자기가 하려는 것이 단식투쟁이 아니라 “금식기도”라는 것을 계속 강조했습니다.
“당신의 여윈 모습과 비장한 마음으로 단식기도를 하시는 뜻을 보고 듣고 하면서 너머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당신의 크신 뜻이,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께 상달될 것을 믿으며 기도하겠읍니다(박용길 1981. 9.2).”
문익환 목사에게 이번 단식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2일 면회를 마치고 쓴 편지를 보면 이번 단식은 신앙인으로서 겨레의 문제를 온몸으로 성찰하고자 하는 목적이 엿보입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온 마음으로 이해하고 응원해 주고자 했다고 생각됩니다. 문익환은 면회 다음 날인 9월 3일부터 나흘에 걸쳐 9월 서신을 써서 면회 때 못다 한 금식기도를 둘러싼 심경을 소상하게 설명했습니다.
“다시 차근차근 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저는 이번에 앞이 캄캄해 오는 절망적인 심정에서 금식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아버님의 분신, 이 낙천가 익환이도 이번에는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주변 정세를 보나 국내 정세를 보나 서광이 비쳐 들어올 데라곤 한 군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4강이 한 발씩 내밀어 이 조국을 눌러 짚고 있어서 꼼짝도 못할 판인데, 우리는 남북으로 갈려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동서로 찢어진 채 언제 아물지 모를 형편입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이 금은 음성적으로 점점 더 깊어지고 벌어져 갈 뿐입니다. 그래도 저는 정부를 원망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정부까지 포함해서 이 겨레가 송두리째 휩싸여 있는 절망, 그것 자체가 깜깜하게 느껴져서 금식 기도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문익환, 1981. 9. 3).”
86세 노모 김신묵 아들 금식기도에 동참
하지만 금식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가족이 이 사실을 알게 된 시점은 문익환이 음식을 끊은 지 이미 이 주나 지난 시점으로 그의 나이는 64세였습니다. “뵈옵고 도라오니 당신의 뜻은 이해하면서도 괴로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고(박용길 1981. 9. 3)” 설상가상 당시 만 86세였던 문익환의 노모가 아들의 금식기도에 동참하고자 해서 가족과 주위의 시름은 더했습니다.(*이때 문익환의 모친 김신묵 권사는 실제로 아들과 함께 열흘이나 금식기도를 하였음)
“당신의 9월 서신 깨알보다도 더 작은 글씨로 메워진 친필. 정말 반가웠어요. 15일 이상 굶으신 분이 어떻게 그렇게 쓰실 수 있었는지 정말 기적이군요. … 밖에서는 어머니들이 애태우고. 울고. 걱정하고 계신데 당신은 유유히 황홀경을 헤매시다니.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탓일까요. 안절부절하다가도 믿음으로 평온함을 얻는 것은 당신을 믿는 믿음 때문일까요.” ….”많은 분들이 같이 기도하고 … 이제 고만. 음식 잡수시면서 같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박용길, 1981. 9. 10)
고령의 정치범인 수감자가 단식하고 있으니 교정 당국은 어땠을까요? 건강상의 문제도 큰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여파인지 보통 한 달에 한 번 면회를 하였던 상황에서 그달에는 특별한 면회가 추가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귀여운 판다곰이지만.. 안쓰러운 남편의 모습이
귀여운 판다곰 그림으로 바우가 할아버지를 웃게 해 드렸을 겁니다. 이날 편지는 짧고 내용도 많지 않지만, 그 짧은 면회의 와중에 번쩍하고 아내에게 꽂힌 순간이 들어 있습니다. 단식으로 입이 말라도 물을 마시거나 입을 축이지 못하는 남편, 그래서 자꾸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그것이지요. 그날의 남편도 언제나처럼 그 뜻과 말은 무엇보다도 강건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내의 눈에는 그날따라 안쓰러운 남편 모습이 더 깊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아내이기 때문에 가능한 예리한 관찰이었다고 할까요? 아내는 이날 편지 속에서 함께 금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남편의 뜻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함께 빌어주었습니다.
“일생일대의 편지”
이후 박용길과 아들, 손자, 며느리, 아버지까지 온 가족들은 닷새 뒤인 중추절 날 백설기를 해 가지고 감옥으로 출동했습니다. 원래 전날 가려고 했는데 추석 귀향객 때문에 차표를 살 수 없어서 결국은 추석 당일에 가게 되었던 것이지요(박용길, 9.11, 12). 이날 문익환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고집을 부리고 계속 단식을 하면 나도 오늘부터 안 먹겠다고 선언했는데 당시 문익환의 몸무게는 56.5kg으로 평소보다 훨씬 적었으니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싶습니다. 얼마 후 문익환은 감옥에서 특별한 내적인 경험을 하게 되고 9월 14일에 24일간의 금식기도를 중단하게 됩니다. 이때의 심경은 9월 17일에 문익환이 쓴 편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편지 상단에는 빨간색으로 “특발”이라 적혀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쓸 수 있었던 때이니 특별 발송의 줄임말일까요? 이 편지는 서신표에도 등기로 발송되었다고 메모가 남겨져 있습니다. 문익환은 이 편지를 두고 스스로 일생일대의 편지라고 적고 있어요. 어떤 내적 경험이 그를 긴 터널에서 빠져나오게 했던 것일지는 그 편지 속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에게..
일생일대의 편지를 어머님께 올렸지만 이건 모두모두에게 올리는 편지요. 10월 접견 때까지 어찌 기다리나!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늦봄(1981. 9. 17)
<글: 아키비스트 지노>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와 함께 걷고 있는 아키비스트. 늦봄과 봄길의 기록을 아끼고 그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
[관련 기록]
박용길, 당신께, 1981. 9. 2
박용길, 당신께, 1981. 9. 7
박용길, 당신께, 1981. 9. 10
박용길, 당신께, 1981. 9. 11
박용길, 당신께, 1981. 9. 12
문익환, 옥중편지, 1981. 9. 3~7
문익환, 옥중편지, 1981. 9. 17
[키워드]
세번째 수감
공주교도소 24일간 단식
전주교도소 21일간 단식
월간 문익환_<과거에서 온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