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
소안도 독립운동가 송내호 선생 (2023년 8월호)
[늦봄과 ‘이 사람’]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당신의 뼈가 묻힌 소안도가 민족통일의 성지이군요”
"민족해방을 약속하는 8월, 말만 들어도 가슴 일렁이게 하는 8월이 내일 열리는군요."
늦봄은 1992년 7월 31일의 옥중편지의 시작 부분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그에게 8월은 정말 가슴 벅찬 달이었다. 거쳐 온 삶의 여정부터가 그랬다. ‘8월 14일만 되면, 해방 직전 만주 신경에 홀로 남아 교회 사택을 지키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가 일본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자유민이 되는구나 하는 감격에 가슴 두근거리던 날이 생각난다’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옥중편지 1992년 8월 14일).
8.15는 조국 광복 투쟁이 있어 가능
‘민족해방을 약속하는 8월’은 어떤 뜻일까? 이렇게 말한 92년보다 1년 전에 쓴 옥중 편지에서 찾아보자. 늦봄은 1945년 8월 15일이 분단과 함께 또 다른 외세의 지배가 시작된 날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세계사가 우리에게 해방을 어음으로 약속해 준 날이라고 긍정적인 해석을 제시했다. 비록 어음이지만 그런 것이라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일제 36년간 우리 선열들의 피나는 조국 광복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선열들의 투쟁은 8.15 후 분단을 청산하려는 민족운동으로 이어졌다. 늦봄은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우리 겨레의 힘으로 통일을 이룰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다(옥중편지 1991. 8. 9). 1995년은 통일 원년이어야 한다는 목표를 품었던 그가 맞이한 8월이 왜 가슴 울렁이게 하는 8월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겠다.
◇ 소안도와 송내호 선생을 소개한 1989년 8월 23일 자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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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도 독립 투쟁, 너무 늦게 인정받아
시 <송내호 선생님>은 선열의 독립 투쟁을 기리며 통일의 염원을 담아 8월에 쓴 시다. 방북 사건 재판이 시작된 후인 1989년 8월 23일,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역사 기행 소안도’ 기사를 읽고 그날에 썼다. 시의 내용은 비교적 단순한 편이다. 송내호 선생과 소안도 섬 주민들의 독립 투쟁에 대한 경외심을 표하면서, 송 선생을 제외한 대부분 독립운동가의 항일운동 공적이 너무나 늦게 인정받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늦게라도 인정받은 것에 대한 안도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소안도 독립운동가들이 식민지 민중들의 생존과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 과정에서 사회주의 조류를 수용하거나 공산당 결성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중 부역자에 대한 좌우익의 학살 사태까지 겹치게 되자, 광복된 조국에서마저 소안도 주민들은 몇십 년 동안 선친과 형제의 독립 투쟁 활동에 대해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하고 숨죽여 살아야 했다.
소안도는 전남 완도군에 소속된 작은 섬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3대 성지 중 하나일 정도로 독립투쟁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이 작은 섬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사람이 22명이나 된다. 1920년대 섬 주민 6천여 명 중 800명 이상이 불령선인으로 찍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을 정도로 섬 주민 전체가 항일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소안도 독립운동 지도자 송내호
송내호 선생은 소안도 독립운동의 핵심 지도자였다. 그의 투쟁 활동을 알고 나면 놀라움과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교육계몽운동부터 시작하여 무장투쟁과 노동자농민운동으로 나아갔다. 활동 지역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망라했고, 중국과 일본에까지 활동망을 넓혔다. 비밀조직과 공개조직을 동시에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든든하게 만들었다. 전국 조직에 참여함과 동시에 소안도 조직을 강화하는 등 꼭 필요한 현장에서 동지들과 함께 활동했다. 이론가가 아닌 실천하는 투사였고 지도자였다. 세 번의 투옥으로 건강이 악화한 그는 세 번째 옥살이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1928년 12월 20일 세브란스병원에서 34세로 생을 마감했다.
송내호 선생의 동생 송기호도 독립운동가였다. ‘두 형제는 1910년대 전남지역 항일조직 운동의 시초를 연 선구자였고 1920년대에는 좌우 이념 분화 속에서도 협동 노선을 추구했다. 또한 민족의 대동단결에 의한 투쟁으로써 민족해방을 달성하려 했던 맹렬한 실천적 조직운동가로서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손형부 1992)
항일의 섬이며 민족통일 성지
소안도는 1990년 항일운동 기념탑 건립을 시작으로 섬 전체가 ‘항일의 섬’의 모습을 갖추어 왔다. 집집이 365일 태극기를 달아 놓고 있는 것도 소안도의 자랑스러운 풍경 중 하나다. 송내호 송기호 형제는 죽어서도 일본을 바라보고 싶지 않다고 하여 무덤도 남쪽 아닌 서쪽을 향하고 있다. 그 정신이 사후 100년을 바라보는 지금도 소안도에 살아 있으니, 소안도는 완전한 민족해방 즉 민족통일을 이끌 성지임에 틀림없다.
이 대한민국에서도
당신의 뼈가 묻힌 소안도가
민족통일의 성지이군요.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문익환 (1999) 『문익환 전집 2권』시집2. 사계절출판사
사단법인소안항일운동기념사업회 https://www.soan0516.com/index.php
손형부 (1992) 「식민지시대 송내호·기호 형제의 민족해방운동」『국사관논총』 제40집. 국사편찬위원회
송내호 선생님
문익환
제 어머니가 두만강가 회령에서 태어나신
1895년 같은 해에 당신은
전남 소안면 비자리라는 데서 태어나셨군요
천지 정기 무릅쓴 계림 남아야
마음속에 칼을 간 지 몇 해였던고
우리 손에 뽐내는 문무의 칼은
동포들의 혈관에 새로움 준다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전라남도 경상남북도에 걸쳐 항일운동을 벌였으면서도
“그놈의 이념이 뭔지. 좌익운동 했다고 욕이나 먹는 게 아닌가 싶어 70년대까지 잠자코 있었습니다. 80년대에 들어서야 부산 문서보관소며 대구 법원을 찾아다니면서 당시의 판결문 등을 찾아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했지요. 할아버지께서 누구보다 철저한 항일운동을 했다는 걸 알고 나선……”
그래도 당신은 63년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를 받으셨지만 당신의 동지들은 87년까지 기다리셔야 했군요
이렇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군요 인터내셔널을 부르면서도 민족운동만 하면 독립유공자가 될 수 있군요
이 대한민국에서도
바로 당신의 뼈가 묻힌 소안도가
민족통일의 성지이군요
1989. 8. 23 |
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