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과거에서 온 편지>
당신께서 못 잊어하시는 장준하 선생님 (2023년 8월호)
1986년 8월 17일 박용길의 편지
8월은 어떤 일들이 기다리는 달인가요? 이달의 편지는 문익환, 박용길 부부가 보냈던 8월을 보여주는 편지를 골라 보았습니다. 장준하 선생의 추모 모임에 갔던 하루를 그리고 있는 이 편지는 힘 있는 필체로 꾹꾹 눌러쓴 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도 근사합니다.
◇박용길, 1986년 8월 17일, 잡지 한 구석에 쓴 편지
▲편지 본문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1901-1943)
제48신 1986. 8. 17
비가 부슬부슬 내렸읍니다. 독립문 옆에 뻐쓰 두 대가 모자라 한 대를 더 부르느라고 10시 반이 지나서야 떠났읍니다. 우리 교인들 유가족들 때문이라서 좀 미안했읍니다. 계 선생님 인사에 이어 제가 두 번째였는데 붓글씨 두르마리에 쌀알같은 빗방울이 스며들어 안타까웠읍니다. 우산을 바쳤는데도…
희숙 씨[장준하 부인]는 둘째 딸이 가 있는 제주도가 퍽은 좋다고 하십니다. 건강도 좋아지고요. 잔디밭에 앉아서 점심을 나누는데 보일 얼굴들이 보이지 않아 섭섭했읍니다. 신범어머니, 석표어머니, 윤이어머니, 향숙모녀, 봉우어머니, 영인어머니, 운상어머니, 부영 씨 아들이 귀엽드군요. 내년 이 날을 기약하며 2시에 내려왔읍니다. 감회가 깊은 하루입니다. 안녕. 길.
6천 리 장정이 만든 거목, 준하
그들 인연의 시작은 해방 이전 문익환이 일본신학교를 다니던 때로 올라갑니다. 같은 학교를 다니던 동생의 친구로 알게 되었고 진보적인 개신교계 인사들 모임이었던 “복음동지회”에서 함께 활동하며 인연을 이어갔지요.
“준하는 동환[문익환의 아우, 문동환]이와 한 반이어서 나한테는 동생이죠. 학생 시절에는 착실하고 얌전한 학생이었는데, 그의 어디에 그런 용기와 뜻이 있었던지 해방 후 서울에서 만났더니, 그는 동경에서 보던 준하가 아니었어요. 거목이 되어 버티고 서 있는 느낌에 나는 완전히 압도되고 말았지요. 6천 리 장정에서 시작되는 그의 투쟁이 그를 그런 거목으로 만들었죠(문익환, 1991. 8. 16)”
위의 편지는 장준하가 쓴 책 『돌베개』를 읽은 감상이 담겨있지요. 책 속에는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었지만 비상한 의지로 탈출해 임시정부를 찾아갔던 여정이 들어있습니다. 그랬던 장준하가 포천의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것이 1975년 8월 17일이었지요. “장준하가 죽는 궤변”이 일어난 날 문익환은 마치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장준하의 관을 땅속으로 내리면서
“네가 하려다가 못한 일을 내가 해주마(문익환 1992, 2, 20)” 라고 스스로 약속했지요.
◇장준하 선생 묘소 제9주기 추도식에서 조사하는 문익환 목사와 박계동
장 선생님 가신 날, 8월 17일
문익환은 이 슬픔을 잊지 않고 매년 기일을 지키면서 마음의 벗인 장준하를 추모하고 그 뜻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1976년 이후 민주화·통일 운동에 투신했고 또 감옥에 있느라 매년 그날을 챙기는 몫은 아내인 박용길에게 돌아갈 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박용길이 8월 17일 무렵에 쓴 편지를 보면 여지없이 장준하의 이야기가 등장하곤 합니다. 박용길이 갔던 장준하 추모모임 -그날의 정경, 참석자들, 장준하 가족 이야기- 소식을 남편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부부의 삶 속에 장준하가 어느 정도 깊이 자리하고 있는지는 편지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 못 잊어하시는 장 선생님 가신 날, 예상외로 많이 오셔서 버스 네 대가 갔읍니다(박용길, 1982. 8. 17)”
1986년 5·3 인천사태와 서울대 5월제 강연사건 이후 늦봄은 계명대에서 자진출두해 구속되었고 네번째 감옥생활을 하던 중에 장준하 11주기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1975년의 8월 17일, 11년 전 그날은 우연히도 유신정권의 핍박으로 해직교수들이 만든 갈릴리교회의 첫 예배가 흥사단 강당에서 있던 날이기도 했지요. 박용길은 다음 날 장준하 묘소 참배를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남편에게 보낼 편지를 쓰다가 문득 11년 전 생각이 났던 것 같습니다.
“.....17일이 주일 11년 전과 꼭 같은 요일 장 선생님 갈릴리교회 초대했더라면 부질없는 생각도 해 봅니다. good night!(박용길, 1986, 8. 16)”
다음 날 박용길은 한빛교회 교인들과 함께 장준하 묘소를 찾았고 감옥에서 궁금해하고 있을 남편을 위해 8월의 편지(1986. 8. 17)를 썼습니다.
장 형이 있었으면…
1989년, 방북재판이 있었던 8월 17일에는 재판일정이 겹쳐 부부가 모두 추모행사에 참석을 못하고 대신 늦봄이 장준하의 부인에게 편지를 쓰며 마음을 달래야 했습니다.
“작년에는 테러를 당해서 집에 누워 있느라고 장 형 산소에 못 갔었는데, 올해에는 이렇게 갇혀 있느라고 또 못갔습니다…… 나야 장 형 대타로 통일 운동에 나선 사람이지만… 장 형이 있었으면, 이번엔 장 형이 갔다 오는 건데… 장 형이 갔다 왔다면… 민족사에서 차지하는 무게가 장 형과 나는 다른 것이 아니겠습니까?(문익환, 1989. 8. 17)”
그리고 1990년, 장준하의 산소에 다녀온 박용길에게도 남편과 비슷한 마음이 보이네요.
“아침에 혜화동우체국에 들러 당신께 편지를 보내고 흥사단 앞에 벌써 버스가 와 있어서 제일 먼저 앞자리를 차지했지요... 희숙님은 둘째 딸, 사위와 함께 비행기로 열시 반에 도착하여 조금 늦게 오셨어요. 김도연님 약력 보고, 백기완님 추도사, 계훈제님 만세삼창, 임진택님 사회였어요. 가는 길에 통일로에 장준하 새긴돌 세워진 시비 앞에서 잠시 머물렀습니다.... 장선생님이 8월 20일에 발표하시려던 것이 한 개인에 관한 폭로였을거라고 하는군요. 그것이 발표되었더라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거라고 생각됩니다. 통일을 앞당기는데 장준하선생님이 계셨으면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박용길, 1990. 8. 17)”
만약에 그들이 갈릴리교회 창립예배를 함께 드렸다면, 그랬다면 약사봉에서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늦봄은 장준하의 대타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부부의 바램은 이루어졌을까요?
<글: 아키비스트 지노>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와 함께 걷고 있는 아키비스트. 늦봄과 봄길의 기록을 아끼고 그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
[관련 기록]
박용길, 당신께, 1982. 8. 17
박용길, 당신께, 1986. 8. 16
박용길, 당신께, 1986. 8. 17
박용길, 당신께, 1990. 8. 17
문익환, 옥중편지, 1989. 8. 17
문익환, 옥중편지, 1991. 8. 16
문익환, 옥중편지, 1992. 2. 20
[키워드]
네번째 수감
서대문구치소
장준하
월간 문익환_<과거에서 온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