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故 정경모 선생 아들 강헌, 아영 씨 (2023년 7월호)

“어떤 일이 있어도 희망을 잃어버릴 분이 아니었다”

[편집자 주] “서울에서 죽고 싶지만 가지 못해도 괜찮다. 암흑의 역사가 새겨지니까...” 
살아서 다시 밟지 못한 내 땅, 죽어서야 허락된 조국. 지난 6월 3일 모란공원 고 정경모 선생 묘역을 찾은 장남 강헌 씨는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늦봄의 옆자리에서 영면에 들어간 정경모 선생. 남들은 자랑스런 통일운동가로 존경한다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없어 외로웠다”고 토로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전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지요. 통일운동가의 자식으로 짊어진 삶의 무게, 그리고 이를 지탱해준 아버지에 대한 믿음. 어두운 역사가 만든 부자간의 아련함이 가슴 아픕니다. 『월간 문익환』 7월호는 고 정경모 선생의 두 아들 정강헌-아영 씨를 만났습니다.
   
 
◇6월 3일 마석 모란공원을 찾아 부친 정경모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고 소감을 말하고 있는 장남 정강헌 씨(왼쪽)와 차남 정아영 씨. 오른쪽은 정 선생의 손자. ⓒ권산


고 정경모 선생의 아들 강헌과 아영, 손자 일행이 수일간의 짧은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 6월 3일 모란공원 통일동산을 찾아 부친과 문익환 목사, 유원호 선생이 함께 잠든 묘역을 참배했다. 이후 ‘통일의 집’을 방문한 일행은, 문 목사의 기록물과 유품 등을 돌아본 후 『월간 문익환』과 인터뷰를 가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89년 방북 관련 뒷이야기와 부친의 생전 생활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또한 통일운동가의 자식으로서 불가피하게 겪어야만 했던 아픔과 고통을 진솔하게 토로할 때는 듣는 이들도 탄식의 소리를 뱉지 않을 수 없었다. 일행은 일본에서 가져온 잡지 『씨알의 힘』을 포함한 사료를 ‘통일의 집’에 기증하였다.

 
◇ 6월 3일 통일의 집을 찾은 정경모 선생의 장남 강헌 씨가 일본에서 가져온 잡지 『씨알의 힘』을 포함한 사료들을 ‘통일의 집’에 기증하였다.
 

“4년 만에 한국 방문, 영광스럽다”

▶한국을 방문하신 소감은?
4년 만에 서울에 왔습니다. 지난번에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 때 한국<평화의 나무 합창단>과, 자매 관계에 있는 일본<사이타마 합창단>이 국회 광장에서 행사 첫 무대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인간의 노래’와 ‘그날이 오면’을 불렀죠. 한국에서 일본 노래를 부른 것은 최초일 겁니다.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오랫동안 못 왔는데 이제야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제는 천안에 있는 우리 가족 산소에 갔습니다. 원래 시흥에 있었는데요. 몇 년 전에 이전해 갔습니다. 산소에 처음 갔습니다. 조카 안내로 가봤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모란공원에 올 수 있어서 정말 영광스럽습니다.
 

 별세 이전의 활동 

『씨알의 힘』 잡지 발간…1994년 뇌경색 쓰러져

▶정경모 선생님이 별세 전에 하신 일은?
일본으로 돌아오신 1970년인가 그때 당시에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고, 시간이 지나 집필 활동을 시작했는데 한국에는 가시지 못했습니다. (한국 법이 인정한) 체류 기한도 끝나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한민통, 김대중 씨가 의장이었던 한민통에서 민족시보 주필을 맡아왔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추방당하고 폭행도 당하고, 미국의 간첩이라는 말까지 들었죠.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그후에 시부야에 ‘씨알의 힘’이라는 사무소를 내어 여기에서 우리말 교실도 하고 일본 사람도 많이 만났습니다. 동시에 씨알힘, 씨알이라는 잡지를 내며 집필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오랫동안 했는데 1994년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셨습니다.

 

한겨레신문에 회고록 연재, 『역사의 불침번』 출간

몸의 반신이 불편해져서, 이럭저럭 걷기도 했는데 점점 걷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한겨레신문에 자서전도 썼어요. 한국 근현대사였습니다. 한겨레신문 연재 중에 제가 조금씩 조금씩 (연재 내용을)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일본에서 『역사의 불침번』(한국판: 『시대의 불침번』)이란 이름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게 재일교포 사회에서는 그나마 화제가 되었지만, 그런 책이니까 많이 팔리지는 않았습니다. 5천엔 정도의 비싼 책이기도 했으니까요. 그후에는 몸이 약해져서 집에 계시면서 책도 읽고 술을 좋아하셨으니까 술도 먹고 했죠. 

 

 부친의 생전 모습들 

“서울가서 죽고 싶지만…가지 못해도 그 의미가 있다”

3년 전 2020년 후반부터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점점 약해지셨습니다. 2020년 말부터 쭉 침대에 누워 계셔서 말도 잘 나오지 못하게 되었고, 점점 치매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때로는 술 먹고 싶다고 하셨는데, 집 마당에 매화가 있어 어머니가 만든 매실주를 즐겨 먹고 신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부친이 마지막 부른 노래가 뭐더라, “옛날은~ 가고 없어도~ 따라라 라라라~”(직접 노래 부르며) 이런 노래였습니다. <옛날은 가고 없어도> 이런 가곡이 있지요.

▶한국으로 귀국 시도가 무산되었을 때의 심정
아까 모란공원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아버지는 흔히 “가지 못해도 괜찮다. 대한민국에 그런 암혹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 역사 속에 새겨지는 것도 의미가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친은) 귀국 못한 마지막 분이에요. 유럽과 미국에서, 일본에서 민주화운동을 한 분들은 다 귀국했는데 아버지 한 분이 남았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부의 비서관과 논의해 왔습니다. 형식적으로 공항에서 정보부의 조사를 받고서 환영대회가 있겠다, 그런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가려고 했지만, (협의가 잘 되더라도) 완전 휠체어 신세라서 도저히 가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로서는 서울도 가고 평양도 가고 했으니, ‘서울에서 죽어버리는 것도 좋지 않겠나?’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가지 못해도 괜찮다, 가지 못하게 되는 그런 역사를 남기겠다.’ 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 가서 죽어도 좋고, 서울의 경치를 보고 맛이 있는 것도 먹고’라는 상반되는 얘기를 흔히 했습니다. (정아영 씨가 거들었다) 그래도 솔직히 마음 속에서는 역시 (서울에) 가고 싶어 하셨죠.

 

아버지 없어 “외로웠다”

▶아들이 느꼈던 ‘아버지’ 정경모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거의 서울에 있었고, 때로는 일 때문에 일본에 가끔 찾아왔습니다. 며칠 동안 일본에 있다가 다시 서울에 가고 했죠. 아, 난 외로웠어요. 정말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서요. (부친이) 70년에 (일본으로) 와서 함께 있었는데, 뭐랄까 솔직히 말해 애증이 교차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애정도 있고 증오도 있어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그런 (반독재 투쟁) 일을 하고 있었기에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요코하마 히요시에 있는 집은 삼십 수년 전에 새로 지었습니다. 그 대금은 내가 거의 갚았어요. 아버지는 갚을 능력이 없잖아요. 그렇죠? 제 가족은 아내랑 아들딸이랑 셋집살이를 했어요. 비싼 임대료 지불하면서, 아버지 집의 대부를 갚으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버지 대신 빚 갚고 가계 책임져 

그리고 그 당시 내가 대학을 졸업한 70년대에는 한국 사람이라면 국적이 다르니까 일본 회사에 들어갈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어요, 아영이도 그랬고요. 와세다 대학은 일본에서 유명한 대학이잖아요. 동창생들도 졸업 후 유명한 회사에 들어가고 했는데 나는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영세한 사채업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채권 회수할 때 조폭한테 협박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부동산 경매 같은 일을 하면서 아버지를 도와주고 아이들을 키웠습니다.

지금은 다행이랄까, 일본에서는 혐한 감정, 반한 감정이 퍼져서 확산하고 있지만, 그래도 취직에 관해서는 그런 차별이 없어졌습니다. 내 아들딸은 둘 다 유명한 일본 회사에 들어가고, 한국 이름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50년 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일본의 이름이 있는 회사에는 반드시 재일교포 사원이 있습니다. 언론기관에도 있어요. 그런 얘기를 (저의) 아버지가 듣고 기뻐했습니다. 3세대가 되어서야 일본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며 정말 기뻐하셨죠.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사과

▶그러면 오히려 원망이 더 많으셨어요?
물론이죠. 아버지는 뭐 한국에서 훌륭한 선생님이다, 칭찬을 받아왔는데, 나는 힘들게 생활해 왔습니다. 제 마음에 있던 얘기를 만년에 아버지한테 했어요. ‘아버지는 정 선생님, 선생님, 훌륭한 선생님이라 칭찬받고, 나는 그동안 뭘 했나?’ 그러니까, 아버지가 저한테 사과했습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남들은 아버지 존경한다지만…가족입장에선…

▶원망이 풀리셨어요?
음~ 아직은! 그러니까 혹시 내가 (정경모 선생 아들이 아니라) 남이라면, 훌륭한 선생님이다(라고 말했겠죠). 교포 친구들도 다 그래요, ‘아, 정경모 선생은 정말 훌륭하다’고 칭찬했죠. 같은 학교가 아니더라도 교포 중에는 민주화 운동 선배들도 후배들도 많이 있어요. 다 정경모 선생님 존경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도 남이라면 그런 말을 했을 겁니다. (남들의 입장은) 그냥 가족이랑은 좀 다른 느낌이죠. 하하(웃음).

 
◇통일의 집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정경모 선생의 유족들. 왼쪽부터 장남 강헌 씨. 차남 아영 씨. 오른쪽은 손자.
 

“38선은 우리 힘으로 없애야 한다.”

▶아버지와 나눈 기억나는 대화
대학에 들어갔을 때 재일교포 학생들도 모임이 있었어요. 재일한국학생동맹이라고 원래 민단 산하의 학생 조직이었는데 반정부 쪽이라서, 배제당한 선배들이랑 함께 한국 대사관 앞에서 ‘박정희 타도, 박정희 타도’ 이렇게 심한 시위를 했습니다. (저는) 민족주의자이고 아버지도 언론 활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야기가 (저와) 딱 맞아!"라며 자주 술을 마시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버지는 "38선이란 외국 세력이 그어 놓은 선인데 왜 우리가 소중하게 해야 하나? 우리 힘으로 없애야 한다"라는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 1995년 김일성 주석 사망 1주기 조문단으로 방북한 정경모 선생과 박용길 장로
 
 

 방북에 얽힌 이야기 

아버지는 신념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고…

▶88년과 89년 방북에 대한 자식의 감정
자랑스럽게 느꼈습니다.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한국에 갈 생각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보통 사람은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가?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되는가?’ 라며 걱정하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그런 생각 하나도 없었어요. 신념에 따라 말을 하고 행동하고, 평생 그런 인생이었습니다. 행복한 인생이죠.
 
 ▶아버님 성격 자체도 좀 그런 스타일이신지?
네, 성격 때문에 가까운 사람들이랑 갈등을 빚은 적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 일에 반대 안 해

▶정경모 선생의 방북에 대한 부인의 반응
솔직히 말해 우리 어머니는 보통의 일본 사람입니다. 민주화니 통일이니 이런 것에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는 절대로 안 했습니다. 남편이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반대를 안 했습니다.

 

늦봄과 시부야에서 손잡고 '선구자' 노래

▶방북 상황에서 기억나는 것
(차남 정아영) 제가 하나만 좀 말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하고 문 목사님이 방북하실 때 먼저 동경에 문 목사님이 도착했는데, 제가 아버지하고 둘이서 나리타 공항까지 마중 나갔었습니다. 도쿄 시부야의 도큐 호텔에 묵으셨어요. 그날 밤에 시부야역 앞에 있는 일본 스시집 아니었을까 기억되는군요. 거기서 저도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가 한국말을 알아듣는 것이 너무 어려웠지만, 두 분이 신학적인 이야기를 좀 많이 하셨습니다. 르네상스 이야기를 먼저 하시고, 아마 인간하고 신이 어떤 관계 있는지 그런 이야기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내용이 깊어서 못 알아들었어요. 그후에 아버지가 쓴 문장을 보고 알았죠.

식사하고 술도 한잔하시고 시부야 호텔에 들어갔습니다. 역 앞에서 호텔까지 10분~15분 정도 걸립니다. 시부야 공원길이라는, 좀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낮에도 밤에도 사람이 많아요. 두 분이 이렇게 손발을 끼고 큰 소리로 선구자 노래를 하시잖아요. 저는 그 주위에 (한국) 정보부 요원이 반드시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시부야 사람이 많은 그 길에서 한국말로 큰 소리로 노래하면 반드시 알려지지 않을까 너무 걱정하며 들어갔습니다. 그때 두 분의 기분이 너무 좋으니까. 내일이나 모레 평양 가겠다고 고양된 그 마음, 그 얼굴이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방북 때 삼촌이 문 목사 김포공항 배웅, 삼촌 내외 고초

리고 또 하나 문익환 목사가 평양 가실 때 김포공항까지 함께 갔던, 지금은 돌아가신 작은아버지가 있었어요. 아버지의 동생으로 문익환 목사와 가까운 곳에 계셨는데 아무 사정도 모르면서 차를 몰아 김포공항으로 함께 갔습니다. 문 목사님이 평양 갔으니, 작은아버지가 부인과 함께 당연히 잡혀갔어요. 고문은 당하지 않았지만 심한 조사를 받았고, 부인은 그 남편이 변명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국에) 통보하지 않았다, 불고지죄다(라고 추궁받았습니다).

 

사촌누이 한국서 최루탄 맞고 중상

작은아버지에게 딸이 있었어요. 작년 제막식 때 우리와 함께 참석한 그 사촌 누이가 지금은 캐나다에 살고 있습니다. 사촌 누이는 서울에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최루탄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작은아버지가 그를 호주로 도피시켰어요. 호주에서 아일랜드 사람이랑 결혼했는데요. 호주에 있는 그 사촌 누나한테 편지를 썼어요. (누이의) 아버지 어머니가 그런 고통을 받게 되어 미안하다. 사촌 누이 이름이 진영이라고 하는데, ‘아!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은 그러한 정도의 고통은 받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는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정말 감동했습니다.

 

부친, 늘 희망을 가지셨다

▶기대했던 통일이 별세 때까지도 이루어지지 못해 아쉬워하셨나?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정강헌 선생은 잠시 머뭇거렸다가, 곧 이런 대답을 해주었다)
아버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희망을 잃어버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늘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경모 선생은 회고록에서, ‘몽양과 백범과 장준하, 문익환이 걸어간 가시밭길을 뒤따라서 간 것이 사실이라면 내가 무엇을 원통해하며 누구를 향하여 불평을 늘어놓겠느냐며, 자신이 걸은 가시밭길은 크나큰 축복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은폐된 역사를 파헤쳐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겨레를 향하여 외치는 것으로 일생을 보냈다면 이것은 틀림없는 일종의 성직(聖職)이었을 것’이라며, 유한이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적었다.)

 

 3.1구국선언에 “내가 아는 문익환 맞아?” 

▶문익환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아버지는 문익환 목사님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정경모 부부의) 결혼식 때도 목사님이 주례를 했죠. 며칠 전 보내드린 결혼식 사진에도 문익환 목사 모습이 있었잖아요. 아버지는 그런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동생 정아영 씨) 우리는 일본에 계속 살고 있어서 70년대, 80년대, 90년대에는 한국에 오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뉴스라든지 여러 가지 정보로 계속 한국 민주화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았는데, 그 현장에는 우리가 있을 수 없었죠. 현장에 문 목사님이 계셨죠.

76년 3.1구국선언 때, 아버지는 ‘문익환, 내가 아는 문익환이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 목사님은 운동권에 안 끼었죠. 그런 사람이 아닐 거로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놀랐어요, 많이 놀랐어! 아버지는 흥분하셨어요.

 

“한국 학생들과 함께 ‘돌’ 던지고 싶었다”

아버지와 문 목사님이 서로 인연이 있었던 것이 우리에게도 다행이었습니다. 가까이에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있었으니까, 우리에게는 정신적으로 (힘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그 현장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좀 아쉽습니다). 혹시 현장에 있었더라도 우리들이 가장 먼저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만요. 하하. (한국 학생들처럼) 한 번도 (시위하며) 돌을 던지는 그런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한 번 정도라도 한국의 학생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못한 것이) 약간 아쉽습니다.
 

 “할아버지는 위대하고 존경할 분”

▶(정경모 선생 손자에게) 할아버지에 대한 생각
이번에 방문을 해 보니까 역사를 잘 아시고 위대한 분이라는 걸 알았고. 존경해야 할 분이다.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자료]
정경모(2010), 『시대의 불침번』. 한겨레출판. 

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