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

전태일에서 이동수까지, 열사 12인 (2023년 7월호)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잠자는 우리들의 가슴을 때도 없이 두들겨 대는 
12명 열사들의 주먹’

   
◇ 양심수 석방 촉구대회에서 송광영 열사 어머니와 인사하는 늦봄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늦봄은 민주화와 통일에 목숨을 바친 25명 열사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냈다. 고통받는 민중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찢어진 겨레의 하나됨을 위해, 자기 몸을 뜨거운 불 속으로, 차가운 땅바닥으로 내던진 열사들을 늦봄은 절규하듯 불러냈다. 이 모습은 영화 <1987>의 마지막 장면으로 사용되어 많은 사람을 울컥하게 만들기도 했다.

 

시 <밥알들의 양심>에서 불러낸 12명 열사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앞서 1986년 말 또는 1987년 초쯤, 수감 중이었던 늦봄은 시 <밥알들의 양심>에서 12명 열사의 이름을 되새겼다. 12명의 열사는 전태일, 김상진, 김경숙, 김종태, 김의기, 김태훈, 황정하, 박종만, 송광영, 이재호, 김세진, 이동수. 이 부분을 읽게 되면 약 6개월 후에 있은 장례식에서 25명 열사를 부르는 장면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밥알들의 양심>에서 12명 열사를 부른 경험이 실마리가 되어 25명 열사를 불러낸 장례식 조사가 나오게 되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늦봄은 1986년 5월 서울대 강연 도중에 있은 이동수 군 투신 사건으로 인해 집시법 위반 혐의로 수감되었고, 수감 기간 내내 학생들의 투신을 막지 못한 자책감을 토로하고 있었다. 젊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죽음 행렬을 막는 길이 무엇일까를 계속 고민하고 있었던 늦봄은, 86년 말부터 87년 초 사이에 시를 써서 열사들의 희생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마음속 깊이 되새겨 보려 애쓴 모습을 <밥알들의 양심>에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자신을 민주화 현장으로 달려가게 만든 첫 번째 계기라고 할 전태일에서부터 네 번째 수감에 이르게 만든 86년 4~5월의 이재호, 김세진, 이동수까지, 늦봄이 통곡하는 심정으로 그들을 부르며 시를 썼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시 속에서 열사들을 거명하게 된 맥락은 무엇일까? <밥알들의 양심>은 총 9편의 양심 시리즈 중의 하나다. 첫 편은 <양심이라고>이다. 이어 <땅의 양심>, <밥알들의 양심>, <어머니의 양심>, <당신의 양심>, <오월의 양심> 등의 후속작이 나온다. 열사들을 거명하게 된 맥락은 앞쪽 세 편에서 알 수 있다.

1편 <양심이라고>에서 늦봄은, 민주적 양심, 민족적 양심을 예로 들면서 양심은 대단한 게 아니라며 이렇게 규정해 낸다. ‘좋은 거 좋다고 하는 게 양심이다. 88올림픽에서 남북 단일팀 만들고 우리 편 이겨라고 함께 응원하면 남북 사람이 모두 좋을 거 아니냐? 그런 걸 민족적 양심이라고 하는 거다’ 물론 그 양심은 어딘지 가버리고 없었다.                                                                                                                                                                                          

속이지 않는 땅은 양심, 밥알은 땅의 양심

다음으로 <땅의 양심>에서는 ‘땅이 양심이고 땅의 마음은 양심’이라는 점을 풀어냈다. 땅은 풀도 동물도 사람도 속이지 않으니, 그렇게 땅은 ‘진실 덩어리’라 보았다. 사람들이 땅의 양심으로 돌아가게 되면 분쟁이 잠잠해지고 평화와 통일, 자유가 이루어진다. 벗들의 따뜻한 가슴, 토끼와 멍멍이의 따뜻한 가슴처럼, 그 따뜻함이 땅의 양심이다. 또 그것은 땅속 깊은 곳의 불덩어리와 같은 것인데, 땅의 본질이고 생명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세 번째 <밥알들의 양심>을 보자. 우선 ‘땅의 양심은 밥알, 속살 하얀 밥알’이라고 했다. 그런 후에 이 밥알들을 설명한다. 밥알들은 무지렁이들의 살점이고 핏덩어리이며, 사람의 머리카락과 손발톱을 키우는 생명이고, 또한 맑은 눈망울과 부드러운 촉각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농부들의 한숨, 그들의 주름진 얼굴과 구부러진 허리이며, 노총각 농군의 고달픈 삭신이고, 농약 먹고 죽은 농부들의 한(恨)이기도 하다.
 
 

열사들의 희생은 진실한 양심에서 나온 것

이같이 말한 후 늦봄은 열사들을 불러냈다. ‘성난 하늘이 내려꽂는 불칼의 번득임이고, 공순이들의 희망을 믿고 치솟는 불길로 뛰어든 전태일이며, 잠자는 우리의 가슴을 두들겨 대는 12명 열사들의 주먹’이라고 표현했다. 무슨 뜻일까? 어렵게 생각하기보다 다음과 같이 쉽게 해석할 수 있다.

사람다운 삶을 누리고 싶은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희생을 마다치 않는 전태일의 마음이 바로 땅과 밥알처럼 속이지 않는 진실한 양심이었다. 독재정권으로부터 민주를 되찾고 민족 분단의 아픔을 극복하고자 절규하고 희생한 열사들의 마음은 곧 분쟁을 거부하는 땅의 마음이고 생명을 키우는 밥알과 다르지 않았다. 전태일, 김의기, 박종만, 이동수 등 열사들이 되찾고 싶었던 것은, 속이지 않으며 진실하며 갈라지지 않으며 사랑하며 평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모든 갈라진 것 눈물겹게 하나로 묶는 양심은 밥알’이라는 결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밥알은 양심이자 열사들의 마음이었다. 짐작하건대, 늦봄은 이동수 군을 비롯한 열사들의 희생이 주는 뜻을 되새겨보고자 했다. 그 결과 그들의 분신과 투신 행동이 결국 양심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분신한 택시기사 박종만 열사 빈소에서 노래하는 사람들과 늦봄
 

12명 열사의 마음은 양심 그 자체

양심은 속임이 없는 진실이고, 12명 열사의 마음은 결국 양심 그 자체였다고 생각했다. 그 열사들의 주먹이 ‘잠자는 우리의 가슴을 때도 없이 두들겨 대고 있다’고 느낀, 옥중 늦봄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보자.

 
▶열사 소개
이름 사망일, 당시 나이 희생 배경
전태일 1970.11.13 22 청계 피복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외치며 분신
김상진 1975.4.12 25 서울 농대에서, 시위 학생 석방 위한 자유성토대회 도중 양심선언문을 읽고 할복, 다음날 이송 중 운명
김경숙 1979.8.11 21 YH노조 폐업에 맞서 신민당사 점거 농성투쟁 중 경찰 폭력진압에 맞서다 투신
김종태 1980.6.9 22 유서 ‘광주 시민의 넋을 위로하며’를 남기고 노동삼권 보장, 비상계엄해제 등을 외치며 이대 앞 네거리에서 분신
김의기 1980.5.30 21 광주항쟁의 비극을 알리려 시위를 결행, 기독교회관 창문으로 떨어져 운명(계엄군과 실랑이 있었다 함)
김태훈 1981.5.27 22 구타당하며 끌려가는 시위 학생들을 보고,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치며 도서관에서 투신
황정하 1983.11.16 22 서울대 시위 주동, 도서관 창문으로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 체포 분위기에서 추락
박종만 1984.11.30 36 민경교통 노조 복지부장으로 노동조합 탄압에 항의하며 분신
송광영 1985.10.21 27 경원대 재학 중, 학원악법 철폐와 광주학살 책임자 퇴진을 외치며 분신(9월17일)
이재호 1986.5.26 21 전방입소 반대와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며 신림동에서 분신(4월28일)
김세진 1986.5.3 21 전방입소 반대와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며 신림동에서 분신(4월28일)
이동수 1986.5.20 24 서울대 도서관에서 전두환 처단과 미제국주의 물러가라를 외치며 투신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문익환 (1999) 『문익환 전집 2권』시집2. 사계절출판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열사 정보 https://www.kdemo.or.kr/
  
 
밥알들의 양심

문익환

밥알들의 양심
땅의 양심은 밥알입니다
속살도 하얀 밥알들입니다
입 안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자근자근 철저하게 씹히는 밥알들입니다
툭툭 터지는 무지렁이들의 살점입니다 핏덩어리입니다
혓바닥 콕콕 찌르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목구멍만은 달큰한 맛으로 넘어갈 줄 아는
그윽한 마음입니다
살 속 뼛속으로 스며들며
머리카락 눈썹 손톱 발톱 키워 가는 생명입니다
높푸르른 하늘 받아들이는
두 맑은 눈망울입니다
바람 소리 새소리에 울리는 고막입니다
흙을 만지고 풀잎을 어루만지는
갓난애기 손가락 만지작거리는
보드라운 촉각입니다
그것은 한숨이기도 합니다
땅 꺼지는 한숨이기도 합니다
밭고랑처럼 주름진 얼굴입니다
나무 토막 같은 손입니다
구부러진 허리입니다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아이들의
굶주린 창자입니다
서른이 넘도록 노총각 신세를 면하지 못하면서도
농토를 지키는 농군들의 고달픈 삭신입니다
자식을 굶기면서까지 키우던 소
배를 찌르고 농약을 먹고 죽은 농부의 한입니다
성난 하늘
땅과 바다 우릉우릉 울리며 내려꽂는
불칼의 번뜩임입니다
치솟는 불길
공순이들의 사랑 희망 믿은 전태일입니다
잠자는 우리의 가슴 때도 없이 두들겨 대는
김상진 김경숙 김종태 김의기 김태훈 황정하 박종만 송광영 이재호 김세진 이동수의 주먹입니다
붉은 피 철철 흐르는 사랑입니다
역사의 힘줄입니다
모든 갈라진 것 눈물겹게 하나로
묶는 양심은 밥알입니다
농부들의 피눈물입니다
 
 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