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시 속의 인물>

조성만 열사 (2023년 6월호)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수경이 손잡고 휴전선 넘나들며 춤을 추고 싶구나” 
“배에 칼을 꽂고 떨어졌더니 모든 게 환히 잘 보이더구나”
명동성당 옥상서 할복 투신…

 
◇2023년 5월 15일 명동성당서 열린 조성만 열사 35주기 추모 기도회의 고인 영정. 장례식 당시와 같은 사진이다.
 
 

‘그때 그 자리에서’ 35주기 추모 기도회

지난 5월 15일 저녁, 어둑어둑해진 명동성당 앞마당 한쪽에 20여 개의 작은 촛불들이 놓였다. 촛불 안쪽으로 안경을 쓴 젊은 청년의 영정이 모셔지고, 대성당에서 청년을 위한 추모 미사를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 촛불을 하나씩 들고 반원 모양으로 둘러서서 추모 기도회를 시작했다. 기도회가 열린 성당 마당은 35년 전 청년이 할복 투신하여 떨어진 바로 그 자리였다. 이 청년은 세례명이 요셉인 조성만 군. 그는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가톨릭 교육관 옥상에서 25살의 젊음을 민족의 제단에 바쳤다.

1988년이라면 누구나 곧바로 88서울올림픽을 먼저 연상한다. 당시 5월의 거리에는 서울올림픽을 120여 일 앞두고 거리거리마다 축하 현수막을 내걸어 단군 이래 최대의 행사라며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었다. 그런 한편 일부에서는 올림픽이 군부 독재정권의 비 정당성을 감추려는 의도로 유치되었고 남북 대결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단독 개최 반대 및 남북한 공동 개최를 주장하고 있었다.

 

조국 통일 염원하며 미국 축출과 공동 올림픽 외쳐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고 올림픽을 앞둔 5월 시점에서 민주화 투쟁의 주요 쟁점은 양심수 석방과 수배자 해제 문제에 있었다. 5월 15일 명동성당에서도 ‘양심수 석방과 수배자 해제 촉구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었고, 성당 입구에서는 광주항쟁 계승을 위한 오월제 행사 중 ‘마구 달리기’를 진행 중이었다. 이때 구속자 가족들과 청년, 재야인사 등 수백 명이 모인 곳에서 서울대 화학과 2학년 재학 중이던 조성만이 할복 투신하며 외친 것은 통일에 대한 염원이었다.

조성만은 고교 1학년 때 광주에서의 학살 참상을 들었다. 가톨릭 사제가 되기를 원했던 그는 대학 재수 시절에 명동성당 청년연합회 소속 ‘가톨릭 민속연구회’에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사회문제에 눈뜨기 시작했고, 서울대 입학 후 군 복무를 마친 1987년 12월에는 구로구청 투표 부정 사건 농성에 참여, 구류 10일을 살았다. 1988년 민속연구회 회장이던 그는 광주 민중항쟁 8주년을 앞둔 5월 15일, “분단 상황 고착화하는 미제 놈들 몰아내자”, “올림픽 공동 개최하여 조국 통일 앞당기자”, “광주학살 진상규명 노태우를 처단하자”, “양심수 전원 석방하라”를 외치며 몸을 던졌다. ‘조국 통일을 염원하며 드린다’며 남긴 5장의 유서에서는, 반쪽 된 조국의 구성원들이 편안치 못한 것이 분단 44년의 현실이며, 그 책임은 한반도의 통일을 가로막는 미국과 대리 통치 세력인 군부정권에 있다고 규정짓고 미국 축출과 올림픽 공동 개최를 주장했다.

 

학생들에 충격받은 늦봄, 방북 결심

조 열사의 투신은 통일 이슈에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대학생들은 3월 말 남북 국토종단 순례대행진과 청년학생체육대회 개최를 북한에 제안하여 6월 10일 남북 학생 간 실무회담을 열기로 북측과 합의한 상태였다. 그러나 연세대에서 2만 명의 학생이 출정식을 하고 판문점으로 가려던 시도는 공권력의 원천 봉쇄로 무산되고 말았다. 늦봄은 일련의 사태에서 누구보다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늦봄은 방북을 결심했다.
 
제가 평양행을 결심한 것은 작년 6월 10일이었습니다. 학생들의 비장한 모습이 … 깨지는 걸 보면서 … 8월 15일 학생들의 판문점행이 또 좌절되는 걸 보고 다시 결심했습니다. (옥중편지 1989. 6. 4)

늦봄은 1989년 3월~4월에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늦봄의 뒤를 이어 임수경이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여하러 방북했고 그의 안전과 무사 귀환을 돕기 위해 천주교는 문규현 신부를 북한으로 보냈다. 4월부터 수감된 늦봄은 7~12월 중에 9편의 임수경 관련 시를 지었다. 그중 <수경아>라는 제목의 시 속에는, 임수경 외에 또 다른 주인공이 숨어 있다. 조성만 열사다. 이것은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 배에 칼을 꽂고 떨어졌더니’라는 구절로 판단할 수 있다.

 

임수경의 방북은 곧 조성만의 열망

조국 통일을 부르짖으며 투신한 열사의 뜻을 가장 먼저 실천에 나섰던 늦봄은, 용기 있게 감행한 수경이의 방북이 곧 성만이가 열망했던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수경이의 일거수일투족과 겨레의 벅찬 모습을 성만이가 하늘에서 모두 보았으리라 믿고, 그 감격을 성만이가 직접 말하는 형식으로 시 <수경이>를 썼다.
 
수경이 평양 가는 걸 난 다 보았다구 / 조국은 하나라고 외치는 네 목소리를 난 잘 들었다구 / 너를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는 북쪽 겨레들이 보여 / 나도 온몸 와들와들 떨며 울었다구 (시 「수경아」)

기쁨에 몸을 떨며 울었다는 성만이는 수경의 손을 잡아 휴전선을 넘나들며 춤추고 싶어 했다. 이것은 남북의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 버리고 자유롭게 오가는 날을 꿈꾸는 늦봄의 마음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늦봄, 조성만의 희생에 죄책감

하늘의 성만이는 이제 기쁨으로 충만할지 모른다. 그러나 늦봄의 마음 한편에는 안타까움과 죄스러움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 아닐까? 자신의 방북도 수경이의 방북도, 성만이의 처절한 고뇌와 절규, 할복 투신이 있고 난 이후에야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젊은 목숨은 그렇게 민족의 제단에 바쳐져야만 했는지. 늦봄은 이런 자신의 죄책감을 시의 앞부분에서 성만이의 입을 빌려 이렇게 적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 보이는 게 없더니
배에 칼을 꽂고 떨어졌더니 / 모든 게 환히 잘 보이더구나
이제 망월동 동지들 곁에 와 누우니 / 모든 게 더 환히 잘 보이는구나 (시 「수경아」)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한겨레신문.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 기도> 40회. 2022. 7. 4

 
수경아

문익환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는 게 없더니
아무리 귀를 후비고 들어도
들리는 소리 없더니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배에 칼을 꽂고 떨어졌더니
모든 게 환히 잘 보이더구나
모든 게 환히 잘 들리더구나
이제 망월동 동지들 곁에 와 누우니
모든 게 더 환히 잘 보이는구나
모든 게 더 환히 잘 들리는구나
백두에서 한라까지
울려오고 울려가는 저 소리 겨레의 소리
풀뿌리들을 타고
이렇듯 온몸에 잘도 울려오는구나
수경이 평양 가는 걸 난 다 보았다구
조국은 하나라고 외치는 네 목소리를 난 잘 들었다구
너를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는 북쪽 겨레들이 보여
나도 온몸 와들와들 떨며 울었다구
판문점으로 걸어 건너오는 수경이
문 신부의 손에서 빼앗아 가지고
바람아 불어라 구름아 흘러라
휴전선 넘나들며 춤을 추고 싶구나
1989. 12. 1.

 
◇ 조성만 열사 35주기 추모 기도회 모습. 장소는 열사가 할복투신한 지점인 명동성당 가톨릭교육관 옆이다.
 
▲ 고 조성만 열사 35주기 추모 사업
- 2023년 6월 3일(토) 오후 2시 온라인 음원 발표회
- 2023년 6월 10일(토) 오후 5시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 콘서트’ (명동성당 꼬스트홀)
 
 
◇늦봄이 쓴 조성만 열사의 비문을 박용길 장로가 쓴 붓글씨
 
 
◇조성만 열사 장례식에 참석해 앉아있는 문익환, 김영삼, 김대중(1988.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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