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문익환 평전』 저자 김형수 작가 (2023년 5월호)

“문익환은 그 자체로 교과서였다”
'이럴 때 어떻게 하지' 고민할 때마다 목사님을 그대로 따라하게 하면 됐다

  
 
◇신동엽문학관에서 만난 김형수 작가. 그는 문익환 목사가 자기 삶의 교과서 였다고 회상했다.  
 
 
[커버스토리] “죄송합니다, 그때 생각을 하니 갑자기 울컥해서…” 예상치 못한 눈물이었다. 『문익환 평전』의 저자 김형수 작가. 열사들의 장례 일에 몸을 사리지 않던 일흔 넷 노구의 문 목사를 떠올리다가 느닷없이 굵은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30년 가까운 긴 시간이 지났지만 문익환 목사는 여전히 그의 가슴속에 살아 있었던 것이다. 
『월간 문익환』의 새로운 기획 <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첫 주자는 김형수 작가이다. 부여에서 만난 그에게서 알려지지 않은 늦봄의 여러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말년의 문익환 목사를 회상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는 김형수 작가.

 
그를 만나기 위해 ‘월간 문익환 팀’ 전체가 그가 관장으로 있는 부여의 신동엽문학관으로 향했다. 지난 1년간 ‘월간 문익환’이 기사를 쓰며 가장 많이 참고한 책중 하나는 단연 『문익환 평전』이었다. 궁금했다. 그에게 문익환은 어떤 의미였으며, 어떤 계기로, 또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 방대한 분량의 『문익환 평전』이 나오게 됐을까? 스스로 낯을 심하게 가린다고는 하지만 늦봄을 설명하는 순간에는 눈빛이 이글거리는 대범함이 느껴졌다. (대면할 때는 소심하고 편지에서만 강경하다고 오해받은 바울로/바울이 떠오른다.) 두 시간여의 인터뷰를 통해 작가와의 대화를 정리했다. 대화의 분위기는 작가를 대면하는 팬의 설렘과 일타강사에 집중하는 수강생의 학구열이 뒤섞여 녹아있었다. ‘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 첫 번째 인물이었다.

 

“김형수! 기운 내!” 내이름 불러주셔서 황송

▶목사님 살아계실 때에 친분이 있으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제가 성격이 낯가림이 아주 심해요. 말을 먼저 거는 법이 없어요. 저는 목사님을 자주 뵈었는데 목사님이 저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복도에서 마주치면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이랬거든요. 그런데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후보가 김영삼후보에게 패배하고 분위기가 아주 침체됐었어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는 게 큰 눈으로는 한국 정치가 일정하게 진전을 이룬 건데 당시에는 주요 활동가들이 내상을 아주 크게 입은 사건이었어요. 다 기운 쭉 빠져서 단체들이 와해되고 그럴 때거든요. 그때 목사님이 “김형수! 기운 내!” 하시는 거예요. 아니 저를 기억을 못 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목사님이 제 이름까지 아시는 게 얼마나 황송한지… 아마  ‘임수경 통일문학상’ 때문에 기억을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거기 심사위원 할 때 심사위원장이 문익환 목사님이셨거든요. 작품을 뽑아서 알려드리고 시상식 할 때도 설명드리고 그래서 그때 이름을 아셨는가보다 추정을 하고 있어요.  

목사님과는 만나서 대화하고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쫓아다닌 거죠. ‘목사님 떴는데’ 그러면 막 가서 뒤에서 보고 좋아하고. 저는 당시에 판단하기 어려운 정세이거나 어떻게 하는지 좋을지 잘 모르겠을 때 늘 ‘문익환이 어떻게 판단했냐, 김근태가 어떻게 판단했냐’ 두 개가 척도였어요. 혹시 판단이 틀리더라도 그게 100% 신뢰할 수 있는, 사가 끼어있지 않은 어른의 판단이기 때문에 중시하는 그런 분이었어요. 
  
 

“그는 나의 동서남북이었고 나의 언어였다”

▶돌아가셨을 때 충격이 크셨겠네요.
충격을 크게 받았죠. 그래서 평전의 첫 부분을 그날의 장례식 분위기를 생각하면서 평전을 그렇게 시작했어요.  
 
1994년 1월의 하늘은 내게 오든의 시를 상기시킨다.
… 하늘에 휘갈겨 쓴다 그는 죽었다고
그는 가버렸다 하얀 비둘기들과
검은 장갑을 낀 교통순경이 있는 곳으로
그는 나의 동서남북이었고
나의 주일, 나의 휴일이었다
나의 대낮, 나의 한밤
나의 언어, 나의 노래였다 …
늘 함께 했으며, 늘 내게 마음의 명령을 내리던 우리들의 시대,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 같던 그 숨가쁜 시간의 맥박 소리가 멎어 있었다. 
『문익환 평전』 ‘프롤로그: 20세기가 지나간 뒤에’ 중
 
 

문성근 “내가 다 막겠다. 작가 마음대로 써라”

▶평전은 어떻게 쓰시게 되었나요?
평전 이야기가 먼저 이렇게 나왔다고 들었어요. 어떤 감독이 문익환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문성근 선배한테 찾아간 거예요. 그러니까 문성근 선배가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현재로서는 그의 스토리를 잘 모르고 문익환 목사의 부분적인 것만으로는 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문익환에 대한 글이 하나가 나오고 나서야 2차, 3차 작업이 가능하다”라고 했다고 들었어요. 후에 일산에서 문성근 선배가 이창동 감독, 황지우 시인하고 만나서 문익환 글이 하나 필요한데 누가 쓰면 좋을까 해서 작가회의 회원 주소록을 놓고 한 명씩 한 명씩 체크해서 제 이름을 찾아냈다고 했어요

저는 “작업하겠습니다” 했어요. 어떤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그것들을 극복해 오는, 끝없이 희망을 찾아내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이 길 뒷장이 21세기가 가야될 길이다, 그래서 나는 문익환 이야기를 여건만 되면 무조건 하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문익환이라고 하는 코드를 잡은 거지요.

문성근 선배가 성격이 문익환 목사님하고 많이 닮았고 멋있는 분이에요. 그때 뭐라고 얘기했냐면 ‘평전은 작가의 것이기 때문에 가족들을 비롯해서 그 어떤 것도 내가 다 막겠다. 작가 마음대로 쓰는 것이다. 대신에 부탁할 것은 절대로 책상에서 구상하지 말아라. 현장에서 구상을 해 달라’고 했어요. 취재비까지 대겠갰다고 했는데 아니 그렇게 좋은 환경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1997년에 바로 IMF가 닥쳐서 무기한 미루게 됐어요. 

 

통일맞이 단체와 함께 취재

▶취재와 집필은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그때부터 구체적으로 취재는 안 하지만 문익환 코드는 이제 들어와 있죠. 저는 출판사는 비운동권, 그리고 독자는 비한국이 중심이어야 된다고 생각했죠. 이건 번역해서 읽혀야 한다, 국내의 여러 관계 속에 놓여있는 관점 말고 더 큰 관점에서 문익환을 그려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한 거예요. 

1999년에 문호근(문익환의 장남) 감독님이 저를 불러서  통일맞이 단체에서 문익환 목사 자료를 구축해야 하니 구축하고 나서 그 자료로 글을 쓰면 되지 않겠냐고 해서 취재는 통일맞이하고 계속 같이 다녔어요. 저는 따로 메모를 하는 식으로.  

제가 평전을 쓰던 과정에 『문익환 전집』(1999)이 이미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자료를 복사하고 막 구하고 다니는데 그게 전집에 다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어요. 그걸 먼저 알았으면 많은 시간이 단축될 수 있었을 건데... 그때까지만 해도 르포라고 하는 게 꽤 살아있는 형식이었어요. 그걸 맨 처음에 참고했죠. 박용길 장로님은 문호근 감독님 만나서 연표 정리하는 그것이 맨 첫 번째 일이었어요. 연표 정리를 통해서 꽤 늦게 아는 것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 머릿속에는 명동소학교이면 6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용정에 살았던 때하고 시간이 안 맞는단 말이에요. 왜 안 맞는지, 1년 재수를 한 건지 찾아내야 되잖아요. 굉장히 늦게 안 게 명동학교는 대안학교라는 것이었어요. 제도 교육기관이 아니니까 학생들은 다 검정고시를 한번 봐야 되는 거예요. 또 다른 졸업장이 있어야 상급 학교를 갈 수 있으니까 문익환은 해성소학교에, 윤동주는 중국인 학교에 가게 된 거죠. 이런 것들이 시간이 오래 걸려요.  
 
 

집필원고 빌려줬다 돌려받지 못해 고생 

▶어려운 점은 없으셨어요? 
다른 걱정은 안 했고 교회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제가 기독교도가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를 공부해서 따라간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당시에는 문제 제기가 많이 됐어요. 문익환은 ‘목사님’인데 어떻게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이 쓰느냐는 것이었지요.  

취재 거의 끝나갈 무렵에 영국 유학 다녀온 분이 찾아왔었는데 제가 생각하는 문익환의 기독교에 대해 굉장히 크게 공감을 표하시면서 신앙만 붙잡고 있었던 우리들보다 오히려 진도가 더 나간 것 같다고 평을 아주 잘해 주신 분이었어요. 그런데 그분이 그 부분이 집필 돼 있으면 조금 빌려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빌려드렸는데 못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주류를 잊어먹은 거예요.  

또 조금 어려웠던 점이 문익환 목사님 자료가 너무 많아요. 메모며 설교 노트 기록들을 계속 연구하고 읽어야 하는데 그것의 존재를 몰랐고, 무엇보다도 못 구했고. 꽤 작업이 진행된 이후에 전집이 있다는 것을 늦게 발견해가지고 전집을 좀 안 본 측면도 있어요. 너무 허망한 거예요.  자료들 구하는데 얼마나 걸려서 고생했는데 전집에 다 있다니. 누구한테 문익환 자료 뭐 있더라 하면은 그거 빌려서 복사도 하고. 한번은 경향신문 뉴스메이커 디자이너 하나가 자료실에서 제가 못 구하고 적어놓은 자료의 꽤 많은 양을 거기서 복사를 해주기도 했어요.   

 

기록 없는 부분은 ‘서사적 상상력’으로

▶기록이 빠져있는 부분들을 어떻게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인가도 고민하셨을 텐데요. 
제가 매우 수공업적이고 취재를 잘 못하기 때문에 추리로 잡을 때가 꽤 많거든요. 그리고 또 이게 좀 약간 미신 같은 건데 추리가 사실로 드러날 때가 굉장히 많아요. 저는 이걸 ‘서사적 사유’라고 하는 게 존재한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논리적 사유처럼 서사적 사유에 의해서 이건 이렇게 써도 되겠다 하면 확인 안 됐어도 쓰는 거죠. 그럼 나중에 그 증거물이 나올 때가 되게 많아요. 
서사적 상상력이 없으면 쓰기가 어려워요. 예를 들어 기독교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저는 동생 문동환 목사가 조금 기독교 사상이 더 크고 문익환 목사는 민족 과제에 집착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문익환의 통일론은 민족 과제고 문동환의 인권, 평화는 범 인류 과제라고 생각했어요. 이때는 제가 비기독교예요. 기독교를 남의 일로 딱 보고 있을 때예요. 그런데 ‘아, 문익환이 놓인 자리가 여기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길이구나!’라고 저는 느꼈어요. 근대적 과제와 같은 부분적 과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이라고 하는 길을 문익환이 가고 있구나…. 나는 기독교를 잘 모르지만 이것이 기독교인 것 같다. 문익환의 삶이 기독교이고 문익환은 목사였다. 그래서 평전에 톤을 그렇게 했죠. 늘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 생각해보면 (문익환 목사에게) 히브리나 수유리나 같은 거예요. 
 
그의 생애는 지극히 기독교적이었다. 나서 죽을 때까지 그의 머릿속에서 그리스도의 시계는 멈춘 적이 없다. 심지어는 무의식중에 한 일까지도 성경 속의 시간에 맞추어서 진행되었다. 
『문익환 평전』 ‘북간도에 온 그리스도’ 중
 
나는 ‘목사님!’이 옳다고 보았다. 문익환은 그리스도인이요, 그가 추구해온 가치는 정치 사회적으로 인권운동, 민중운동, 통일운동 등으로 보이지만 내면적 실체는 ‘그리스도적 가치의 실현’이 아니었겠는가. 중년을 넘기면서 관심의 초점을 ‘교회에서 세계로’ 옮겨가지만 그러한 ‘동력’을 준 것도, 또 그러한 삶을 통해 도달하고자 한 곳도 ‘그리스도적 가치의 구현’이었다. 그는 재야의 실천을 통해 끝없이 그리스도인의 자리로 회귀한다.     
『문익환 평전』 ‘후일담: 낡은 수첩’ 중
 
 

김대중과 문익환의 통일론은 목적지가 다르다

▶평전에 담지 않은 내용이 있다면요? 
제가 김대중 통일론과 문익환 통일론은 다르다는 주장은 평전에서 안 했어요. 중립국 통일론 이야기하고 제도는 다 똑같아요. 그런데 목적지가 달라요. 제가 어제 장률 감독의 ‘두만강’이라고 하는 영화를 봤어요. 북에서 두만강 건너 마을이에요. 중국인 거죠. 탈북자들이 힘들어지면 여기로 와서 얻어가기도 하고 훔쳐가기도 하고, 특히 겨울철에 얼면 그냥 지나만 가면 되잖아요.  강폭도 크지도 않고 건넛마을 사람들인데 김대중 통일론의 이 사람들은 바깥에 있는 거죠. 이 공동체 바깥에 존재하는 중국인이니까. 근데 문익환은 생태공동체, 언어공동체, 문화공동체 이런 것이 신의 것이라서 체제가 마음대로 쪼개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남한 북한 것이 아니고, 통일 조국 것도 아니고 이 공동체의 것이다. 이런 유형의 대화를 정경모 선생하고 방북할 때 해요. 
 
정경모가 국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형님, 국경을 넘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나는 압록강을 국경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방금 우리가 지나친 곳이 다 우리 옛 선조들의 생활권인 발해문화권이요, 저 아래는 고구려 유적지거든.”
『문익환 평전』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중

문익환 목사님 본인이 중국 화룡현에서 태어났다고 썼나, 아니면 일제강점기 때 주소를 썼나 다시 목사님 자료를 검토해 보니 문익환 목사님은 ‘북간도’예요. 의식하고 한 일이죠. 신의 것을 신에게로 돌리라는 것이 문익환의 통일론이에요. 생태공동체, 문화공동체, 언어공동체 단위의 온전성은 파괴하지 말고 체제를 운영하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민에 의한 통일, 민통령이지요. 사실 김대중하고 같은 사람 같지만 김대중의 최종적 통일 운동의 라이벌은 문익환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문익환의 비판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일본, 북한 등 현장 취재, 평전 쓰는 데 5년 걸려

▶취재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신가요? 
평전 쓰는 데  5년 걸렸어요. 초판이 나온 게 2004년이에요. 그런데 2003년도에 많이 썼었어요. 저는 현장에서 구상하라는 문성근 선배 이야기가 너무나 인상 깊었기 때문에 어쨌거나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현장 취재를 ‘미국은 포기하자. 나머지는 다 간다’고 생각해서 북쪽 취재를 계속 추진하고 있었는데 2002년에 이루어졌어요. 북에서 한 일주일 정도였던 것 같아요. 당시 통일맞이 사무처장인 소설가 정도상하고 문성근 선배하고 저, 셋이 간 거예요. 문익환 이름으로는 허가가 나지 않아서 통일맞이하고 북쪽하고 어떤 관계로 통과가 됐을 거예요.

북에 도착 후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에 사람이 올라왔더라고요.  비행기 안에서 인사하고 첫날 호텔에 가서 묻더라고요. 문익환 목사님이 간 곳은 여기인데 어떻게 할 거냐고. 셋이서 상의 후에 문익환 목사님이 간 모든 곳, 우리는 무조건 간다고 얘기했더니 북측 사람들이 “감사합니다.” 그러더라고요.  일주일간의 시간표를 짰는데 (1989년에) 문익환 목사님 안내했던 사람을 동일하게 계속 세웠어요. 북쪽 취재는 그렇게 했고 이후 결과로 정도상 씨가 추진한 것이 『겨레말 큰사전』이고요.

사람들이 생각 안 해보는 영역인데  이데올로기가 다른 영역의 교류에 절대 안 되는 영역이 있어요. 그게 출판, 문학이에요. 사상에 가장 위험한 물건인 거예요. 그래서 대표끼리 정치적 논의하는 ‘작가 회담’은 되지만 ‘작가 대회’는 절대 안 돼요. 그런데 2005년에 남북 작가 대회를 했어요. 130명이 평양, 묘향산에서 백두산까지 종단했거든요. 이 대회가 북한 취재 때 약속된 거예요. 

연변, 명동촌은 99년도에 작업했고, 아마 2000년 무렵에 일본을 했어요. 일본은 유원호 선생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조사 다 해서 제가 굉장히 황송하게 취재를 했어요. 우리 문익환 형님 이야기를 쓰는 자가 문익환이니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셨지요. 연로하셔도 신체도 건강하고 에너지도 크고. 굉장한 어르신의 호위를 받아 가면서 일본 취재를 했지요.  

 

문익환은 타고난 최고의 명배우였다

▶저는 문익환 목사님을 글로만 봬서 어떤 느낌인지 짐작만 합니다.
그럼요, 안 본 분들은 잘 모르죠. 굉장히 중요한 교과서예요.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건지 그냥 동작, 행위 자체도 다 교과서예요. 어떤 사람이 난처해하면 문익환 목사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한번 보여주고 바로 따라하게 하면 될텐데 하고 속으로 생각했죠.  
또 가정에서 가족이 보는 모습하고 또 많이 달라요. 문성근 선배 고등학교 친구가 김정환이라는 시인이에요. 집에도 많이 놀러갔다는데 선배가 하는 말이 “야, 문성근 배우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문익환 목사가 진짜 배우야. 성근이는 삼류고, 문익환은 최고의 명배우지. 복장이며….” 그말을 듣고 사진들을 봤는데 언제, 어떤 자리에 있어도 진짜 배우예요. 주연같이. 많은 사람 속에 한쪽에 살짝 등장해도 자기 성격이 이미지로 확 드러나요. 그 자질을 굉장히 타고났어요.  
 
 
철저한 원칙주의 교수시절 별명은 ‘문이 쾅’ … 운동 현장에서는 친근한 어른
▶문익환? 문이쾅!
문익환 목사의 성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별명 하나. 한신대에서의 별명이 ‘문이 쾅!’이었어요. 그 선생님 진짜 인기 없었겠다 싶은게 예를 들어 69점이 낙제라고 하면 1점 올려줄 수도 있잖아요. 낙제면 납부금을 한 번 더 내게 되는데. 그런데도 얄짤없었어요. 그런 원칙적인 분이었는데 어느날 거리로 딱 나오는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분이 돼서 전대협 세대들에게는 문익환 목사님이 가장 편안하고 친근한 분이었을 거예요. 막 문익환 목사님 막 업고 다니고, 팔짱 끼고, 어깨동무도 하고, 주저앉아서 술 마시고….
 
 
◇신동엽문학관 강당에서 ‘월간 문익환’ 팀과 인터뷰 중인 김형수 관장.
   
 

문익환의 언어처럼 좀 더 쉽게 썼더라면…

▶책 출간 이후 여러 평가도 있었을 텐데요.
제가 처음에는 한국 바깥을 생각하고 썼다고 했잖아요. 객관적으로 한국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이 삶은 뭔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시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 부분이 조금 어렵다고 그러더라고요. 조금 더 쉽게 대중적으로 썼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문익환 목사님 글 때문에 더 그런건데 1965년 문익환 목사님이 쓴 짧은 논문을 보면 개념어를 구사하는 게 굉장히 세련됐어요. 이 양반 철학 공부 많이 하신 분이라는 것이 딱 느껴져요. 그런데 나중에 활동할 때는 그런 냄새가 전혀 안 나잖아요. 모든 말이 너무 편리하고. 세월이 흘러놓고 보니까 이게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는 그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통일을 위한 새벽 기관차’라는 식의 표현이나 구호들은 10년이 흘러 2010년대에 딱 와버리면 찾아볼 수가 없잖아요.  이데올로기 덩어리 같아가지고. 그런데 문익환 목사님의 ‘하나가 된다는 것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같은 평이해 보였던 낱말만 새로운 것으로 계속 남아있죠. 이런 말들 지금 그대로 다 유효하잖아요. 목사님 같은 분이 명언을 좀 딱딱 뱉어주지 왜 이렇게 명문이 없어 그랬는데 그것이 다 명언이었어요. 당시 우리가 멋있다고 생각한 말들이 진짜 촌스럽고. 몇 년 사용해 버리면 수명이 끝나버리는 낱말들을 계속 썼고 문익환 목사님이 장엄하고 장구한 언어들을 썼지요. 그런 의미에서 평전에 조금 더 쉽고 생명력이 긴 문장을 쓰려고 했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드라마-영화 같은 2차 3차 저작물 안 나와 아쉬움 

▶요즘 세대는 문익환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평전을 국경 너머를 염두에 두고 쓸 때 더 중요한 우리 공동체에 대해서는 2차, 3차 텍스트로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어요. 글이 있으니 드라마, 영화, 연극, 만화 같은 걸로 다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잘 안 나와서 이 부분이 많이 아쉽고 그랬지요. 단절되지 않고 2차, 3차 텍스트로 전달되면 문익환에게 매혹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너무 많으니까. 제 생각에 문익환 목사는 왜 안 되냐 하면 그건 사람이 죽으면 되거든요. 죽은 사람은 때리지 않을 거 아니에요. 위험하지 않잖아요. 문익환은 안 죽어서 그래요. 문익환이 회자되면 어떤 정치 세력은 손해 보고, 이득을 보고 막 이렇게 살아서 움직여버리는 거예요. 이
것 때문에 문익환은 우수 도서에도 뽑히지 않고 그런 기대를 하기가 좀 어려워요. 하여튼 문익환은 아직 객관화되는 자리로 가지 않았다라는 게 제 생각이에요. 드라마를 시도했다가 실패한 거 제가 여러 번 봤어요. 지금 센 힘이 숨어있기 때문에 지금 다루기가 어려운 거 아니겠어요.   

 
◇신동엽시인 생가 마루에 앉아있는 김형수 작가. 2014년부터 충남 부여의 신동엽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다.
 

<글: 박에바>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쓰는 것 보다는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수동적 내향인, ISTP.





[참고문헌]
김형수 (2018). 『문익환 평전』. 파주: 다산책방.🔗(알라딘 도서정보)

 
📝 작가 김형수는? 
1959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고 광주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다. 1985년 『민중시 2』에 <배고픈 다리>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지내며 2005년 남북작가대회를 주도했다. 2014년부터 부여에서 신동엽문학관 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시집 『가끔씩 쉬었다 간다는 것』, 『빗방울에 관한 추억』, 가끔 이렇게 허깨비를 본다』, 장편소설 『나의 트로트 시대』 『조드-가난한 성자들(1,2)』,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평론집 『반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등이 있다. 외에 『흩어진 중심-한국문학에서 주목할 장면들』,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삶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작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이 있다. 평전은 『문익환 평전』(2004, 2018), 『소태산 평전』(2016), 『김남주 평전』(2022)을 썼다. 
 

신동엽문학관 김형수 관장이 추천하는 신동엽-문익환 같이 읽기

 
문익환 목사님이 12살 위인데 신동엽 시를 정말 열심히 읽으셨더라고요.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시 속에 문익환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신동엽이 써놓은 시가 1편이라고 한다면 문익환 목사가 후편을 쓴 거지요. 함께 감상해 보세요. 
 
(...)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다가 참
재미난 꿈을 꾸었어.
 
그 중립지대가
요술을 부리데.
너구리새끼 사람새끼 곰새끼 노루새끼들
발가벗고 뛰어노는 폭 십리의 중립지대가
점점 팽창되는데,
 
그 평화지대 양쪽에서
총부리 마주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
물방게처럼
한 떼는 서귀포 밖
한 떼는 두만강 밖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총칼들 내던져 버리데. (...)

-신동엽,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1968)
 
(...) 그도 아니면
이런 꿈은 어떻겠소?
그무덤 앞에서 샘이 솟아
서해바다로 서해바다로 흐르면서
휴전선 원시림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
한려수도를 건너뛰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
그리고 우리 모두
짐승이 되어 산과 들을 뛰노는 꿈,
새가 되어 신나게 하늘을 나는 꿈,
물고기가 되어 펄떡펄떡 뛰며 강과 바다를 누비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문익환, ‘꿈을 비는 마음’ (1978)

 ※ 자세한 설명은 유튜브 채널 ‘🔗김형수의문학난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월간 문익환_월간 문익환이 만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