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과거에서 온 편지>

1979년 5월 8일 어버이날 박용길의 편지 (2023년 5월호)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44년 전 박용길이 보낸 뜻깊은 하루

  
 
◇박용길, 1979년 5월 8일 
 
 
당신께 드립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황득순[함석헌의 부인]님 1주기, 문[동환]박사설교 이[문영]박사 기도
그 따님이 토론토에서 임마누엘 엄마[문익환, 박용길의 딸] 만났는데 애기[외손자]가 좋고
엄마가 애많이 쓰지만 모두 건강하고 교회에 잘 나온답니다.
편지 꺼내보면서 ‘아라스카’를 찾아 순대 세 도시락(천원으로 올랐음) 
사다가 마침 작은 집에서 도라오신 어머님[문익환의 모친] 점심 대접 하였지요.
기름지고 맛이 있어서 잘 잡수셨다고합니다. 너머 늦었지만…
오는 길에 동대문에서 고추모종 스물, 도마도 모종 스물, 가지모종 열 사왔는데
앞 뒷집에 골고루 심었읍니다.
바우[문익환, 박용길의 장손]가 할머님하고 소리내어 잘 웃으며 놀다가 앞 집으로 나가고
엄마[문익환, 박용길의 큰며느리]는 오늘도 독창이 유관순기념관에서 있어서 늦을 거예요. 이틀동안…
한빛교회 여신도회에서 어버이날에 정성과 기도를 보낸답니다.
저녁에 제일교회에서 무용극이 있었는데 서[남동]목사님은 이것이 여성신학이라고 하시는군요.
길게 쓰려고 했지만 오늘은 이만 끝이고 큰 삼춘[문의근]이 안은 바우를 보내드립니다.
하루 하루 안녕하세요.
1979. 5. 8.
길 드림

 ※ 편지 내용을 옮겨 적을 때 원래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문체와 띄어쓰기를 가능한 한 살렸으며 다만 내용 이해를 위해 생략된 이름과 설명을 괄호 [   ]안에 추가하였습니다.

 

옥바라지 아내의 어버이날은? 

결혼을 하고보니 5월에 있는 여러 기념일 중에서 가장 마음이 쓰이는 것이 어버이날이었다. 내 부모만 일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던 것이 여러 역할과 관계가 더해지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듯도 하다. 대한민국에 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어버이날에 얽힌 사연이 한 두가지 정도는 있지 않을까. 민주화와 통일 운동의 여정에서 10년 3개월간 감옥살이를 한 문익환을 남편으로 둔 박용길은 어떠했을까. 5월의 편지는 지금으로부터 44년 전인 1979년 5월 8일에 쓴 박용길의 편지를 가져왔다. 그녀는 그해로 60세가 되었고 곧 결혼 35주년을 맞고 있었으며 며느리이자 시어머니였다. 그녀가 어버이날에 쓴 편지 속에는 평범하지만 특별했던, 무엇보다 여러 역할로 바빴던 그날 하루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시 문익환은 1978년 10월 13일 기독교회관 금요기도회에서 낭독된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고발하는 성명서(유신헌법 반대성명서)를 공모・준비한 혐의로 형집행정지가 취소되어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는 문익환이 경험한 여섯번의 수감시절 중 두번째에 해당되는 때로 그는 1978년 10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15개월간 서대문과 안양에 갇힌 상태였다. 게다가 편지쓰기마저 한달에 한통으로 정해져 있어 문익환은 이를 최대로 이용해 깨알같은 내용을 적어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쓰여진 박용길의 편지는 매일 매일 바깥의 일상을 풍부하게 담아 보내면서 남편의 일상을 지속하게 해주는 중요한 존재였다. 

 

추도예배로 시작해 편지쓰기로 마무리

 
추도예배(쌍문동) → 순댓국집 아라스카(종로) → 모종 구입(동대문) → 마당에 모종심기(수유리 집) → 무용극 관람(오장동 서울제일교회) → 편지쓰기
 
박용길의 어버이날 첫 일정은 스승으로 존경하던 함석헌 선생의 부인 황득순 여사의 1주기 행사에 가는 것이었다. 쌍문동 함선생의 자택에서 오전 9시 30분께 열린 추도예배에는 김대중 선생 내외 및 공덕귀 여사 등 약 50여명의 손님들이 참석했다(씨알의 소리, 1979. 6월호). 오랜 기간 인연을 맺어온 사이였던 박용길 역시 이 자리에 있었다. 운좋게도 그 날 같이 참석한 지인에게서 캐나다에 살던 딸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예배를 마친 그녀는 서둘러 종로에 있는 함경도 순대를 하는 식당을 찾아 갔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문익환이 보낸 4월 편지에서 찾을 수 있다. 
 
어머님
“... 저번 접견때 깜박 잊었는데, 맏아들이 대접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종로에 있는 함경도 순댓집에 가셔서 순댓국에 곁들여서 거기서 내높는 순대를 잡수세요. 그것 잡수시기까지 어머님 금년 생신을 아직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부디 건강한 가운데 오래 사세요…”
 
봄길에게
“....우선 종로 함경도 순댓집 가는 길. 청계천 3가에서 31로 쪽으로 가다가 31로 못 미쳐서 마지막 골목으로 종로 쪽으로 들어가면 아라스카라는 아크릴 간판이 보일 거요. 어머니를 자주 모시고 가서 대접해 드리시오(문익환, 1979. 4. 16).” 
 
추도예배를 마친 박용길은 남편의 편지를 펼쳐보면서 순댓국집 아라스카를 찾았고 그날 산 순대 도시락은 가족의 점심이 되었다. 세상과 단절된 채 감옥에 갇혔지만 남편의 마음을 헤아리는 아내가 있어 문익환의 말은 실행력을 가질 수 있었다. 박용길은 편지에 순대 도시락 가격이 “천원으로 올랐음”이라고 소소한 정보까지도 빈틈없이 알려주고 있다. 지금 이 가게는 없어졌는데 아쉬운 마음에 찾아 보니 2007년 어느 블로거가 올린 게시물 속에 “고급순대 알라스카”라고 쓴 순대국집 간판과 메뉴판 사진이 남아있다. 물론 순대 도시락의 가격은 천원에서 여덟 배나 올라 어느 새 팔천원이 되어 있었다.

박용길은 돌아오는 길에 동대문에 들러 모종을 오십 개나 샀고 그날 오후 일정은 사온 모종을 심는 것이었다. 그녀는 고추, 토마토, 가지 모종을 자신의 집 뿐 아니라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있는 큰아들네 집에도 골고루 심었다. 지금은 온통 꽃밭인 통일의 집 마당이 과거 가족들의 먹거리가 자라던 곳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여러 일정에 지쳐서 피곤할 법 한 저녁이었지만 그녀는 박형규 목사가 이끌던 서울제일교회에서 열린 무용극을 관람했다. 

길었던 어버이날 하루의 끝은 아마도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쓰기가 아니었을까. 지금은 오래 된 탓에 누렇게 변해 있지만 한지에 정성껏 붓글씨로 쓴 편지는 서대문으로 보내져 남편의 기쁨이 되었고 지금까지 잘 남겨져서 우리에게 그 날의 하루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당신의 붓글씨 쓰기가 궤도에 오른 것 같아서 정말 기쁘군요. 좋은 작품을 많이 많이 … (문익환, 1979. 5. 16). 
 


<글: 아키비스트 지노>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와 함께 걷고 있는 아키비스트, 늦봄과 봄길의 기록을 아끼고 그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




 
[관련 기록]
박용길, 당신께, 1979. 5. 8
문익환, 옥중편지, 1979. 4. 16
문익환, 옥중편지, 1979. 5. 16
씨알의 소리사, “황득순여사 1주기 추억”, 씨알의 소리, 1979. 6, p.98

[키워드]
두번째 수감, 어버이날
함석헌, 황득순, 문영금
서울구치소, 종로 알라스카(아라스카), 통일의 집, 서울제일교회
한지에 붓글씨

 
📝 코너 소개
'과거에서 온 편지'는 늦봄 문익환과 봄길 박용길이 쓴 편지를 함께 읽는 코너입니다. 지난해에도 <월간 문익환>을 통해 편지는 여러 차례 다루어지곤 했지만(특히 지난 2022년 8월호 ‘옥중의 늦봄’에서 집중 조명) 여러 맥락에서 필요한 만큼 씩만 짧게 인용되곤 했던 터라 아쉬움이 남아서 좀더 편지에 집중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늦봄의 감옥 시절에 봄길과 주고 받은 편지를 대상으로 매월 그 달에 쓴 편지를 골라서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편지가 선택될지는 그 달에 쓴 편지가 얼마만큼 남아있는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등을 살펴보고 당시의 사회와 문화, 가족 생활처럼 지금의 우리도 공감할수 있는 것들로 골라보려고 합니다. 어쩌면 흘러간 과거의 얘기일 수 있지만 먼 듯 가까운 과거의 편지에 담겨 있는 그 때는 늦봄과 봄길뿐 아니라 우리의 부모세대가 함께 살았던 시절일 것입니다. 오늘의 ‘과거’는 지금의 나에게도 어떤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까요. 
 
<월간 문익환_과거에서 온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