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이달의 사건>

1986년 5월 서울대 이동수 분신 (2023년 5월호)

늦봄의 서울대 강연도중 도서관 옥상서 투신
4월 김세진 이재호 이어 5월도 잇따른 희생 
배후로 지목된 늦봄, 혐의 없자 집시법으로 구속…네 번째 수감생활

 
 

 ◇1986년 5월 21일 민통련 사무실에 백기완 계훈제 등이 모여 이동수 분신 사건으로 체포된 문익환 목사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박용수(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제공)
 
 
1986년 5월20일, 만 68세였던 늦봄은 서울대학교 오월제 행사에서 총학생회 초청 강연(주제: 광주민중항쟁의 민족사적 의의)을 하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이때 늦봄을 향해 어머니 김신묵 여사가 신신당부했다. “옛날 만주에서 독립군 치고 자살한 사람은 없었다. 일본 놈 하나라도 찔러 죽이고 죽었지. 그런데 왜 요새 젊은 학생들은 그렇게 제 몸에 불을 지르고 죽지? 너 서울대학에 가거든 다시는 자결하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일러주어라.” 1985년 10월 경원대 송광영, 1986년 3월 노동자 박영진의 분신에 이어, 불과 20여 일 전인 4월 28일에는 서울대 이재호 김세진 두 학생이 ‘양키 용병교육 전방 입소 거부’를 외치며 분신하는 등 젊은 목숨의 아까운 희생이 이어지는 것을 걱정하며 한 부탁이었다.

늦봄은 강연에서 어머니의 당부를 먼저 하려 했지만, 신문에서 자신을 과격파 두목으로 취급한 것을 읽고 이것부터 이야기하다 보니 어머니의 당부를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강연 도중 도서관 옥상에서 농대 이동수 군이 ‘미제는 물러가라’ 등을 외치며 분신 투신하는 일이 발생했다. 강연을 마친 늦봄은 21일 대구로 이동하여 <한국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염원하고 지지하는 전 국민과 해외의 모든 인사들에게 드리는 말씀>을 발표, 학생들의 분신 희생의 중단 등을 호소한 후, 계명대에서 예정된 강연을 진행했다. 늦봄은 어머니의 당부를 먼저 말하지 못한 것을 두고 후회막급이라며 가슴 아파했다(옥중편지 1986. 6. 13). 

경찰은 이동수 군의 분신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늦봄을 지명 수배했고 이를 안 늦봄은 경찰에 출두하여 사실이 아님을 밝혀 혐의를 벗었지만, 경찰은 집시법 위반죄로 변경하여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늦봄의 네 번째 수감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글: 조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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