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2월 <인간적인 문익환>

🈷️ 호칭 에피소드로 본 늦봄의 성품

“이제 당신은 코스모스가 아니라 해바라기야요”
 단호한 봄길 “저는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 보름 동안 혼자만의 설렘, 아내의 한마디에 꺾여버린 보통 남편
 
 
◇늦봄이 좋아했던 해바라기 그림. 수감중에 벽에 걸어놓기도 했다. 
 

방북 사건으로 수감되어 옥중에서 해를 넘긴 1990년 1월 20일경 늦봄은 꿈속에서 해바라기를 보았다. 푹 수그린 탐스러운 모습이었다. 아내 봄길과 함께 길을 가는데, 그것도 서울 거리를, 커다랗고 잘 익어 머리를 푹 숙인 해바라기가 두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꿈을 깬 늦봄의 생각으로는 여태까지 그렇게 큰 해바라기가 활짝 피어나는 웃음으로 소담스럽게 익어가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늦봄 “이제 당신은 코스모스가 아니라 해바라기야요”

▲호기롭게 제안한 호칭 변경
며칠 후 면회 차 접견실에 들어서는 봄길의 모습을 본 늦봄은 아내의 활짝 웃는 얼굴이 그대로 꿈에서 본 해바라기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신 웃음꽃’이라는 시를 썼다.
 
접견장 칸막이를 넘어/ 날아오는 당신
이슬 머금은 꽃 웃음이어라
무슨 꽃이냐구/ 웃음꽃이지
동해 바다에서 떠오르는
당신 이 산천의 눈물겨운 희망이어라
내 얼굴에서 환히 피어나는
당신 해바라기 웃음이어라
(봄길의 면회 후 1월 25일 쓴 시)
 

이 시를 쓴 후 늦봄은 봄길의 애칭을 코스모스가 아니라 해바라기로 바꾸기로 마음먹고 2월 10일 편지로 봄길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새 호칭 ‘해바라기님’으로 아내를 불렀고, 첫 구절은 ‘이제 나에게 당신은 코스모스가 아니라 해바라기야요’이었다. 자신의 좋은 결심을 전하기에 설레면서도 내심 당당한 태도라고도 읽힐 수 있는 말투였다. 해바라기의 탐스러운 모습에서 정말 성숙한 인간성, 그러면서도 아내처럼 겸허한 모습을 느낀다는 생각을 말하며, 꿈 이야기와 접견장에 나타난 봄길의 얼굴, 시 내용을 언급하며 호칭 변경을 생각하게 된 배경을 자세히 전했다. 동시에 “내 이름도 ‘늦봄’에서 ‘갈 테야’로 바꾸면 어떨까요?”라며 슬며시 물어보았다. 학생들이 자신을 ‘갈 테야’ 목사로 부른다니까 라며. 

편지를 보낸 다음 날인 2월 11일, 늦봄은 전날 보낸 편지의 내용을 시로 지었다. ‘이건 꿈이다’라는 제목의 시에서 함께 걷는 길, 머리 숙인 해바라기, 기상 나팔소리에 깬 꿈, 접견장에 온 아내 웃음 등을 묘사했다. 이때부터 25일까지 보름 동안 늦봄은 아내와 자신에게 새 호칭을 선사하고 부르게 된 기쁨에 설레며 들뜬 날들을 보냈다.
 
 

늦봄 “아름다운 꽃이 아니어서 불만은 아니겠지요?”

▲아내의 눈치 살피며 공감을 유도
10일부터 25일까지 아내에게 보낸 7회의 편지를 보면, 서두에서 ‘(우리)해바라기님’ 호칭을 7회, 말미에 ‘(당신의) 갈 테야’를 6회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늦봄은 새 호칭을 전하며 아내의 반응이 어떨지 다소 신경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17일 편지에서 해바라기 호칭이 잘 어울린다며 동의를 유도함과 동시에 살짝 눈치 아닌 눈치를 보는 듯한 태도가 있는듯 하다. 
 
해바라기란 아기자기하게 아름다운 꽃이 아니어서 불만은 아니겠지요? 당신의 원숙한 인생이 그렇게 잘 익은, 그러면서도 그렇게 커다란 해바라기로 꿈에 계시되었으니 안 부를 수 없군요. 해바라기씨가 입 속에 퍼뜨리는 그 구수한 향기, 그건 나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서 맛보는 향기가 아닐까 싶군요. 그 향기가 완벽하게 숨겨져 있지요. 입에 들어가서 씹히기까지는. 그래서 더 그윽한 거죠. (옥중편지 1990. 2. 17)
 
 

봄길 “저는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여 바로 거절한 아내 
늦봄은 변호사 등 다른 사람에게 쓴 편지에서도 자기 새 이름을 소개했다. ‘젊은이들의 명령을 따라 나의 이름 갈 테야 올림’, ‘지금은 나의 새 이름 갈 테야 올림’ 등으로 호기롭고 자랑스러운 느낌의 말투였다. 그러던 중 아내의 생각을 담은 편지가 도착했다. 아내의 답은 명료했다.
 
저는 둥근 달님과 코쓰모쓰가 좋아요. 해를 바라보는 것과 황금빛이 좋기는 하지만 너머 화려한 것 같아요. “갈 테야”는 누구나 생각하고 당신을 보면 생각나는 말이지만 아호는 늦봄으로 두는 것이 좋겠어요. … 저는 이름이나 아호를 바꾸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봄길 편지 당신께 제279신 1990. 2. 16(금)
 
 

늦봄 “해바라기가 싫다니 할 수 없지요”

▲지체 없이 꼬리 내린 늦봄
16일에 쓴 아내의 편지는 매우 지체되어, 늦봄이 25일 편지를 보낸 후에야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25일 편지까지도 ‘해바라기님’과 ‘갈 테야’로 썼던 늦봄은 곧바로 26일 편지에서 새 호칭을 철회하고 말았다. 10일 최초 편지에서 설명했던 호칭 변경 의도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는 했지만.
 
나의 코스모스께. 해바라기가 싫다니 하는 수 없지요. … 당신의 해바라기 웃음과 관계가 있어서 … 속에서 스며 나오는 성숙된 향기도 당신과 잘 어울리는 … 당신의 애칭을 바꾸지 않는다면 내 늦봄도 그대로 둬야지요 … 당신의 늦봄 올림 (옥중편지 1990. 2. 26)
 
호칭은 코스모스와 늦봄으로 복귀했다. 보름 동안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찼던 행동은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아내의 분명한 의견 앞에서 시작과 동시에 무너졌다. 재차 고려해 볼 엄두는 낼 수 없었다. 타당한 이유도 있고 좋은 의도에서 꺼낸 애칭의 변경 시도였지만, 그것은 아내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남편의 호기로운 꿈에 불과했다. 동경 유학 연애 시절부터 불러온 애칭 코스모스는 아내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보배이고 상징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늦봄도 아내의 감정과 판단에 반하여 고집을 부리거나 호소해보지 못하고 무력하게 무너지는 보통 남편이었다.
 
 
◇도쿄시절 군인이었던 문익환 목사와 박용길 장로(1950년대 초)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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