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1월 <늦봄의 별세>

🈷️ 나의 아버지 문익환 목사는 이렇게 가셨습니다

[특별기고] 문영금(늦봄의 딸, 통일의 집 관장)

안방 누우신 아버지 “이런 아픔 처음이야”
체한 것 같다기에 별일 아닌 줄 알았는데…
1994년 1월 18일 저녁 8시 35분. 청천벽력 같은 일 벌어져

 
 
 ◇통일의 집 거실에 걸려있는 문익환 목사의 판화와 이를 바라보는 문 목사의 딸 문영금 통일의 집 관장.
 
  

가슴통증에도 신음 한마디 내지 않으셔

1994년 1월 18일은 청천벽력 같은 날이었다. 그날은 몹시 추웠다.
그날 오후, 아버지가 아프셔서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어머니를 모시고 차를 운전하여 병원에 갔는데, 아버지는 진료를 받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집에 와 보니 아버지는 안방에 누워 계셨다. 어떻게 아프냐고 여쭤보았더니 가슴에서 위쪽으로 쭉 뻗어 아프다며 이런 아픔은 처음이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신음 한마디 내지 않으셨다.
 
 

병원 갔다가 진료안받고 그냥 돌아와

상황은 이랬다. 아버지는 그날 아침 평소대로 새로 문을 연 통일맞이 사무실이 있는 종로 3가에 출근해 친지들과 점심식사를 하고 사무실로 돌아오셨다. 그런데 가슴에 통증이 느껴져 혼자 방에서 요가와 심호흡, 지압 등으로 통증을 가라앉혀 보려고 하셨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 수행비서 임윤호에게 영동 세브란스로 가자고 하였다. 수행비서 생각에는 신촌 세브란스가 더 가까우니까 그리로 가서 먼저 내려드렸는데, 차를 주차하고 가보니 아버지가 집에 가자며 벌써 나와 기다리고 계셨다고 한다.

병원 안은 너무 혼잡하고 위급한 사람이 많아 보였다고 한다. 아마 그곳에서 기다리기도 힘들었던 것 같았다. 가족이었으면 그래도 진료 한번 받아보자고 우기기라도 해 보았겠지만 젊은 직원은 어른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응급실 갔지만 이미 심장마비 사망 판정

막내아들 성근이도 소식을 듣고 집으로 달려왔다. 둘째 아들 의근이와 여러분들이 의사들에게 연락을 하여 의사 한 분이 집으로 왕진을 왔다. 가슴이 답답하고 아프다고 하니 체한 것 같다고 죽을 드시라고 하면서 돌아갔다. 별일이 아닌 거라 생각하고 직원들도 돌아가고 성근이도 약속이 있다고 자리를 떴다. 사위와 외손녀 문숙이가 죽거리로 좁쌀을 사서 아버지 집에 갔다. 문숙이가 방에 가보니 아버지는 어머니 박용길 장로와 손님들에게 둘러싸여 토하시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고 한다. 손님들은 “목사님, 목사님 정신 차려보세요” 하며 등을 두드리고 흔들고 했는데 결국 아버지는 쓰러지고 말았단다. 사위는 119에 연락하고 집에 돌아와 있던 나에게도 빨리 오라고 전화를 했다. 나는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차를 가지고 아버지 집으로 가 보니 벌써 돌아가신 것 같았다. 구급차가 오자 사위가 가까운 한일병원으로 모시고, 나와 첫째며느리 정은숙은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어머니와 손녀 문숙이는 집에 남아 있었다. 병원 응급실로 가니 의사는 이미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했다. 그때가 오후 8시 35분 경이었다. 우리는 가족들과 유원규 목사님께 연락을 드리고 한일병원 영안실을 잡았다.

TV에 자막으로 속보가 나오고 9시 뉴스에서 보도되면서 놀란 가족, 친지들의 황망한 발길이 집으로, 병원 영안실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알리지 않았어도 많은 분들이 언론보도를 보고 달려왔다.
 
 

망연자실한 박용길의 모습 잊지 못해

집에 있던 외손녀 문숙은 전화를 받고 망연자실한 할머니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임수경을 비롯한 여러분들이 집으로 찾아왔다가 황급히 병원으로 달려가던 모습을 기억한다고도 했다. 가까운 수유리 한신대 교수들이 오셔서 집에서는 장례를 치를 수 없으니 빈소를 한신대로 옮기자고 제안해 주셨다. 그날 밤으로 빈소를 한신대 강의실로 옮기고 조문객을 받기 시작했다.
 
 
◇ 한신대에 마련된 문익환 목사의 빈소. 동생 문동환 목사가 조문객과 인사하고 있다.
 

겨레장으로 5일 동안 장례 치르기로

급히 장례위원회가 꾸려졌다. 국장도 국민장도 할 수가 없으니 남북 겨레의 뜻을 모아 겨레장으로 5일 동안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장례일정 등은 장례위원회에서 결정하고, 예배와 손님 접대 등은 여러 단체들이 순번을 정해 담당했다. 예배는 학교 안 예배실에서 보고, 학생 기숙사 식당을 식사장소로 정했다. 옛 식당 자리에서는 걸개그림을 그리고 운동장은 주차장으로 썼다. 마침 겨울방학이어서 학교 전체를 장례식장으로 쓴 셈이다. 학교 측과 소소한 시비도 있었다. 신학교에서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하였고 장례 담당 측에서는 조문객에게 그 정도 대접은 해야 한다고 맞섰다. 조문객들이 끝도 없이 모여들었다. 친지와 동지들뿐만 아니라 학생, 노동자들이 단체로 왔다. 조문객들이 줄을 지어 여러 명씩 한꺼번에 절을 하고 조화를 바쳤다. 모든 일정을 장례위원회에서 주관하여 가족들은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 문익환 목사 장례식에서 박형규 목사 
 
 
장례식은 1월 22일 한신대 마당에서 치르고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노제를 지냈다. 노제 장소까지는 운구차를 앞세우고 만장을 휘날리며 행진을 하였다. 성근이는 영정을 들고 지하철로 종로 3가 통일맞이 사무실에 갔다가 노제 장소로 갔다. 알려진 배우가 영정을 들고 가니 몇몇 사람들은 그렇게 가야 하는 줄 알고 따라가기도 했다고 한다.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했다. 마석까지는 당국에서 교통통제를 해주어 신호에 걸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몹시도 추운 날 눈발이 날렸다. 우리는 군중 속에서 떠밀려 다녔다.

재야에서 여러 논의의 중심을 잡아주던 분이 갑자기 가시니 모두들 황망해 하였고, 몇 분은 앞으로 재야의 전열이 흔들릴 거라며 걱정하였다.
 
 
◇ 문익환 목사 장례식을 마치고 한신대에서 나가는 운구행렬과 만장을 들고 그 뒤를 좇는 사람들
 

아버지 묻으며 “너무 아깝다”는 생각

꼭 필요할 때 안 계시는구나! 이 죽음은 무슨 뜻이 있을까? 마석 모란공원 언 땅속에 관을 묻으며 나는 참 아깝다는 생각을 했다. 하관예배 때 배야섭 목사님 말씀이 “여기 문익환을 묻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심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큰 위로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뜻을 이어갈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에 여러 가지 소문이 많았다. 어떤 이는 독살 당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북과 범민련 회원들에게 배신당해 화병으로 가셨다고도 하고…. 격앙된 분위기 속에 어떤 이는 정말 문 목사답게 멋있게 가셨다고도 하였다. 같은 때 돌아가신 정일권과 비교하며 문 목사의 삶을 되새기기도 하였다.

가족들은 왕진 온 의사가 있었단 사실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그 의사에게 쏟아질 비난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한참 후 의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뉴스를 보고 너무 놀라고 그때처럼 의사 된 것이 후회스러운 적이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 마석 모란공원 묘소에서 상을 차리고 추도예배를 하고 있다.
 
 
병원진료 모시지 못해 죄인 된 심정
일흔이 넘은 나이에 감옥에서 10년 넘게 산 분을 병원 검진도 안 받고 쉼 없이 뛰어다니게 하고… 또 그런 심한 통증을 듣고도 병원으로 모시지 못한 자식들은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사실 아버지는 허혈성 심장질환이라는 병을 갖고 있었다. 방북 후 1989년 감옥에서 몸이 붓고 심한 통증으로 고생하자 많은 분들이 투쟁하여 1990년 1월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때 검진결과 나온 병명이었다. 여러 번 감옥생활하는 동안 힘든 내색 없이 보람 있게 잘 지낸다는 말만 했었는데 방북 후 투옥은 굉장히 힘들어하였다.

북의 통일방안을 유연하게 바꿔 남과 접점을 만들었고 남북정상회담 가능성까지 열었으니 정부가 이를 받아 나서면 될 텐데 당사자를 투옥하면 북과의 관계가 어렵게 된다는 염려였다. 그래서 북에는 자신의 투옥여부와 상관없이 관계개선에 힘써 달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남에는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간절히 자신의 뜻과 방북성과를 알리려 하였다. 가족들은 그때 생긴 마음의 병, 즉 감옥병이라고 생각했다.

되돌아보니 돌아가시기 몇 주 전부터 피곤해하고 힘들어 하셨다. 그때 왜 깨닫지 못했을까.
워낙 건강을 챙기고 관리하였기에 알아서 하시겠거니 너무 믿은 것이 아닐까. 그런 분이 병원에 가자고 할 때는 심각한 상태인데…. 죽을 만큼 아픈데도 신음 한마디 안 내고 참으시는 분은 또 뭔가? 우리는 허둥대기만 하다가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그런 자식들이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겠는가!
우리가 무심했고 안이하였다. 그래서 자식들은 죄인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우리를 나무라지 않을 것을 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 갈등이 있었던 범민련 동지들도 탓하지 않으실 줄 안다. 아마도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서로 이해하고 등 두드리며 함께 하셨을 것이다. 사실 돌아가시던 날 마지막 쓰신 편지가 그분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함께 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그때 그분들이 받은 비난이 안타깝다.
우리는 그런 심정으로 조문객들께 절을 올렸다.

아버지의 남겨진 수첩에는 1월 18일 결혼식 주례가 적혀 있었다. 그 결혼식은 어찌 되었는지.
그 뒤 며칠까지 일정이 있고 그다음 수첩은 깨끗하였다. 너무 황망하게 가신 것이 다시 느껴졌다. 아버지는 가실 것을 미리 느끼셨을까? 어찌 보면 죽음을 넘어서 계셨던 것 같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촛불처럼 마지막까지 모두 태우고 가셨다고 느꼈다.
 
 

평생의 동지들 한꺼번에 다 보실 수 있으니…

처음 아버지 산소자리가 너무 좁고 높고, 해도 잘 안 든다고 속상해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때는 너무 급히 구하느라 어쩔 수 없었는데 ‘그래도 평생의 동지들을 한꺼번에 다 보실 수 있는 높은 곳에 계시니 좋지 않으세요?’하며 위안을 삼았다.

사실 처음에 가족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묻히신 소요산 가족묘역에 모시려 하였으나 장례위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배할 수 있게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모시자고 하여 그 뜻을 따랐고 2011년 어머니 돌아가신 후 합장을 해 드렸다. 

그런데 1989년 함께 방북했던 정경모 선생이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2021년에 일본에서 돌아가시자 민주통일운동의 동지들이 문익환, 정경모, 유원호 세 분을 함께 모셔 통일동산을 만들자고 제안하셔서 이제 마석 모란공원 양지바른 곳에 모시게 되었다.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에 있는 늦봄의 묘역. 평생 동지인 유원호, 정경모 선생과 함께 나란히 모셔졌다.


월간 문익환_1월 <늦봄의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