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1월 <늦봄의 별세>

🈷️ 늦봄의 마지막 기록들

자서전은 없지만… ‘삶이 위대한 기록’

 
[편집자주] 기록은 기억을 이끌어 낸다. 추모란 고인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이기에, ‘죽음이라는 사건’과 ‘기록’은 아주 가까이 닿아있다. 김초엽의 SF 소설 『관내분실』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 딸의 이야기를 다룬다. 글 속의 도서관은 묘소와 봉안당을 대체하는 추모의 공간이며, 고인의 거의 모든 데이터를 담아 영상으로 재현하는 ‘마인드’를 열람하는 공간이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구현된 공상과학의 세계이지만 죽은 이를 떠올리며 기록을 찾아간다는 현상은 현실 세계에서도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의 소장 기록은 거의가 유물이다. 고인이 남긴 기록으로 가득 차 있다. 『월간 문익환』 1월호에서는 문익환 목사 29주기를 맞아 그의 마지막 순간의 기록과 장례 및 추모 기록을 소개한다. 
  
 
아픔이 아닙니다
결코 아픔이 아닙니다
아픔 딛고 넘어가는 절망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죽음도 아닙니다
그것은 죽음 이상입니다
그것은 겨레입니다
겨레의 부활입니다
겨레의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 문익환의 시 「당신의 청춘은」 중에서 
 
  
 

통일의 집 대문 앞 손님들 배웅 사진

▲마지막 모습
문익환 목사가 남긴 마지막 사진은 1994년 1월 17일, 그러니까 유명을 달리하기 바로 전날 밤 박용수 기자가 찍은 것이다. 통일의 집 대문에서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손님들을 향해 왼손을 번쩍 들어 배웅하는 모습이다. 빨간 마고자와 감색 바지의 한복 차림이었다. 정경모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문 목사는 17일 밤늦게까지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쪽 의장에게 편지를 썼다고 하는데 그날 통일의 집에서 새로운 통일 운동체 관련한 모임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 자택(통일의 집) 대문에서 손님을 배웅하는 문익환 목사. 별세 전날 밤 모습이다(1994. 1. 17.). ⓒ 박용수
   
 

범민련 대표자들에게 “답신을 기다립니다”

▲마지막 메시지
범민련의 남쪽·북쪽·해외 본부 각 대표자에게 썼다는 편지가 그가 남긴 마지막 기록이 되었다. 문 목사가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이라는 새로운 통일 운동체를 조직하며 범민련 남쪽 본부 의장직을 사퇴하자 범민련 측의 반대가 있었다. 그에 대해 통일을 바라는 운동 자체가 하나가 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호소의 내용이 담긴 답신이었다. 날짜는 1월 18일로 쓰여 있다. 이 답장이 팩스로 보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익환 목사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편지가 공개되면서 메시지는 전달되었을 것이다.      
 
“ … 이 중대한 시기에 저는 범민련 남쪽본부 준비위원장으로서 제 직책을 다 못하고 도중하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감천만입니다. 
제가 남쪽본부 준비위원장에서 물러난 것은 통일운동을 그만두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남쪽의 통일운동을 더 크게 묶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이 중대한 시점에서 우리는 둘로 갈라져가고 있습니다. … 통일운동 자체를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면서 반세기에 걸친 민족분단의 역사를 청산하고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하겠다고 어찌 감히 말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 7천만 겨레의 통일의지를 담아낼 틀을 다시 짜고, 세 지역의 통일운동이 한 흐름이 될 수 있는 길 또한 진지하게 모색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 분의 답신을 기다립니다. 
94. 1. 18 서울에서 문익환 올림”
 
  
◇ 문익환 목사가 남긴 마지막 기록. 범민련 남쪽·북쪽·해외 본부 각 대표자에게 쓴 편지(1994. 1. 18)
 
 

방명록만 20여 권…봄길이 나중에 필사

▲장례 기록
문익환 목사의 타계와 장례 관련 기록은 당시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었기 때문에 뉴스나 신문 검색으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아카이브에서 소장 중인 장례 관련 기록은 장례 관련 안내문, 방명록, 조의금 내역, 장례식 사진, 기사 스크랩 등이 있다. 빈소를 찾은 이가 남긴 방명록은 20여 권에 달하는데 방명록에 적힌 추모 문구를 아내 박용길 장로가 따로 필사한 노트가 인상적이다. 문익환 목사가 시작하였으나 실행하지는 못한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이라는 과업을 앞두고, 장례 후에 홀로 방명록을 한 장씩 넘겨보며 문장을 정서했을 박용길 장로를 떠올리게 된다. 

 
“날씨도 몹시도 추웠던 1994년 1월 18일 문 목사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우리 민족이 준비 없이 해방을 맞아 분단이 되었으니 통일은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며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을 시작해놓고 열흘 만에 돌아가시니 나는 그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
부모님과 같이 네 식구가 살던 집에 나 혼자 남아 그 집을 ‘통일의 집’이라고 붙여놓고 유품들과 사진, 자료들을 보관하고 전시하여 놓았다.” (박용길 2011 「나의 이야기」)
  
  
◇ 조문객이 남긴 방명록을 박용길 장로가 정서한 추모글 노트
 
 

별세 이후 전보-서신-행사기록 등 다양

▲추모 기록
문익환 목사를 추모하는 기록은 1994년 1월 18일부터 지금까지도 만들어지고 있다. 타계 소식이 전해진 직후 각지로부터 도착한 전보와 서신, 미국과 일본에서의 추도식 기록, 묘비제막식 및 공연 추모 행사 기록 등은 별세 당시에 주로 생산되었다. 그리고 모란공원 묘소에 비치된 방명록의 글과 매해 1월에 치러지는 추도식 기록은 계속해서 축적되는 기록이다. 그 외 여러 정기간행물에서 문익환 목사 추모 특집호를 내기도 했다. 『월간 문익환』도 늦봄 문익환을 기리는 하나의 기록으로 아카이브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 각지에서 발송된 추모 전보(좌)와 3주기 추모 행사 팸플릿(우) 
 
◇ 여러 정기간행물에서 발간한 문익환 목사 추모 특집호
 
 
추모 관련 기록을 찾다 보니 주기별 정리가 되어있지 않고 사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추모 행사는 했지만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연도도 있을 것이다. 2024년이면 어느덧 30주기를 맞는데 누락된 기록의 보완이 절실한 때이다. 추모 행사 기록 소장자들의 기증을 기다린다. (문의: ✉️ tongilhouse@daum.net / 02-902-1623)   
    
 

자서전 한 권 남기지 못하고…

문익환 목사의 죽음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사건이어서 죽음을 준비하는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못하였다. 문익환 목사의 부모 문재린 목사, 김신묵 권사가 말년에 자녀들과 함께 구술 기록, 회고록, 병상일지 등을 남긴 것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문 목사의 장녀 문영금 통일의 집 박물관장은 아버지가 자서전 한 권 남기지 못하고 떠난 것을 아쉬워했다. 그의 입으로, 손으로 직접 정리한 자서전은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가 남긴 방대한 기록이 있다. 이제 기록을 읽고, 정리하고, 그의 발자취를 통해 가르침을 받는 것은 남겨진 우리의 몫이다.  
 
 

<글: 박에바>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쓰는 것 보다는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수동적 내향인, ISTP.



 
 

[참고문헌]
박용길 (2011). 「나의 이야기」 『씨알의 소리』 2011년 11·12월 통권 219호
정경모 (2009. 12. 08). 🔗「길을찾아서: 뜬소문 고초겪다 눈 감은 문 목사」.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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