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1월 <늦봄의 별세>

🈷️ 늦봄이 맞이한 죽음의 순간들

“눈을 번쩍 뜨시죠. 새 세상이 보일 겁니다. 
  저승과 이승이 하나인 더 큰 세상 말입니다”


늦봄의 인생은 함께 살아간 동시대인들의 죽음에서 특별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친했던 벗으로 알려진 윤동주와 장준하를 비롯해 수많은 학생과 동지들의 죽음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선택하게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에도 죽음을 마주했던 여러 고비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없었으면 난 저승 사람”

▲폐병 걸린 청년

 
◇금강산으로 휴양을 가서 설산을 뒤로 하고 서 있는 문익환, 1941년
 
 
박용길과 결혼하기 전인 1941년, 문익환은 생애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훗날 그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지요. 
 
“명주실처럼 예민한 신경을 가지고 폐병, 늑막염, 위산 과다로 죽어가던 몸과 마음을 소리 없이 감싸주고 떠받들어준 그 사람이 없었다면 저는 벌써 저승 사람이었을 겁니다(문익환 1990. 6. 1).”

문익환은 폐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금강산으로 들어가 6개월간 치료에 전념했고 드디어 1944년 6월 결혼반대를 극복하고 코스모스같았던 박용길과 평생가약을 맺었습니다. 그의 나이 54세 때 펴낸 첫 시집 『새삼스런 하루』에 실린 시 ‘덤’에는 결혼을 성사시킨 비결이 무엇이었는지가 담겨있습니다. 
  


(중략)
여섯 달 살고
혼자되어도 좋다며
시집 온 아내-
그 나팔꽃 같은 마음에 내 목청을 다 쏟고
펄럭이는 가슴 옷자락에
아내의 체온을 묻히며 살기
벌써 28년,
이제사 나는
덤으로 사랑을 알 듯하다.
 
 

한약 먹고 저승문턱에…왼쪽 청각 마비

▲나약한 신체, 한쪽 귀가 멀다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보낸 편지, 1965년 10월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구약학 교수, 교회 목사로 활동했던 문익환은 마흔다섯 살이던 해 병약했던 그를 위해 제자가 구해온 한약을 먹고 ‘저승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오면서 한쪽 귀를 잃었다고 합니다. 그 후 1965년 9월 안식년 삼아 방문했던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그는 미국의 병원을 다니며 난청이 된 한쪽 귀를 다시 찾게 되기를 소망하기도 했었지요.
 
“제 귀는 아직 한 번 더 test를 받아야 알겠지만 어떡하면 수술받고 다시 듣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듭니다. 의사는 무어라고 말은 않지만, 전일 test를 받을 때 왼쪽 중간에 기계를 대고 보내는 소리가 들렸었거든요. 그렇게만 되면 미국 온 보람이 있고도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미리 좋아하다가 실망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마는(문익환, 1965. 10).” 
 
 

“아직 2주일은 버틸 수 있어”

▲죽을 결심으로 했던 21일간의 단식

 
◇큰아들 호근이 쓴 단식기, 1977. 6. 1-7.1
 
문익환 목사는 감옥 안에서 여러 차례 단식을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전주교도소에서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21일간의 단식을 하며 그는 죽을 결심을 했고 마지막 시를 쓰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큰아들 호근이 쓰고 정리한 ‘아버님, 문익환 목사의 단식’으로 이름 붙여진 단식기는  총 26페이지짜리 기록인데 단식 중인 아버지를 6월 1일부터 8일 이후까지 날짜별로 면회한 이야기와 당시 늦봄이 쓴 옥중편지를 모아 정리한 것입니다. 
 
“1977년 6월 1일
… 단식하신다면서요?
응, 이 나라가 민주화의 방향으로 전환할 때까지 무기한으로 하는 거야. 사람은 죽을 자리를 잘 찾아야 하는 건데, 필생의 사업인 성경번역이 일단락이 되었고, 또 지금 내가 민주화 운동의 핵심적인 위치에 노이게 되었으니, 이처럼 좋은 죽을 자리가 어디 있어?…  이건 투쟁이 아냐. 저 사람들이 나같은 거 단식한다는데 눈이나 깜짝 하겠어? 그래도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 나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해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지. 아직 두 주일은 더 버틸 수 있어….”
 
 

어머니도, 함석헌 선생도 단식 동참

▲우리로 하여금 하나 됨을
  
◇함석헌 선생이 보낸 편지, 1977. 9. 7
 
고령의 나이로 감옥에 있으면서도 그의 ‘불식(不食)’은 매우 잦았습니다. 오죽하면 그를 담당했던 당직 교도관들이 동정 보고 시 취식 상황에 대한 보고를 함께 올리기도 했을까요. 1977년 9월에도 늦봄은 민주회복을 위해 30일간 금식기도를 하겠다고 했는데 이를 전해들은 가족, 특히 고령인 모친 김신묵은 아들이 중단 할때까지 본인도 함께 금식 하겠노라 해서 많은 이들이 걱정했었지요. 함석헌 선생도 늦봄의 단식을 만류하기 위해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혼자서 하지 말고 함께 해 나가자고요. 함 선생께서는 편지 속에서 감옥 안과 밖이 차례로 100일간 단식을 하며 하나됨을 얻자고 간곡하게 청하고 있습니다. 
 
“....한 번에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씨ᄋᆞᆯ 앞에 다시죽고 다시 죽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이 아닌가 합니다…쾌히 승낙하시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 됨을 얻는데서 오는 기쁨으로 속에서 힘이 솟음침을 경험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1977년 9월 7일  늙은 바보새”
 
 

별세 나흘 전 “저승과 이승이 하나된 세상”

▲더 큰 세상이 보일 겁니다
  
◇박남길, 박용애에게 보낸 편지, 1994. 1. 14
 
1994년 1월 18일 별세한 늦봄은 그로부터 불과 나흘 전, 남편을 잃은 처형에게 위로 편지를 썼습니다.
 
 “박남길 장로님, 박용애 님. 어느 아침 눈을 번쩍 뜨시죠. 새 세상이 보일 겁니다. 저승과 이승이 하나인 더 큰 세상 말입니다(문익환, 94. 1. 14).” 
 

평소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다” 라고 했던 늦봄 문익환, 그에게는 삶과 죽음조차 하나이고 더 큰 세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늦봄문익환아카이브가 늦봄의 뜻을 널리 알리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열어가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글: 아키비스트 지노>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의 삼 년 묵은 아키비스트로 늦봄과 봄길의 기록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하는 아카이브하는 사람이다.


 

월간 문익환_1월 <늦봄의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