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1월 <늦봄의 별세>

[시 속의 인물] 11. 송광영 학생열사

[늦봄과 ‘이 사람’] 시 속의 등장인물로 살펴본 인물 현대사

‘제 똥 구린 줄이라도 아는 세상이 되기만 한다문사
광영인 백 번이라도 제 몸에 불 싸지를 거구만’

 
◇송광영 열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성남 경원대 교정에서 분신 

1985년 8월 15일 광주광역시 금남로에서 노동자 홍기일(당시 25세)이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불길에 휩싸인 몸으로 ‘8.15를 맞이하는 뜨거운 무등산이여!’라는 제목의 유서를 뿌리며 “광주 시민이여 침묵에서 깨어나라”고 외쳤는데, 일주일 만인 22일에 운명했다. 한달 후 9월 17일에는 성남시 경원대학 교정에서 법학과 2학년 송광영(당시 27세)이 분신자살을 기도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분신한 그는 ‘광주 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학원 악법 철폐하고 독재정권 물러가라’고 외치다 쓰러졌고, 1달 뒤인 10월 21일 운명했다.

홍기일 열사가 운명하자, 경찰은 1,000여 명을 동원,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연행하고 가족들의 절규 속에 시신을 탈취하여 미리 준비한 관에 입관, 열사의 부친만 동행한 채 화순군 야산의 매장지에 관을 매장하는 폭거를 자행하였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의장이던 늦봄과 민통련 간부들은 8월 24일 열사의 영결 예배에 참석하러 광주 한빛교회로 내려가고자 했지만, 경찰이 이들을 모두 자택에 차단하는 바람에 참석은 불발되고 말았다.

 

경찰 방해로 영결식 없이 매장

송광영 열사의 장례도 홍기일 열사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가 운명하자 경원대 학생들이 교내에 분향소를 설치했으나 학교와 경찰이 이를 철거하였고, 장례식 준비를 위해 서울 면목동 기독병원에 모인 재야인사 17명은 경찰에 연행되어 열사의 소식을 「민중의 소리」 호외로 알린 사실 등을 조사받았다. 송 열사도 경찰의 방해로 영결식 없이 매장되었다.

 

청계 노조 활동하다 경원대 입학

광주 태생의 송 열사는 서울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청계 노조에서 활동하다가 방위병 제대 후 고졸검정고시를 거쳐 경원대에 입학했다. 실존주의 철학연구회와 경제문제연구회를 창설한 그는 군부 독재정권이 학생 시위 탄압을 위한 학원안정법 제정을 획책하자 악법 철폐와 광주 학살 책임을 요구하며 분신한 것이었다. 그는 병상을 찾아온 민주인사와 학생들에게 “왜 오셨습니까. 오시지 말고 밖에서 싸워 주십시오”라며 투쟁을 독려하였다. 늦봄은 송 열사가 화마와 싸우던 1달 동안 자주 병원을 찾아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11월 28일에 가진 별도의 영결 예배에서 계훈제 선생과 함께 추도사를 했다.

 

늦봄 ‘나의 조국 나의 사랑’ 추도시

늦봄의 시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은 송 열사 추도시다. 11월 28일 추도 예배를 위해 준비했거나 아니면 이후 85년 말~86년 초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시 속에서 늦봄은 운명한 열사와 그의 어머니(이오순 씨)에게 빙의된 듯한 모습으로, 열사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장면과 속삭이는 말, 어머니의 애끓는 외침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늦봄은 열사의 차가운 이마를 만지며 오싹한 떨림을 느꼈다. 그 떨림은 ‘광주’이며 또한 앞서 운명한 ‘홍기일 열사’라고 말했다. 화순 태생의 홍 열사는 5.18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하여 총상을 입었던 노동자로, 송 열사와 똑같은 뜻을 갖고 분신했기 때문이었다. 

시 속에서 송 열사의 어머니는, 자신은 민주주의가 뭔지 몰라도, 그러나 자식새끼의 마음, 광영의 마음이 민주주의라면 ‘민주주의 만세’라고 외친다. 광영의 몸은 식었어도 에미의 가슴이 불붙고 있으니 광영의 마음도 어찌 식겠냐고, 그 마음이 식으면 조국이고 민주주의고 다 거짓말이라고 절규한다. 대학 졸업장도 못 받고 장가도 못 가고 땅에 묻히는 아들이지만, ‘제 똥 구린 줄이라도 아는 세상이 되기만 한다문사 광영인 백 번이라도 제 몸에 불 싸지를 거구만’이라 말하는 것이 어머니의 굳은 의지이고 광영에 대한 믿음이다. 

송 열사 사후 어머니가 쓴 글을 보면, 광영이는 교통사고를 당한 친구를 위해 10일 동안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다녔고, 학원 다닐 때 장학금을 타서 신문팔이 소년을 주고 왔다고 말하는 아들이었다고 한다. 없는 자를 보면 돕고 싶어 하고, 어머니의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면 꼭 효도할게요”라고 말하는 착하고 정이 많은 청년이었다. 어머니는 경찰과 싸우며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아들이 왜 죽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고, 진정한 민주주의 나라를 만들고 싶은 뜻을 아들의 영혼에 빌었다.

 

송광영 열사 추모사업회 회장 맡아

송 열사의 영결식 이후 늦봄은 송광영 추모사업회 회장을 맡아 열사를 기렸다. 그러나 1986년~1987년, 1989년~1990년 중 수감되었던 늦봄은 회장 구실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며 편지로 미안함을 표했다. 이 편지에 따르면, 광영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문익환 목사와 이OO 목사 때문에 막내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목사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가,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장례식을 꼭 목사들이 해주어야겠다고 버텼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는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에서 활동했는데, 늦봄은 이소선 여사가 몸이 불편할 때는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는 분이라며 고맙다는 마음을 드러냈다.
 
이제 광영의 자리를 의젓하게 어머님이 메우며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 싸우시는 걸 보면서 광영이도 지하에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광영의 어머니가 이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게까지 되었으니, 다만 놀랄 뿐입니다. (옥중편지. 1990. 8. 22. 광영이 어머니가 5월에 안양교도소로 편지를 보내고 8월 8일 전주교도소로 면회를 다녀간 것에 대한 답신임)

1991년 유가협 부회장을 맡은 송 열사의 어머니는 강경대 치사 사건 공판 도중 부당한 재판에 항의하다가 1년 6개월의 수배 생활을 하게 된다. 1993년 송 열사의 묘를 마석모란공원으로 이장하는 일까지 마친 어머니는 1994년 1월 늦봄의 별세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일주일 동안 시름시름 앓은 어머니는 모란공원까지 가서 늦봄의 마지막을 지켜보았고, 이후 ‘목사님만 뵈면 힘이 솟았는데 이젠 살맛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결국 1월 26일 심장마비로 쓰러져 막내아들과 늦봄이 묻힌 모란공원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긴 채 운명하고 말았다. 

1990년 송 열사의 5주기 되는 해에 추모비가 경원대 학생회관 앞에 세워졌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96년 9월 추모비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학교 측이 추석 연휴 직전에 벌인 일이었다. 이에 유가협은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 추모비 탈취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밤샘 농성 등 2개월 동안 처절하게 노력한 끝에 훼손된 추모비를 되찾았다. 12월에 추모비를 다시 세웠고, 2022년 지금은 1991년 분신한 천세용 열사의 추모비와 함께 교정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글: 조만석>
언제든, 누구와 함께든, 사람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어디든, 걷기를 즐겨 합니다.





[참고문헌]
문익환 옥중편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열사정보 https://www.kdemo.or.kr/notification/calendar/post/3491


 
◇양심수 석방 촉구대회에서 송광영 열사 어머니 이오순 여사와 인사하는 늦봄

  
◇송광영 열사 어머니가 안양교도소로 보낸 엽서 
 
 
나의 조국 나의 사랑

문익환

1985년 10월 21일 새벽
면목동 기독교병원 응급실에서
나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숨이 멎어 하늘이 된 당신을
죽은 듯이
아주 영 죽어 버린 듯이
당신은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눈을 감고 무엇을 보시나요
입을 다물고 무엇을 말씀하시나요

나의 이 더러운 손
당신의 거룩한 이마에 얹어 보았습니다
지금은 온기 하나 없는
싸늘한 이마 오싹하며
나는 부르르 떨었습니다
그 떨림은 광주였습니다
홍기일 열사였습니다
그것은 조국이었습니다
두 동강 나 찢어지는 아픔
몸살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결코 절망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신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픔 딛고 서서
살 속 뼛속으로 파고드는 절망을 불살라
가슴 가슴에 모닥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중략)
시상에 죽은 내 아들 광영이를
왜 이리도 무서워한당가
광영이는 이젠 말도 못하는디 말이여
제 몸에 불지르고 뛰지도 못하는디
어쩌자고 모두들 이 지랄이여
왜들 겹겹이 둘러싸고 문상도 못 오게끄럼 막는당가
왜 문 목사랑 계 선생이랑 이 목사랑 끌어낸당가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디 그기 정말인개비여
꼭 제 방귀에 놀라는 토끼 꼴이랑께
광영의 굽힐 줄 모르는 마음이 무서운 거 아니겠습니까
정말이지 그렁개비여
광영의 몸이사 이제 싸늘하게 식었지만
그 맴이사 어디 식겄어
어림반푼 없는 소리지
이 에미 가슴 이리 불붙는디
그 맴이 어찌 식겄어
그 맴이 식는다면
당신들이 떠들어쌌는 조국이고 민주주의고
다 거짓말이여 거짓말
자유고 진리고 정의고
다 개나발이여 개나발
맞습니다 어머니
그 마음이 식으면 모든 게 개나발이라는 말
천 번 만 번 옳은 말입니다
우리 아들은 어려서부터 거짓말이라고는 몰랐응께
이기 돌이라 하면 그기 돌인 거고
이기 나무라 하면 그기 나무인 거고
난 형들처럼 안 살 것이여 하더니만
이렇게 제 몸에 불 팍 지르고 죽지 안 히였겄어
그렇군요 어머니
죽음으로 산 그의 진실이 그리도 무서운 거군요
거짓말로 살이 피둥피둥 오른 것들이
우리 아들 광영의 그 거울 같은 마음씨가
어찌 안 무서울 것이여
그의 진실 앞에서 세상의 온갖 거짓이 숨을 쉴 수 없이 된 거지요
그렇다문사 을매나 좋을 것이여
내 아들이사 대학교 졸업장 못 받아 보고
장개도 못 가보고
땅속에 들어가 썩어 버리겠지만
제 똥 구린 줄이라도 아는 세상이 되기만 한다문사
광영인 백 번이라도 제 몸에 불 싸지를 거구만

월간 문익환_1월 <늦봄의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