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성도 조국통일에 뛰어들게 되었군요”
30주년 맞은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
[편집자주] 지난 2021년 6월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여성위원회 주최로 남북 민간여성교류를 되돌아보는 간담회가 열렸다.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지금은 경색된 남북관계탓에 행사는 남쪽 인사들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토론회가 시작된 시기에는 도쿄-서울-평양을 오가며 많은 관심을 받았었다. 이 글은 특별했던 토론회의 처음을 이끌었던 남한측 여성 평화운동가 이우정(1923-2002), 이효재(1924-2020)의 이야기를 늦봄 봄길의 기록들 속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1993년 3월 18일 문익환 석방환영회에 참석한 여성계 인사들. 왼쪽부터 임수경, 이효재, 이우정, 박용길, 문익환, 장영달
“이우정-이효재 선생에게 축하한다 해주시오”
▲늦봄 편지에 남겨진 여성 벗들의 이름
이 글은 늦봄 편지에 등장하는 이 짧은 문장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대체 감옥 안에 있던 늦봄을 기쁘게 했다는 이우정 장로와 이효재 선생이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여성도 아시아의 평화와 조국의 통일에 주체적으로 또 주도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싶어 정말 기쁘군요. 이우정 장로, 이효재 선생에게 축하를 보낸다고 전화라도 해 주시오”(문익환, 1991.11.12)
북측 대표 려연구 도쿄서 첫 만남
▲도쿄-서울-평양으로 이어진 남북 민간여성 교류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다. 이 토론회의 시작은 그때로부터 몇 개월 전인 1991년 5월, 일본 도쿄에서였다.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민간여성교류라고 할 수 있었던 도쿄에서의 역사적 만남은 일본 여성단체가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란 심포지엄을 주최하면서 남북의 여성대표들을 초청해 이루어졌다. 이우정(민주당 최고위원), 이효재(한국여성단체연합 회장), 윤정옥(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이 남한측 인사로 초청됐고 북한에서는 려연구(최고인민회의 상설위원회 부의장)등이 초청되었다. 도쿄에서의 첫 만남에서 이들은 곧 서울에서 2차 토론회를 갖기로 합의했다.
늦봄, 남북여성 토론회에 축하 전화 당부
▲아흔 아홉 아리랑 고개 넘어
서울 토론회를 준비하기 위해 남한의 여성대표들은 정당, 여성계, 학계 등을 망라해 실행위원회를 구성했고 이우정, 이효재, 윤정옥이 공동대표를 맡았으며 공덕귀(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 박영숙(민주당 국회의원), 이태영(가정법률상담소장), 조아라(전 YWCA 회장) 등이 참여했다. 늦봄 봄길과 동시대인인 이들이 이끌었던 서울에서의 2차 토론회는 개최 과정부터 쉽지 않았고 토론회 날짜가 연기되기도 하며 여성 대표들은 ‘아흔 아홉 아리랑고개’를 넘어야 했다. 긴 노력 끝에 그해 11월 25-26일에 평창동 라마다 올림피아 호텔에서 열렸던 토론회는 ‘여성과 문화’라는 주제아래 남측은 ‘가부장제문화와 여성’ 북측은 ‘통일과 여성’ 일본측은 ‘평화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발제를 하였다.
당시 늦봄은 여섯번째 수감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가 언제부터 이 행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방북 후 19개월동안 갇혔던 감옥에서 가석방되었다가 1991년 6월, 명지대 학생 강경대군의 장례위원장을 맡은 일로 5개월만에 다시 수인이 된 그에게 이 소식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편지에서 늦봄은 판문점에서 있었던 남북 여성들의 토론회 예비 접촉 소식을 듣고 감격해 하면서 여느 때처럼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축하의 전화를 당부했다.
봄길, 행사직전 이우정 대표와 예배
▲여성들의 모임이 잘되기를 빕니다
봄길 박용길이 남편에게 쓴 편지에도 이 토론회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행사의 대표로 활약했던 이우정과 친분이 깊었던 박용길은 예비 회담이 열리기 전 주일날 쓴 편지에 이우정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안병무 박사의 병문안을 다녀온 얘기와 함께 행사가 잘 진행되길 바라는 마음을 적어 보냈다.
“이우정 장로 이번에 남북여성들이 모이는 것 잘 성사시켜서 예정대로 잘 되기를 바라겠읍니다”(박용길, 1991.11.10)
바로 한해 전 서울에서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1차. 1990. 9. 5) 당시 방문한 북측 기자들과의 접촉 가능성 때문에 재야인사들에 대한 가택 연금이 있었다. 이로 인해 집 주변에 전경이 배치되고 출입자들에 대한 신분 확인이 있었다(한겨레 신문 1990. 12. 14). 봄길에게 이번 토론회는 또다시 비슷한 경험을 하게 하였다. 이는 토론회가 열렸던 당일 봄길이 쓴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밖에서는 제가 나갈가봐 신경들을 쓰고 있는 모양인데 여성들의 모임이 잘되기를 바라면서 집에 있을 겁니다.” (박용길, 1991. 11. 25)
평양 3차 토론회 여성계대표 첫 방북
▲저에게 왜 안갔느냐고 묻는군요
제3차 토론회는 평양에서 열렸다. 다음 해인 1992년에는 9월 1일부터 5박 6일간 열린 토론회는 분단 후 여성계 대표들의 첫 방북으로 기록된다. 이 행사에는 이태영, 이우정, 이효재를 비롯해 30명의 남측 여성대표단이 참여했다. 공동취재단도 대동했던 그들은 연일 평양으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전해왔다. 특히 이 토론회에서 남과 북 여성들은 위안부 공동대처를 합의하는 성과를 냈으며 마지막 날 예정에 없던 김일성 면담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김일성과 악수하는 여성대표들의 사진은 신문 1면에 실리기도 했다(경향신문 1992. 9.7).
이 토론회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여성들이 펴는 “통일을 향한 평화운동” 입니다(이효재, 1992. 9.8 평화토론회의 성과와 전망, 한겨레 신문 기고문)
불과 3년 전 늦봄은 방북을 했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바로 체포되어 70이 넘은 나이에 큰 고초를 겪었다. 그런 남편을 둔 아내로서 봄길은 이러한 상황에 관해 어떤 마음이었을까?
“북쪽에 가신 분들이 연일 사진으로도 보도되고 오늘은 금강산 구경을 하신다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제게 ‘왜 안갔느냐’고 묻는군요. 모두가 다 아는 분이니까 도라오면 실컷 이야기를 듣기로 하겠읍니다.” (1992. 9.4)”
봄길은 평안북도 대유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곳은 어머니 현문경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평양에 갔던 일행이 돌아오던 날 그녀가 남편에게 쓴 편지에는 이런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우정)장로 일행이 도라오는 날이라 꼭 제가 가서 맞이하고 싶어서 요셉이 아빠와 같이 통일 회담장소로 갔읍니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도 있었던가싶게 나무가 울창하고 공기가 좋았읍니다…. 여러 사람들이 마중나오고 이태영 박사댁에서는 딸들, 며느리 모두나왔어요. 한분 한분 차에서 내리시는데 껴안아드렸지요. 모두 제 생각을 많이 하셨다는군요... 이렇게 오고가면서 어서 하나가 되어 외세를 물리쳐야지요. 모두가 감격해하시며 당신께 치하를 드립니다.” (박용길, 1992. 9.6)
2020년 10월, 한창 늦봄온라인아카이브를 준비하던 때, 이효재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아카이브에서 일하면서 듣는 부고는 고인과 관련된 소장 기록을 꺼내고 관계를 살피고 의미를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하지만 아쉬움만 남긴 채 지나쳤던 기억이 있다. 그런 마음이 늦게나마 이효재 선생을 비롯한 여성 평화통일 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늦봄 아카이브 소장기록 속에서 살펴보게 하였다. 이렇게 1991년-1992년 대한민국의 시간을 다시 떠올려보며 아카이브의 힘을 생각해 본다.
<글: 아키비스트 지노>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의 삼 년 묵은 아키비스트로 늦봄과 봄길의 기록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고 싶어하는 아카이브하는 사람이다.
[참고문헌]
윤영애.(1993).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한국여성신학,(14),70-73.
신준영.(1991).아흔 아홉 아리랑고개 넘어'성사된 남북여성토론회.말,(66),106-107.
박수원.(1999).남북 여성토론회 예비회담 참가한 이효재선생.말,(156),50-50.
월간 문익환_12월 <통일꾼 늦봄>